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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믿음 (히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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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라는 이름 - 발굼치를 잡다, 다른 사람의 장소를 차지 하다, 약탈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형 에서의 발굼치를 잡고 나온 모습을 보고 아버지 이삭은“야곱”이라고 지어 주었다. 일반적으로 “야곱”이란 이름은 호감을 주지 못한다. 한 예로, “저 집사님은 야곱 같애”라고 말한다면. 욕은 아니지만 집요하고 근성있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야곱의 성격은 내성적이면서 고집이 있고 실용적이면서 계산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장자권에 대한 집착, 라헬과의 결혼, 라반의 집에서 가축사육,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던 사건.

말년에 아들 요셉에 의해 애굽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바로왕을 만났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창47: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어떤 분이,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소설을 써도 몇 권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야곱의 인생이야말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그는 배 속에서부터 형과 다퉜고,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권을 빼앗았고, 그 사건으로 인해 외삼촌댁으로 피신해서 20년 간 더부살이 했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형 에서를 경계하는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말년에는 가장 아끼던 아들 요셉을 잃고 수심의 세월을 보냈었다. 자신의 말대로 험악한 세월을 보낸 인생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을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영국의 성경학자 아더 핑크라는 분은 히11장에 소개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했는데 그 중에 야곱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믿음의 영웅이란 칭송을 받을 수 있었는가?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오늘 본문은 두 가지로 요약해서 야곱의 믿음을 증거하고 있다.
1)죽을 때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한 것.
2)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한 것.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사람들, 에녹, 노아, 아브라함 같으면 쉽게 “맞어! 그 분들은 정말 믿음의 영웅들이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이나 야곱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해야 만 수긍이 되는 분들이다. 더우기 야곱은 분은 선입견이 좋지 않은 분이다. 그리고 자손들을 축복하고 경배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이기에 의문을 품게 된다. 어떤 면에서 야곱을 믿음의 영웅 반열에 세워 놓았는가? 우리는 또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만 한다.


1.두 손자에게 축복한 것
창49장을 보면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12 아들들을 축복한 것을 믿음의 행동이라 하지 않고 있다. “요셉의 각 아들”이라고 한 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손자 둘을 축복한 것이 그를 믿음의 영웅으로 소개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만약 그렇게 중요하다면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을 축복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서자 출신인 이스마엘도 할 수 있고, 야곱의 형인 에서도 자기 자녀들에게 축복할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이 오늘 본문에서 손자들에게 축복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서 이뤄진 것이다.

이 축복의 멧세지가 처음 임한 것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였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축복된 삶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축복의 자격을 박탈 당하고 말았다. 그 다음 인류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인과 성적타락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다.

창3-11장까지는 인류 타락과 배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노아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셨고 의인 노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함을 아시고 그들의 말을 다르게 하시고 지면으로 흩어지게 하셨다. 그 후에 성경은 인류가 하나님을 섬겼다는 기록을 남지 않고 있다. 단지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어더라는 이야기만 반복될 뿐이다. 소망이 없는 삶이 반복되고 있을 때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 오셨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창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정직하고 믿음이 좋고,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축복된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 서자인 이스마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창26:2-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또한 형을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가던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같은 말씀으로 축복해 주셨다.
창28:13-14,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여기서도 놀라운 사실은 이 축복의 말씀이 장자인 에서에게 임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 야곱에 이르기까지 이 축복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나 인격적으로 보나 야곱보다는 에서가 축복의 말씀을 받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택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이삭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육적 장자인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셨다. 이 축복의 통로는 야곱을 통해서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흘러 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었기에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제 야곱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 자신의 죽을 날이 가까옴을 깨달았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손들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요셉이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 두 아들들을 데리고 아버지에게로 왔다.
창48:8-9,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요셉이 그 아비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비가 가로되 그들을 이끌어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요셉이 큰아들 므낫세를 아버지의 오른손 앞에, 둘째 에브라임을 왼손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손을 어긋맞게 머리에 얹었다. 장자의 머리에는 왼손을 차자의 머리에는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 두 손자를 위해서 기도했다.
창48:15-16,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요셉이 마음이 언짢아서 아버지의 손을 들어 바꾸면서 아버지 이 아이가 장자인데 므낫세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으소서. 요셉은 아버지가 노환으로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하신 줄로 알았다. 그때 즉시 야곱이 이렇게 말했다.
창48:19-20,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야곱은 오래 전에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육신적인 생각으로 형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던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야곱의 장자인 르우벤이 축복의 말씀을 받았어야만 했고, 르우벤이 자격이 없었다면 요셉의 두 아들 중 장자인 므낫세에게 축복해야 함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 축복의 통로는 자신의 몸의 장자인 르우벤에도 열려 있지 않았고,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에게도 열려 있지 않았다. 에브라임에게로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야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창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여기서 야곱은 의도적으로 둘째 에브라임을 그의 형 므낫세보다 먼저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둘째 에브라임을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어긋맞겨 축복했던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영웅으로 추앙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아들이지만 요셉은 형제들 중에 실세요 애굽의 총리였다.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고 관철시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 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한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이와 같은 태도를 보면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신앙의 성패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준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설교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인간으로서 또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 꿇기 보다는 자기의 이익과 성공에 집착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 업적을 쌓는 일에 관심이 더 많음을 보게 된다. 어떤 커다란 업적이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예수님 당시 40년에 걸쳐 화려한 성전을 건축했던 헤롯왕이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야곱이 한 일은 인간적 입장에서 보면 별 볼 일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그리고 그대로 준행한 사람이다. 그것이 믿음의 영웅으로서 천거될 만한 근거가 됐다는 것이다.

