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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행 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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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라는 영화에 보면 유명한 배우 안소니 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개인의 생을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한 평범한 촌부로 등장합니다.
  그는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유태인으로 오해를 받아 독일군에게 잡혀 가서 강제노동을 하기도 하고, 독일인이 아니면서도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 병사의 군복을 입고 게르만 민족의 전형적인 얼굴을 선전하는 포스터의 모델로 발탁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독일군으로 취급되어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까지 회부되는 것입니다.

안소니 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피고석에 앉아 있는 중, 먼저 검사 장교는 그가 독일군의 선전모델로서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는지를 신랄하고도 장황하게 고발합니다.
  이윽고 안소니 퀸의 변호를 맡은 장교의 순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의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단 한 마디, "당신은 지금 왜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타고난 시골 사람의 얼굴을 한 안소니 퀸은 그 질문을 받자 엉덩이를 들썩거려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선상님들, 저는 도시 뭐가 뭔지 통..."이라고 말꼬리를 흐리면서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변호사를 쳐다봅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배심원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피고인의 저 대답이야말로 자신의 처지를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무고한 사람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이제 집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난생 처음으로 재판소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온갖 높고 똑똑하고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는 것은, 설혹 무력하고 무식한 농부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말 얼떨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그런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의 촌사람 둘이 유대사회의 최고위층의 사람들이 위엄스럽게 높은 자리를 틀고 앉아 있는 공회 앞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너희가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라고 추궁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웬만한 사람 같으면 가슴이 절로 졸아들고 숨 한번 제대로 크게 쉬지도 못할 것만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뜻밖에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도들은 전혀 주눅 들거나 떨지 않고 오히려 그 공회를 향하여 지극히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 두 촌사람들이 그 세련되고 잘난 예루살렘의 최상류 사회 인사들을 모조리 완전무색하게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신자로 하여금 늘 사람 앞에서 당당하고 세상을 향하여 승리하게 만드는 두 가지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의 천한 것을 택하여 귀한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름입니다.

  본문 1절로 7절에 기록하기를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쳐준 후에 모여든 군중 앞에서 설교를 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신경의 촉각을 세우면서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사회의 상류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부유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심히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더욱이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하는 것"을 특히 싫어했습니다.
  자기네들만이 유대인들의 유일한 정신적, 신앙적 지주인양 행세해 왔는데 만약 백성들이 '다른 도'를 따라가게 되면,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자기네의 부유한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두 사도들을 당장 체포하여 이튿날 재판받을 때까지 구류해 두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모인 공회,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정치적 및 종교적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는 그야말로 예루살렘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은 다 모인 자리나 다름없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그 모임을 주도했는데,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고 안나스는 전임자였지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자는 나중에 가야바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알렉산더"는 어떤 사람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문중"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인 사람들이 다 참석했습니다.
  한 마디로 유대의 최고상류계의 인사들이 다 모인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앞에 세워 놓고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과연 사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8절로 12절 말씀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위세 등등한 산헤드린 공회에서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거침없는 대답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은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말씀,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는 바로 그 말씀이 정확히 실현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했던 사도 베드로의 대답의 요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 앉은뱅이를 "건강하게" 고쳐주었으며 오직 그 이름만이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 취급을 받았다고 사도 베드로는 지적했습니다.
  집을 건축하는 사람들이 쓸모가 있다고 판단되는 돌만 골라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냥 도로 땅에 버리듯이,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귀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로마 군병들의 손에 죽도록 만들었던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 즉 집을 짓는 데에 사용되는 돌들 중에서도 또한 가장 귀한 돌이 되셨다고 베드로는 증거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존귀함을 발견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도무지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배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흔한 길거리의 돌멩이와 다름없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기에서도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놓여야 할 중요한 자리에 재질이 약하고 모양이 틀어진 다른 돌을 놓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을 구원하는 이 중차대한 사역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대신할 만한 대용품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증했던 것입니다.

