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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 (눅 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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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기다립니다.
올해는 아쉽게도 성탄절이 주일과 겹칩니다.어떤 분들은 성탄절 하루 더 쉬는 휴일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탄절날 애인과 멋지게 데이크 할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청춘남녀들이 있습니다. 성탄절날 가족끼리 외식을 하는 즐거움으로 기다리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선물을 받는 날로 알고 선물을 기다리면서 성탄절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속에서 성탄절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찬양을 발표하기 때문에 축하 파티를 하기 때문에 성탄절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눈을 맞으면서 성탄절새벽송을 돌던 그 추억과 한달이상 추위 속에서 칸타타를 준비하던 성탄절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가까우면 교회들마다 풍성한 찬양소리를 기대하면서 성탄절을 기다리곤 합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성탄절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 오늘 성경 본문에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축제때문도 하루를 쉬는 휴일때문도 외식 때문도 파티때문도 아닌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린 그 사람은 바로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는 외로움과 가난과 오랜 시간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 그분이 세상에 오실 것을 믿고 매일 매일 그 주님을 만날 것 그 주님을 대면할 것을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기다렸던 그 주님을 만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만났던 사람이 바로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살던 유대땅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의해 지배를 받고 경제적으로는 가난하고 종교적으로는 심히 부패한 상황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낙망하지 않고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낙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소망 중에 삶을 살았습니다.

2000년전에 이 땅에 오셔서 시므온을 만나주셨던 우리 주 예수님을 이제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그 만남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땅에서 그 시므온이 만났던 우리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복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기다리도록 도와주십니다.
25-27에 시므온과 관련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25절에'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에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시므온이 예수님을 기다리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항상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살았습니다. 많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율법을 좇은 형식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령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기 시므온에게 함께 하셧던 성령님께서는 시므온에게 예수님을 소망하도록 마음을 주셨고 의지를 주셨고 삶을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시므온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시므온이 소망을 갖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시므온의 외로움을 이길 수 있도록 인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시므온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 지시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시므온에게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여 그 뜻을 좇도록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시므온의 마음을 감동시키어서 주님을 기다리면서 살 수 있도록 붙잡아 주셨습니다.
특별히 25절에 보면 시므온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것을 봅니다.
성령님께서 시므온의 삶을 지도하심으로서 신령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을 흠없이 잘 지켜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곧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의롭게 살았다는 것입니다.시므오은 매일의 삶에서 오직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시므온이 살던 당시에 유대사회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엄청난 타락과 부패와 어두움의 시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당시에 바리새파 사두개파를 중심으로 제사장들 서기관들이 종교적인 기득권을 갖고 엄격한 법과 규칙을 앞세워서 성전에서 제사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대 종교인들은 제사를 드리는 외식과 형식은 있었지만 삶 중에 의로움이 없었습니다. 경건한 삶이 없었습니다. 말은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렸지만 그들의 삶은 오직 돈과 명예와 권력의 현세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달랐습니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성령을 따라 오직 주님 중심 오직 의롭고 경건한 성령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를 보고 우리의 믿음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화려해지고 얼마나 외적으로 발전했습니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았던 화려한 성전과 철저한 형식으로 시간을 따라 드려지는 수많은 제사들처럼 오늘날 화려한 교회당을 중심으로 시간을 따라 수많은 예배들이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건물 속에 그 예배 속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까?
오늘 주님이 찾고 있는 주님이 만나도록 안내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시는 임재의 복을 경험하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위로를 갖으면서 기다립니다.
25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위로는 곧 예언되었던 메시야의 오심이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여러 여건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삶의 목표로 생각하고 최고의 소망으로 여기고 살게 되었는데, 시므온도 그러한 소망 속에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시므온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면서 살았을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여기 시므온이 붙들었던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부터 오시기로 약속한 메시야 예언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구약에서부터 위로의 말씀을 주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위로의 약속이 바로 이사야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종 메시야가 이스라엘 땅에 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서 40장에서 55장에 보면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이 소개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야의 위로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주실 그 메시야는 고난받는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 위로의 약속이 이사야서 42장 1절-4절에 이렇게 소개합니다. 오실 그 메시야는 진리의 공의의 종이요 풍성한 자비의 종일 것입니다.
“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의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고 합니다.
이땅에 오실 그 메시야 여호와의 종은 많은 사람들을 죄에서 마귀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자로 오실 것입니다.이사야42장 7절에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내며 흑함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놀라운 새일을 하나님께서 메시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땅에서 행할 것임을 위로의 약속으로 구약에 주셨습니다.
이 위로의 예언의 약속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이후에 약 400년간 하나님이 거 발전적인 위로의 약속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하나님이 주신 구약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위로를 붙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위로는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있는 곳에 위로가 잇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소망이 있습니다. 에수님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예수님이 있는 곳에 공의가 있습니다. 인생의 절대 위로자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의 위로가 있습니다. 마음에 공허감이 채우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에는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인생은 외로움의 연속입니다. 청년은 청년들만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중년기에 계신 분들은 또 나름대로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노년기에는 노년대로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의 외로움이 있고 남편은 남편대로의 외로움이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지식이 있어도 인간으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외로움에 목이 말라서 세상의 방법으로 외로움을 이기려고 열심히 구해보십시오. 더 외로움에 목말라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편을 6명이나둔 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여러분 가장 종교적인 사회인 유대사회에서 여인이 남편을 6명까지 바꾸면서 산다는 것은 보통 용기와 결단이 아니고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더라도 죄인으로 취급당하더라도 인생의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남편을 또 구하고 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남자를 만나도 저 남자를 만나도 이 여인의 인생의 외로움과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고 갈급했습니다. 마치 매일 물을 마셔도 또 목마른 것처럼 그 여인은 영혼에 목말라 새로운 만남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예수님을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은 너무 기뻐서 마을에 들어가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합니다. 내가 만난 그 예수님이 마음에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솟나아는 샘물이십니다. 그분을 만날 때 마음에서 샘솟든 기쁨이 잇고 샘솟는 만족이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 중심에 채워지면 그 눈의 눈물이 사라집니다. 그 마음의 외로움이 사라집니다. 그 삶의 고통과 분노가 다스려집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찬양하며 기다립니다.
