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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짐을 나눠집시다 (갈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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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신앙초기에 제가 읽었던 두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벤허라는 책이고 또 하나는 인도의 성자 썬다싱의 생애입니다. 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사람이 히말라야 산을 넘어가다 추위에 쓰러진 사람을 길에서 보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내 한 몸도 추스르기 힘든데--"하며 그대로 지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바로 뒤에서 따르던 선다씽이 지체없이 그를 들쳐업고 산언덕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산 넘어 내려가다 보니 앞서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고 떠났던 이가 길모퉁이에 역시 추위에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던 이웃을 들쳐 업고 있는 자기는 아직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살아있는 스스로를 확인하면서 너무나 소중한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남을 살리는 것이 바로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 책을 통하여 저의 인생의 방향을 정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혹 '믿음의 길'은 등산에 비유합니다. 등산을 하다보면 너무나 힘겨워하며 쉬어 가는 사람, 때로는 지쳐 넘어져 있는 이웃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서 이렇게 힘들어하고 특히 믿음을 떠나 죄에 빠진 이웃들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제2차전도 여행 중에 다시 갈라디아 지방을 방문했을 때 벌써 이 교회들 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가운데 복음을 떠나 육신의 죄 가운데 빠져있는 형제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바울의 처방은 한마디로 "서로 짐을 나눠지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서로 짐을 나눠질 수 있을까요?

1.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접근하라"1절

이는 먼저 형제의 연약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주변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졌다면 우리가 제일 먼저 보일 수 있는 보편적인 반응은 무엇일까요? 정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정죄는 죄에 빠진 본인에게도, 정죄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1절에서 우리가 이런 형제들을 '온유한 심령'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온유한 심령'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마음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온유함이 나타날 때는 언제입니까?
1) 억울한 환경 속에서입니다.(시37:11)
2)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약1:21)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3) 공동체의 하모니를 위해서입니다.(엡4:1-3) 교회에서 성내는 것은 오랜 상처를 입힙니다.
  빌리 선디 목사에게 한 부인이 와서 저는 성질을 잘 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이에 선디 목사는 자매의 성냄으로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4)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입니다. (딤후2:24) 주의 종은 다투지 않고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5) 죄를 범한 자에게 입니다. (갈6:1-3)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라고 말한 것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 모세처럼 불평 군 가운데 훈련시켜 온유한자로 만드십니다.

유명한 맥아더 장군이 생도시절 군사과학을 공부하면서 '상대성의 원리'에 대한 구술시험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이론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일단 그 내용을 암기해 두었다고 합니다. 교수 휘벌거박사가 맥아더에게 "자네는 상대성의 원리가 무엇인줄 아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암기한대로 구술하자 그는 다시 맥아더에게 "자네는 그 뜻을 이해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땀을 흘리며 "솔직히, 모르겠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휘벌거교수는 빙그레 웃으며"되었네, 자네는 좋은 학생이 될 수 있네. 무지를 아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라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서 상대성 원리보다 더 소중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고 회상합니다.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남을이해하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2.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이는 자신의 경계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설령 내 이웃의 범죄가 명확한 사실로 드러나도 우리가 그의 실수를 다룰 때 "그것은 나도 범할 수 있는 실수" 라는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에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이웃들이 범하는 어떤 죄도 내가 범할 수 있는 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릇 섰다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총장을 지낸 유명한 설교가인 스윈돌 목사님의 일화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리스도인은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어느 주일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주일 오후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운전하시다가 깜빡 다른 생각을 하면서 교차로를 건너다 신호를 위반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때 이미 늦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같은 때 교인 한분이 지나다가 스윈돌 목사님이 신호위반을 하신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목사님 자신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맘으로 모른척하고 집으로 가셨는데 그날 저녁 그 교인이 전화를 해서 그 이틑날 점심때에 '만나자'고 하더랍니다. 약속을 했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답니다.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했답니다. 한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이틑날 식당에 가보니 예상대로 그 교인과 다른 교인 몇 분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윈돌 목사님은 준비한 목걸이를 차고 들어 갔는데 거기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부착물이 달려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웃었을까요? 그때 목사님은 다시 뒤로 한 바퀴 돌으셨는데 등 뒤에도 부착물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쳐라"고 씌어있더랍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우리자신의 실수의 가능성을 알고 미리 경계를 삼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웃이 실수할 때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교훈이 될 것이며, 나를 위한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 4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신을 살피는 삶을 통해 오히려 자랑할 것이 있는 유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짐을 지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짐을 질줄 아는 사람만이 남의 짐도 질줄 아는 인생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3. ' 바로 잡으라 '

사랑으로 형제의 회복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본문1절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할 때 이 단어의 뜻은 '혼자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에 빠진"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런 궁지에 빠진 형제나 자매를 우리가 회복되도록 도와야한다는 것입니다.
1절에 '바로 잡으라'는 말은 이런 회복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단어는 두 가지 용도로 쓰임
하나는 우리의 신체의 뼈가 어긋났을 때 뼈를 '바로 잡는다'는 용법입니다. 다시 우리의 정상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한 부인이 50견이 와서 팔을 쓰지 못하고 쩔쩔매는데 누가 50견을 잘 고치는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고 합니다. 이 의원이 긴 담배 대를 여인의 치마를 들어 올리더랍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 얼른 팔을 내려 치마를 붙잡았답니다. 그러더니 50견이 낫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어부가 쓰는 그물이 못쓰게 된 것을 '수리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고기 잡는 그물로서의 기능이 가능하도록 회복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회복의 사역을 할 때 우리는 또한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바울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고 본문 2절에서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할 때 율법은 이루어집니다. 사랑할 때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사랑한다면 형제의 회복을 도와 그가 다시 일어서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 짐을 나눠지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이며
성령의 사역이며 이것이 또한 교회의 사역인줄로 믿습니다.

2006년 우리교회 <탁월한 사역에 도전하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죄와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마침내 우리의 그 무거운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 주님의 그 사랑에 빚진 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도 서로의 짐을 기쁘게 나눠 져야하지 않을까요?

"나의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유병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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