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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여호와 이레의 부활신앙 고백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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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 아브라함 이후의 모든 성도들의 삶은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삶이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났던 죄인 되었던 우리의 과거를 해결해 주신 사건입니다. 또한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만나 의인으로서 영생을 누릴 우리의 미래를 약속해 주신 사건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미래도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악이 함께 죽임 당하는 죽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부활을 약속해 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6:3-4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죄인 된 몸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납니다. 세례식은 그것을 알고 믿는 믿음의 공개적인 고백 사건입니다.

바울은 롬 6:5에서 세례 받은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라고 자신 있게 선언합니다. 롬 6:8에서도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라고 자신 있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롬 6:11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강하게 권고하십니다. 부활신앙 고백의 권고입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의 고백은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신실한 믿음의 삶을 지탱해 왔던 신앙고백의 중심입니다. 신약에서 바울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도들의 부활신앙의 고백을 만납니다. 구약에서도 그러한 부활신앙의 고백을 만납니다. 구약에서 우리들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유명한 부활신앙의 고백은 “여호와이레”라는 아브라함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을 아름답게 걸어갈 수 있었던 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부활신앙을 가장 명확하게 고백한 고백 장소의 이름입니다.

창 22:14에서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라는 말씀은 창 22:1-19에 나오는 모리아 땅에서의 사건의 결말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 끝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을 통하여 드러나는 결론 부분입니다. 창 22:14-19는 창 22:1-19 전체 중에서 여덟째 장면으로서, 부활신앙의 시험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의 은혜를 주신 부분입니다. 그리고 창 22:14는 그중에서 첫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 가지 은혜 중에서 첫째 은혜는, 아브라함 개인이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부르며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 은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자신을 향한 맹세로써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은혜입니다. 셋째는, 삶의 터전에 있어서 변화된 현장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맞이하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이레”의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으며, 삶의 터전에서 그 은혜를 누리는 자격이 됩니다.

오늘날 “여호와이레”라는 단어는 많은 성도들이 즐겨 사용하는 하나님의 별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자기를 위해 미리 준비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이레”는 그러한 별칭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창 22:14은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와이레”라고 부른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셨던 모리아 땅의 한 산의 “그곳”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을 “여호와이레”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삭을 바쳤다가, 부활한 이삭을 돌려받은 그 장소를 가리켜 “여호와이레”라고 부르며, 입으로 그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각종 전승에 의하면 그 장소가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장소라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롭게 발견되고 연구되는 각종 자료들은 그 고백의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부활신앙으로 고백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여호와이레의 부활신앙의 고백이 후대에 전해져 왔다.

“여호와이레”라는 지명은 본래 고유명사 “여호와”와 동사 “라아(보다)”에 미완료 접두어가 붙은 “이레”의 합성어로서 고유명사 “여호와이레”로 된 단어입니다. “여호와이레”를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로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 단어는 창 22:8에서 이와 동일한 단어인 “라아”를 “준비하다”로 번역한 용법과 같은 용법입니다. “여호와이레”는 단어적인 뜻뿐만 아니라 본문 상에 나타나는 성경 저자의 해설인, 본문 자체의 설명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창 22:14의 하반절에서 저자는 그 의미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라고 해설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 단어를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날 그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그곳을 바라보며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부활신앙의 고백을 하며 그곳에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장소가 부활신앙의 체험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 담겨진 단어이며, 신앙고백이 담겨진 고백적 용어이며, 고백 장소입니다. 창 22:14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불렀다”라는 단어는 “카라”로서 이 경우는 어떤 이름으로 명명을 할 때 부르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명명된 대상의 특성과 그 대상에 대한 명명자의 주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장소에 아브라함이 주권적으로 이름을 붙이며 부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이레”는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적 주권이 담긴 명명입니다. 그 장소가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적 주권이 담겨진 곳입니다. “여호와이레”는 하나님의 별칭도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용어도 아니며 우리의 희망적 용어 또한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체험 신앙의 고백적 장소의 명칭입니다. 그리고 그 명칭이 지칭하는 장소의 의미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뜻과는 거리가 있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헌신할 수 있었던 부활신앙의 고백의 중심과도 같습니다.

대개 “여호와이레”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수양을 준비해 두셨다가 공급해 주셨듯이 믿는 우리를 위해 물질, 환경, 사람 등 모든 것들을 준비해 두셨다가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물질적 개념의 준비를 뜻하는 용어로 알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알려주는 사실은 그것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본문에 대한 번역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까지”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 단어가 개역성경의 표현대로 “오늘까지”라고 한다면 성경 저자의 설명은 후대 사람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으로 “여호와이레”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적 의미보다는 후대 사람들의 믿음이 담긴 용어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보면 “하욤”으로서 “날(욤)”에 정관사 “하”가 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영어 성경들에서는 모두 “to this day”로 번역하였고, 우리말에서는 “오늘까지”라는 부사로 번역한 것입니다.

