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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욕과 기독교 (마 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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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긍휼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매우 잔인하고 사악했습니다. 긍휼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을 올바로 배우지 못한 신앙이며 예수님을 배척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성취나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께 무언가 자꾸 제사를 드리려 하기보다 먼저 긍휼의 정신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금식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2:1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이 날은 바리새인들의 금식일 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명시된 속죄일 외에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스승의 영향을 받아 참된 신앙이란 다분히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리새인의 규례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승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분이라고 증거 했던 예수님은 한 층 더 금욕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욕적이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와 바래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4) 예수님도 함께 음식을 드시고 계셨는데도(10), ‘왜 당신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지는 않은 것을 보면, 예수님께 상당히 예의를 갖추고 조심하는 태도를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과 실제 모습의 크나큰 차이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경건하게 살려는 많은 사람들이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수도사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오리겐(Origen, ca. 185-ca. 254)은 경건하게 살려고 범죄 하는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에 문자 그대로 순종한 인물입니다(마 5:28-30). 그러나 그는 이단자입니다. 반면에 결혼조차 포기하고 평생 수도원에서 생활한 사람들 중에 훌륭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도 수도원 출신입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기독교적인 삶과 금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오늘날도 보다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동일하게 가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금욕의 강도가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상당히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15).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신랑의 친구와 같은 기쁨을 느낀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고 했지요(요 3:29-30). 그래서 혼인집 신랑의 예화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는 귀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결혼식에 참석해서 하염없이 운다거나 파리한 얼굴로 금식하고 있다면 참 몹쓸 사람이 되겠지요. 마음껏 먹고 신랑 신부를 즐거운 마음으로 축복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금식하던 바리새인들도 결혼식에 참석하는 주간만큼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신랑을 빼앗기면 금식할 것이라고 하셨으므로, 금식 자체가 나쁘다거나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말씀해 주신 셈입니다. 사실 신앙 생활하다보면 자기 죄가 너무 애통해서 자연스럽게 금식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식을 생활화함으로서 사람이 더 경건해질 수 있다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덜 경건하다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찬성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갖가지 규례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행하면 경건하고, 그렇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신앙을 잡다한 규례들을 지키는 것으로 규정할수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하게 하신 그 자유가 손상됩니다. 금욕주의는 참 복음을 왜곡시키는 율법주의여서 사도 바울은 서신서들에서 강력하게 율법주의를 반대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도 금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신자들을 보면서,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인의 삶은 정말 재미없는 삶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기쁨의 종교입니다. 15절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날을 말합니다. 그 때는 제자들이 통곡하고 슬퍼하고 하겠지요. 그러나 삼일 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언제나 신랑과 함께 있는 신부와 같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입니다(살전 5:16-18). 기독교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늘 심각하게만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음으로 인한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기쁨과 평안과 감사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또 전심전력해서 진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규례들을 제정해서, 그 규례를 지키는 여부에 따라 신앙의 정도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계속 각종 프로그램과 규례로 사람들을 자꾸 규제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연약해서 혼자 두면 방탕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고, 규칙을 정해서 체크를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의 참석 여부나 수행여부로 신앙을 평가하는 금욕주의나 율법주의로 흘러가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 역사를 금욕주의나 율법주의로 엮을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6-17) 낡은 옷은 유연성이 없어서 신축성이 좋은 생베조각과 함께 기우면 안 됩니다. 또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낡은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가 발효될 때 가스가 팽창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통해 유대인의 낡은 종교 관습과 낡은 전통들로서 예수님께서 새로 시작하시는 복음을 수용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중심으로 12지파를 형성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와 같은 12제자를 불러 아브라함의 믿음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제사를 드리는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원한 효력을 가진 속죄를 단번에 이루시므로 그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여셨습니다. 까다로운 세부 규정들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누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되는 나라를 가져오셨습니다. 이러한 새 역사를 유대인들의 굳어진 율법적이고 금욕적인 틀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는 기존의 굳어진 생각과 경직된 마음으로서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을 도무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스스로 결단하고 어떤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은혜가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그 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함께 즐거워하며 기뻐하다보니 죄에서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삶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굳어진 종교적 전통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신앙 체계를 수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맙니다. 굳어진 형식적, 율법적, 금욕적 종교관이 깨어지지 않으면 본인이 생각할 때는 누구보다 경건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원수노릇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종교 체계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금욕주의라는 틀로 신앙을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금욕주의적인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는 것은,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그 분을 좀 더 정확하게 잘 알고 싶기에 말씀을 읽게 되고, 말씀을 읽어도 잘 깨닫지 못하거나 기도하게 됩니다. 또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절제력이 부족해서 자주 반복해서 죄에 빠지니까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고 금식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벅차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다보니 전도가 되는 것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해주다보니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금욕주의적인 요소를 분명 포함하고 있지만, 우리가 경건한 삶은 이처럼 금욕주의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경건을 추구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자유와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계속 슬퍼하고 있는 신부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많이 운다고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통곡하는 기도가 될 때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기도 속에도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신종 율법주의나 금욕주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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