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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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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니,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자 동역자였던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최초의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신명기 33장 1절에 보면, 모세를 일컬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삼상 9:6).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 선지자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없는 지극히 고귀한 호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고귀한 호칭으로 디모데를 불렀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들처럼 아끼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인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어서 이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가 디모데에게 사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하나 같이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특히, 이 시간 우리가 상고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존귀한 이름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존귀한 호칭을 디모데 뿐 아니라 오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셨습니다. 다 같이 곁에 계신 분들에게 “성도님은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라고 인사하십시다.

우리가 정결하고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려면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하고 복된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지, 이 자각이 없으면 무능하고 세속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할 바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 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이 반드시 피할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6장 3절로 5절에는 “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교훈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는 없는데, 다른 교훈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므로 여기에다 인간의 공로를 보태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가려먹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신자들이 죽어서 곧장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누가 죽으면 남은 가족이나 친지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 미사도 드려주고 기도도 하고 자선도 베풉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다른 교훈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깎아 내리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율법주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 다음, 종교다원주의의 다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왜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느냐? 그것은 너무 독선적이지 않느냐?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 무엇을 믿든지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꼭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성당에 가서 설법하고, 신부가 절에 가서 강론도 하고, 수녀들과 비구니들이 함께 모여 합창단을 만들고 성가도 부르고 찬불가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다 본질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주장은 매우 융통성이 있고 편협 되지 않고 아량이 있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들이 고안해낸 방법으로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였고,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는 절대로 가볍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가 달려 있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과 9절에서 “8)…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선거철이 되자 어느 국회의원 후보자가 자기 가족을 그 지역의 여러 교회에 나누어서 등록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 가운데는 무속적인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오로지 이 세상에서 복 받아 잘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어찌하든지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헌신 봉사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주님 앞에 설 때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사람이 피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자가 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일해서 부하게 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6장 9절로 10절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인생의 행복과 목적을 물질적인 부요에 두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돈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맙니다.

오늘날 사탄은 돈을 미끼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족할 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고, 자족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이 힘써 좇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의를 좇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의를 좇으라 하신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과 헤어져서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당시 소돔은 매우 번영한 도시였으므로 롯과 그의 가족은 소돔에서 문화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롯은 소돔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날마다 마음에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소돔을 떠나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의를 좇는데 적극성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과 유황에 의해 멸망 직전에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겨우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불타는 소돔 성을 뒤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의를 좇지 아니할 때 롯과 같이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을 따르지 말고 항상 구별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건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특히, 예배 생활에 힘쓰는 것은 경건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생활에 힘 쓸 때 경건한 삶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을 가리켜 믿음을 좇는다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은행을 믿지 못하고, 국민 상호간에 믿지 못하는 믿음 부재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수 있다는 평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진실한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불순물이 섞인 오염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가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0절로 11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왜 우리 눈에 형제의 허물이 보이는 것일까요? 내 마음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믿음의 형제간에 서로 먼저 사랑을 베푸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인내란 당면한 어려움을 마지못해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가 훈련을 받듯이 자발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밥을 짓는데도 인내가 있어야지 조급해서 자주 솥뚜껑을 열면 밥이 설익고 맙니다. 역경을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을 베풀고, 봉사를 하는 데도 인내가 있어야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온유란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허물을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하셨으며, 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하게 행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운동선수에 비유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한 평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이 싸움은 장거리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경기에서 우승하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경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한 때 열심을 냈더라도 끝까지 그 열심을 지속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변함없는 자세로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원수 마귀의 시험에 지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수는 언제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서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절제하고 힘든 훈련을 이겨내는 선수만이 우승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로 4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란 실제로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전쟁에 나간 군사가 죽기를 겁내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서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할 때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시합에서 이긴 선수에게 상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면류관은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녹슬고 빛이 바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는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에게서 받게 될 것입니다.

네 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딤전 6:14-15)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주의 강림은 한갓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소 묵시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종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말세의 징조가 있으나 특별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한 자들이 많이 나와서 기독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재림하실 날이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전하다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지중해의 무인고도인 밧모 섬에 유배되었는데, 어느 주일날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세상 끝 날에 될 일들을 보여주신 후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는지 정확한 일시를 알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 일시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께서도 모르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매우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지 벌써 이천년이 되어 갑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 인류가 처한 실상이 성경에 예언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같이 현대인들은 육신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영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실정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 사람들의 실상을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 언급된 19가지의 악덕은 현대인들에게는 조금도 낯설지 않고 보편적인 기질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은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이 세상과 그들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자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 못에 던짐 받게 됩니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가까운 법입니다. 지금 죄악의 밤이 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곧 성도들과 교회의 최종적인 승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 그날에는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고, 살아있던 성도들 역시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그런즉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다른 교훈과 불경건과 돈에 대한 애착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시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슬기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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