  실로 '세상의 천한 것들을 택하사 귀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복음 역사가 확연히 나타난 장면이 아니었겠습니까?
  유대사회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 제일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 바로 이런 사람들이 시골 한구석의 천한 어부 출신인 베드로 앞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 수 크게 지도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 '이름' 하나만 알아도 크게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주변의 조폭이나 깡패 두목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다가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을 때에도 "야, 늬네 아무개 형님 잘 계시냐?"라고 한 마디만 하면 "아이구,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런 뒷골목 세계의 사람들보다는 판검사와 같은 사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유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신자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부활의 주님,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이 예수님,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이 유일한 구세주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백그라운드가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직접 관계는 없어도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곳 조폭 두목의 이름을 알 수도 있을 것이고, 판검사 이름 역시 사무실에 붙은 명패나 신문지상을 통해서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름만 아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이름을 아는 것이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 본인 사이에 구체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가 우연히 그 조폭 두목을 도와주는 은인이 되었다든지 판검사와 최소한 어떤 연줄로 닿아 있어야 그 이름이 자기 인생에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유력한 관계는 바로 핏줄로 아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 아빠가 그 두목이고 자기 남편이 그 판검사일 때가 그 이름이 가장 힘이 있게 됩니다.
  예수 이름을 아는 것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그냥 입으로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과 '피로 통하는 관계'가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유일한 구세주'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으로 믿고 신앙고백함으로써, 그 보혈이 자기 몸속에 흐르는 신자가 되어야만 그 예수 이름을 아는 것이 진짜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그야말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니 세상의 부자들 앞에서 기가 죽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음으로써 그분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가 된 신자는 세상의 상류사회 사람들 앞이라 해도 자기 신앙에 대하여 결코 주눅 들지 않습니다.
  이런 요긴한 머릿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를 자기 인생 기반으로 두고 사는 신자는 세상의 어떤 박사 앞에서도 그 이름 외치는 전도가 결코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히 여김 받던 자들을 택하여 오히려 세상에서 스스로 귀하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신의 진실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간직함으로써 세상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늘 담대하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권세'는 세상의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폐하시는 권세입니다.

  13절 이하 18절 말씀에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가 그 재판소에서 "기탄없이," 지극히 당당하고 유창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갈릴리 시골 출신의 무식한 어부들이 감히 산헤드린 공회에서 오히려 자기네들에게 교훈조로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예상외의 펀치를 한 방 맞고도 어떻게 대꾸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지금 앉은뱅이를 고쳐 놓고 그것이 바로 '예수 이름' 때문이라고 기탄없이 외치는데 그에 대한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까지 자기네들 눈앞에 있으니 도무지 "힐난할 말," 무슨 트집거리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사도들을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네들끼리 일종의 밀실회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난관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라고 완전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무작정 체포해 오고 재판을 벌였는데, 오히려 그들 앞에 제시된 증거와 그 변론된 사실은 자기네들 말마따나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실로 명백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과 궁리 끝에 그들은 겨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곧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것이었습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의 권한을 최대로 사용하여 그들을 협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로마제국이 유대사회에 허용해 준 자치권을 행사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대로 체포하고 심문할 뿐 아니라 사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형벌이라도 마음대로 줄 수 있었습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는 적어도 유대사회에 있어서는 신분적으로 최상류 사회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 권한의 공포감을 십분 활용하여 사도들의 입을 막아 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도 역시 또 한 번의 뜻밖의 반격에 의하여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게 됩니다.
