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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예배하라 (레 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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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는 중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슬프게 울던지 노인 부부가 실신해서 응급실로 실려 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물었더니 장성한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이유를 물었더니 아들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근로자였는데 높은 곳에서 일하다 그만 실족해서 떨어져 갑자기 죽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로서는 자식이 죽은 것도 슬픈 일이지만 떠난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유언도 듣지 못하고 죽은 그 아들을 가슴에 묻은 부모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처럼 충격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나간 아이가 저녁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 온다면 그처럼 큰 충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침에 “여보 사랑해 !”하고 사랑의 입맞춤으로 떠난 남편이나 아내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큰 충격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갑자기 죽임을 당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나답이고 한 사람은 아비후라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아론의 두 아들로서 거룩한 제사의 직분을 맡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성막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갑자가 죽은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죽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도대체 예배를 어떻게 드렸기에 그 두 사람이 갑자기 예배를 드리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입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1절 말씀에서 보듯이 그 두 사람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내 방법대로 예배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기준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통해 하나님은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물의 종류를 정해 주셨습니다. 제단에 사용하는 불도 아무 불이나 쓰지 말고 하나님이 최초의 예배 때 하늘에서 내려주신 거룩한 불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예배는 모든 것이 어떤 형식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그 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물로 가져온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일지라도 어느 부분은 드려도 되고, 어떤 부분은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모든 예배의 핵심은 예배를 드릴 때는 내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계명대로 그 규칙과 법도에 맞춰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으로 제사를 인도하는 나답과 아비후가 예배를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드리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정한 거룩한 불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도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분향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불을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제사장은 어떤 불을 사용해야 안전한 것입니까? 레위기 16:11-13절을 보겠습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향로에 담는 불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제사장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속죄의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속죄의 제사에 사용된 그 불을 향로에 담아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서 분향단에서 그 불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 들어가기 위한 예배의 가장 큰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먼저 회개하는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죄 제사를 드린 그 불이 아니면 향로에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조건입니다. 결국,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제사장은 무조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시작은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에 있습니다.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의 총장을 지낸 스윈돌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이 어느 주일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통신호부터 철저하게 지켜야한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운전하시다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만 신호를 위반하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아차라고 했지만 그것을 깨달은 때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이미 목사님의 눈과 그 교회에서 따지기를 좋아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교인 한분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목사님 댁으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튿날 점심때에 그분께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식당에 가보니 예상대로 그 교인과 다른 교인 몇 분이 먼저 도착해서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에 들어오는 스윈돌 목사님의 목에는 커다란 부착물을 가슴에 달고 나타나셨습니다. 그 부착물에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부착물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본 교인들은 크게 웃었습니다. 교인들이 웃는 것을 본 목사님은 다시 뒤로 한 바퀴 돌아앉았는데 그 등 뒤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나를 쳐라"고 씌어있었습니다.

  우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7절 이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깨끗게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죄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드려지는 참된 예배는 죄를 회개하는 예배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죽은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처럼 거짓된 불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가인처럼 거짓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23-24절에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예배는 죄가 성령의 불로 태워지며, 보혈의 권세로 씻어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의 영적 예배의 향기를 흠향하시는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두 사람이 함께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 성소에 들어 올 때에 제사장은 오직 한명만이 들어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두 명이 동시에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성소에 그것도 다른 불을 가지고 들어 간 것이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앞과 뒤 또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예배를 지금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각자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머니가 예수 믿는다고 내가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만난 것도 아닙니다. 각자가 회개할 것이 다른 것처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할 준비된 자신만의 향로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1:1로 만나야 합니다.

  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들만이 가지고 있는 향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레위 지파 중에 고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막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신이 생겼습니다. 250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너희들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냐? 우리들도 섬기는 제사장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의 말에 순종하여 따를 필요가 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거센 저항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찬 그는 대적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너희는 제각기 향로를 들고 그 위에 향을 얹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오십 개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민16:17). 그들은 각자의 향로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향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죄악으로 썩은 내가 나는 향로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흠향하시겠습니까? 죄악의 가증한 향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겠습니까?  결국, 250개의 향로를 들고 있었던 고라와 그 대적 자들은 영원히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각자는 향로를 들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가인은 가인의 제물이 있었고, 아벨은 아벨의 제물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준비한 향로가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들 각자가 준비한 향로가 있습니다. 결코 이 성소에는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시간은 우리 각자는 자신들이 준비한 향로를 들고 이제 성소에 들어가고 있는 제사장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9:19 -22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가 되어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의 패턴을 따르면 안 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멸망의 길을 간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세상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볼 수 있듯이 회막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1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한 후에 12:2절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을 NIV 성경에는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했습니다. Pattern 이라는 말은 형식이나 틀 혹은 거푸집과 같은 세상의 방식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할 방식이 있습니다. 패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이었지만 세상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패턴에 따라 우상 숭배자들이 귀신에게 예배드릴 때처럼 술을 나누고 마신 후에 성소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아직도 옛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것은 바른 예배 자가 아닙니다.

NIV 성경을 조금 더 참조해 보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는 말을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너의 마음을 다시 새롭게 하여 그 존재의 구조나 혹은 존재의 형태(form)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취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벗하여 예배드리려고 했던 나답과 아비후는 예배 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성도가 찾아와서 목사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는 주님 앞에 충성스런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해서 고민입니다. 이렇게 믿다가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저는 지금 깊은 절망과 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저희 집에 있는 개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서 집안을 더럽히는 일도 없고, 집안에서 오줌 싸는 일도 없습니다. 이 개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내 말을 잘 듣습니다. 나는 이 개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기쁩니다. 그런데, 저기 저쪽에 아기가 있지요? 제 아들입니다. 집안을 어질러놓고, 더럽혀 놓는 데는 선수입니다. 어떤 때는 먹던 음식을 던져 버립니다. 새 옷을 입혀주면 금방 더럽힐 때도 있습니다. 참 말썽꾸러기지요. 자, 그런데, 누가 제 재산을 유산으로 상속받을까요? 귀엽기만 한 저 개입니까? 아니지요. 비록 말썽꾸러기지만 제 아들이 상속자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상속받을 자입니다. 당신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여러분은 성령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자주 실패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패턴을 이기지 못하고 자주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pattern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형태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transformed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오직 성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고, 복 받는 인생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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