자신의 목적과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서 자신의 뜻을 이룬 것도 잘 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열심을 냈다면 그 수고는 헛된 것이다. 우리 각자 개인, 나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보자.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응답하는 것이다.


2.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경배함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창47:31,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 그의 임종때 마지막 기운을 다하여 지팡이를 의지하여 경배한 것이다. 그의 나이 147세,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서 그의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을 만큼 노쇠하였다. 그러나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지팡이를 의지하고 침상 머리에 앉았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젊은 시절,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꽤를 믿고 약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얻어 내고야 마는 약탈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임종은 너무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노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하늘을 향하여 얼굴을 들었다. 시작은 안좋았지만 끝을 아름답게 장식한 인물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사는 일도 중요하지만 믿음으로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의 자녀들 앞에서 이런 말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한다. 야곱은 나이가 들어갈 수록 더욱 믿음이 강화되어 갔다. 죽는 날까지 그의 믿음을 지켰다. 그리고 자녀들을 축복하고 거룩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 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나이를 무기 삼아 영적으로 점점 퇴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육신은 편할지 모르나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웠던 조지 뮬러목사님은 70세에 선교 운동을 시작하여 17년 동안 세계를 8회 순회 전도하셨다. 젊은 시절 몸이 약해 군에도 못갔고, 사람들은 일찍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노년에도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일했다. “나는 매일 7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힘있게 일한다.”
3가지 비결
1)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범죄한 일이 없이 맑은 양심으로 살기를 힘쓰는 것.
2)성경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에너지원으로 공급받는 것.
3)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늘 기쁨을 느낀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 기쁨이 모든 염려와 걱정에서 구원해 주었다고 한다.

장신대 명예교수인 주선애권사님, 15년 전에 은퇴하여 현재는 80세가 넘으셨다.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 탈북자 교육과 휴게소, 은퇴교역자 안식관 건축등. 그분은 어느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은퇴가 어딨어요. 주님 앞에 가는 날이 은퇴지요.”

박윤선목사, “신자가 늙도록 경건에 힘쓰면 그 육체에도 유익이 있으며 그의 영력이 쇠하지 않는다. 사람이 늙었다고 무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젊을 때에 할 수 없던 좋은 일을 늙어서 하게 되기도 한다.”

크랜머라는 순교자는 60세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순교할 만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받았다고 한다. 오래된 포도주일 수록 값이 나가는 것처럼 성도의 신앙도 연륜이 늘어갈 수록, 나이가 먹어갈 수록 더욱 성숙하고 아름다워져야 한다.
내일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 오늘 태만한 사람이 내일 갑자기 신앙이 좋아지지 않는다. 오늘 믿음으로 살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죽음이 임박해서 거룩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지 못한다. 나의 임종이 야곱과 같이 거룩하고 장엄한 모습이 되기를 원한다면 오늘 나의 삶에, 나의 신앙 생활에 충실하기 바란다.

나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다. 야곱과 같이 멋있는 생의 종말을 맞는 것이다. 나는 나를 안다. 탁월한 지능이나,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지는 않는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 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나의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자족하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이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침상에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노구를 일으켜 세워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녀들을 축복하고 생을 마친 야곱처럼 그렇게 나의 삶을 마감하고 싶다. 그러나 믿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찬송가 214장의 가사 내용처럼 날마다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는 것이다.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히브리서 11장에는 여백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여백에 나와 여러분의 이름도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각자가 생을 마감할 때 자녀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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