본문은 시므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찬양한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 시므온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찬양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오시기로 약속한 메시야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믿고 찬양했습니다.예수님음 그리스도이시다 메시야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아들을 낳게 되면 두 가지 행사를 거쳐야 합니다.
첫째는 8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구별된 백성이라는 표시입니다.
둘째는 헌아식입니다. 첫아들을 낳게 되면 성전으로 데리고 가서 주께 바치는 예식을 행했습니다.예수님도 8일 되던 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그 부모가 데리고 올라가 헌아식에 참석하게 되었슘니다. 거기서 시므온을 만난 것입니다.
8일만에 그 부모가 품에 안고 온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의 감격 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던 사람, 길고 긴 세월동안 예수를 만났습니다.그 예수님 앞에서 시므온은 예수님이 약속되로 오시는 메시야로 믿음으로 인정하고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봅니다.
먼저 시므온은 예수님이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 분으로(29)찬양합니다.
주님 은 우리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십니다. 시므온이 말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라는 말의 뜻은 이제 는 죽어도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토록 고대하고 대망하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 심령이 자유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백처럼 자유의 삶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사도 아무때나 못 합니다. 날을 잡고 시를 정해야 합니다. 결혼 날짜도 아 무때나 못 정합니다. 택일을 해야 합니다. 이블 꿰메고 장 담그고 김 장하는 것도 날을 잡아야 합니다. 묘지도 아무데나 정하지 못 합니다. 집을 짓는 것도 귀신한테 믈어보고 우향우 하라면 우향우측으로 정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결정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난 후로부터는 모든게 자유롭습니다. 믿기전에 문제되던 것들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다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가 너회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6: 1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 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처럼 매일 우리의 삶에서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이방 비추는 빛으로 찬양했습니다(32)
우리는 이 노래 가사 속에서 세계선교의 불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전통적 메시아 신앙은 유대인을 위해 오시는 메시아여야 한 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신앙 패문에 가나안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고 사마리 아 사람을 이단시 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로 오시는 그리스도가 이 방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8일된 아기 예수를 보면서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땅 넓이와 사람의 마음 크기는 비례합니다. 좁은 땅에서 나고 자라면 마음도 좁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넓히면 세계가 그 마음 속에 몽땅 들어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나자 이방 선교의 빛이신 메시아를 발견한 입니다.
우리는 이방을 구원하시러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어떤 이유로도 선교의 대행진을 증단 할 수는 없습니다. 시므온이 노래한 이방을 비추는 빛이 서쪽으로 선회하여 한국에까지 이르렀고 이제 그 빛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다시 그 빛은 아프리카로 중국으로 뻗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빛이신 예수님이 머무는 것마다 어둠의 죄가 물러가고 어둠의 영인 사탄이 물러가면서 영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고 가정이 회복되고 경제도 회복이 됩니다.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100여년 동안 한국교회를 키우고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빛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교회 나라가 소망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구라파의 다른 교회들이 침체의 늪에 빠져들면서 국력도 함께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교회가 신앙의 열정을 잃고 자유주의화하면서부터 미국의 국력이 맥을 못추기 시작했습니다.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 그러나 지금 그 미국은 마약, 폭력. 총기사고, 청소년 범죄, 실업율의 급증, 노동기피, 인종갈등, 부정직. 탈윤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오직 이방을 비추는 빛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찬양했습니다.
8살된 목수의 아들 예수를 품에 안고 시므온은 이 아기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노래했습니다.누가복음 2: l4을 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을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는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예수를 못박아 죽인 이스라엘이지만 저들은 지금 철저하게 예수를 팔아 국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가 수입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것은 집단농장에서 재배해 내는 농산물. 다이아몬드 가공, 관광입니다.
관광의 경우 그 나라는 구경거리가 없는 나라입니다. 벌거승이 언덕에. 산도 명산이 없습니다.그런데 전 세계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광합니다. 이유는 예수가 살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에 예수가 나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저들은 거지가 됐거나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먹고 삽니다.
그러나 시므온이 노래한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는 것은 신령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세익스피어를 자랑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그동안 레닌을 자랑했습니다.
박 정희 대통령은 이 순신을 높이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현층사 참배까지 시켰슘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를 이스라엘 예수에 비길 수 있습니까? 여기 시므온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나라의 영광이십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영광만이 아닙니다. 전 세계 인류의 등불이며 구원이며 영광입니다.
우리는 우리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슘니다. 주님은 이스라엘과 전 인류의'영광이십니다.
요한 것은 그 주님이 곧 나의 주님이요 구주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 에 오셨고 나에게 자유를 주셨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내 어둔 심령을 비춰주셨고 나에게 영광을 주셨습니다.
나는 주님 때문에 영광을 받 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합시다.
예수가 나에게 평안과 자유를 주셨다고. 예수는 내 어둔 심령을 밝게 해 주셨다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들려 줍시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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