70인 역 성경에서는 “세메론(σήμερον)”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날(ἡμέρα)”에 “오늘” 또는 “지금”이라는 뜻의 접두어 “σ”을 붙여 만든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의 시점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시점을 말하는지, 아니면 성경의 저자가 살던 시점을 말하는지 구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구분에 따라 “여호와이레”라는 표현이 후반절과 같은 뜻으로 아브라함이 이름을 붙였음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그 뜻을 후대의 사람들이 후반절의 설명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해답은 “이르기를”이라는 단어의 형태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말하다, 이야기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동사 “아마르”의 닢알형이며,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닢알형은 단순 수동형으로서 “말하여져지다”는 뜻입니다. 3인칭의 어떤 대상이 이 동사 뒤의 해설처럼 “말하여져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3인칭의 대상이 창세기 저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이라면, 그 사람들이 말하여져진다는 것이 되어 전혀 뜻이 달라집니다. 아브라함이 말하여져진다는 뜻도 본문의 의미와 거리가 있습니다.

성경 저자나 아브라함 자신이 후반절의 설명처럼 말하여질 리가 없습니다. 또한 수동형이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처럼 단순 능동형으로 “말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계사 뒤의 후반절 전체를 뜻하는 “그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준비시켜 주셨던 “수양”이 준비되어져질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그것”이 아브라함에 의해 말하여져 짐과 같다는 단어의 배열입니다. 원문은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의 고백이 대를 이어 전해져 온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창 22:14의 후반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는) 그 날(이삭을 드린 날)에 (아브라함에 의해서) ‘그것이 여호와의 산 안에서 준비되어져질 것이다’라고 말하여져 짐과 같다.”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부른 것은, 후대의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고 부활신앙을 체험한 바로 그 아브라함이 “수양이 여호와의 산 안에서 준비되어져질 것이다”라고 외치며, 이름을 붙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 저자가 후반절에서 해설로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욤(오늘까지)”도 성경 저자의 시대를 나타내는 “오늘까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날”을 뜻하는 “지금” 또는 “오늘”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친 그날”에 “그곳”을 바라보며, 부활을 체험케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장소에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 수양이 여호와의 산 안에서 준비되어져질 것이다.”라는 고백적 표현으로서 “여호와이레”라고 이름을 붙여 부른 것입니다. “여호와이레”는 의미심장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입니다.

“여호와이레”의 부활신앙의 고백은 아브라함의 자의적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폭발적인 표현입니다. 자기의 독자 이삭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이삭 대신 죽어 줄 한 수양을 준비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인하여 이삭이 다시 살아서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된 것에 대한 감격의 표현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와 같이 준비하여 주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표현이 담겨진 고백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이레”는 아브라함의 모든 삶 가운데 항상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수양이 놓여질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의 표현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여호와이레”로 준비하실 그 수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삭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한 한 수양처럼 아브라함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을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되어져질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후반절의 “한 수양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어져질 것이다.”의 “이레(준비되어져질 것이다)”는 미완료 수동태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미완료”는 “미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나타내는 현재나 현재진행, 과거진행, 미래진행 등을 다 포함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이레”를 구속사적으로 보는 학자들처럼 “장차 이루어질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본문의 의미에서 보면 일반적 진리를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인물들에게 항상 “현재”로 적용되는 형태의 표현입니다. 즉, “이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레”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준비되어져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여호와이레”의 선언과 명명은 자신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되어져서 역사하셨음에 대해 부활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며, 대대로 모든 사람에게도 준비되어질 분이심을 알리는 명명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 “여호와이레”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것을 깨닫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그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지명을 통해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늘 그것을 기억하며, 삶의 중심에 놓기 위해서 “여호와이레”라고 명명을 해 놓았습니다. 이제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름을 붙인 모리아산 즉, 지금의 갈보리 산의 십자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곳, 그 장소, 그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곳에 “여호와이레”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인 그 갈보리 산에 붙인 이름을 통해서 그곳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감격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이레”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여호와이레”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죽음으로 값을 주고 속량해 주신 우리 자신의 몸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속량해 주신 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몸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오직 대속의 그리스도를 준비해 주신 하나님 안에서의 중요성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에 합격된 자들에게 이러한 감격을 주십니다. “여호와이레”라는 부활신앙의 고백을 하며 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귀중한 존재로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소유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모든 소유권을 아낌없이 넘겨 드리며 사는 자들로 부활신앙을 경험하며 살도록 늘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해 두십니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때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며, 고백하는 기쁨을 누리며, 그 은혜를 찬양하며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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