  19절로 22절 말씀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세나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마치 자기네들이 모든 사람들 위에 최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부활을 했든지 말든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런 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기네들의 이익과 사상에 거치는 것이기만 하면 무조건 마음대로 처벌하고 금지시킬 수 있다고 교만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그처럼 인간적 권력을 마음껏 누리던 중에 바로 자기네들 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잊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가 떨어지지 마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지 아닌지 너희들 스스로 한번 판단해 보아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즉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를 두려워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진짜 높으신, 진짜 권세 잡으신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힘 있는 자들보다도, 그 어떤 권위 있는 기관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하며 받들어 복종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리 유대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을 자랑하더라도 그것과는 비교의 대상도 못될 진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던 까닭에 그 사도들은 그런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겁내거나 머리를 수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네들이 "보고 들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행하신 일들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에 순종하는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열두 명만을 뽑아서 삼년 동안이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게 해 주시고 귀를 통하여 듣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자로서는 도무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사신 하나님의 권위에 감히 불복한다는 것은 지금 자기네들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세상 권세가 주는 두려움과는 도무지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또 한 번 창피스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네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발언을 그 공회석상에서 들으면서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들을 그저 다시 한 번 "위협하고" 즉 그저 경고 사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실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역사가 여기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본인은 약해도 그 사람이 어떤 강력한 것을 소유하거나 그것과 줄이 닿아 있으면 그 힘을 고스란히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빼빼마른 사람 혼자 있다 해도 그 손에 권총이 들려 있으면 건장한 사람 여럿이라도 함부로 덤빌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인 줄 알았는데 품속에 있던 마패를 꺼내들면 모든 관리들이 그 앞에 벌벌 떨면서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민간인은 권총을 소지할 수 없지만, 경찰은 치안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그것을 차고 다님으로써 범죄자들을 제압합니다.
  청와대를 사칭함으로써 사람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자들은 다 쇠고랑을 찰 수밖에 없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임명을 받은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청와대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수행을 위한 권한 역시 위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명해 주는 직위와 부여해 주는 사명을 통하여 활용될 때, 정당하면서도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극히 높은 권위와 무한한 능력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를 위한 직분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자의 삶 속에서 크게 역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을 아깝게 낭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받은 사명에 충성하는 일에 쓰지 않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달란트와 더 큰 고을의 권세'를 허비하실 아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용기와 힘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를 높이 받들고 그 사명을 순종함으로써 절로 얻게 됩니다.
  그런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권세라는 것은 제아무리 높아 보이고 제아무리 강해 보여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는 신자는 아무리 불신 사장이 핍박을 해도 주일성수에 조금도 굴하지 않습니다.
  천주교가 온 세상을 장악하는 교권을 휘두르면서 개혁주의 기독교를 포위 공격해 오고 공산독재자들이 총칼로 위협하면서 참된 교회를 무너뜨리려 할 때, 그것을 두려움 없이 대항하고 승리할 수 있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서 벌벌 떨 줄 아는 교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장 강한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가장 약한 것 앞에서조차 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완전히 무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절대주권을 경외하고 의지함으로써 사단의 온갖 공갈협박과 박해 앞에서도 끝까지 충성하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선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최고로 부하고 귀한 것들, 세상의 최고로 높고 강한 것들과 정면으로 맞선 첫 번째 공식대결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한 죄수의 이름이 세상의 가장 세련된 것을 상대로 서게 된 자리였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 두 사람이 변호사 한 명 없는 무력한 피고로 서 있는 반면에, 당시 유대사회의 최고 부자와 최고 학벌이, 최고 권력과 최고 상류사회가 판사, 배심원, 검사 자리를 다 차지하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도무지 게임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그 촌사람들이 그 제일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초전부터 완전히 압도해 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의 가장 귀하다는 것을 공이 울릴 직후부터 무색케 만들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위는 세상의 가장 강한 것을 1회전이 끝나기도 전에 KO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디 그 일회전뿐이겠습니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싸움은 항상 일방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의도 증권가에 아무리 많은 돈들이 굴러다녀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귀한 이름 가진 성도의 부요함 앞에서는 결코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대법원의 권위가 아무리 신성하고 높게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두려워하는 성도의 신앙의 진실과 생활의 충성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세상의 가장 귀하고 높은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패했고 사도들 앞에서 연이어 창피를 당했으며 오늘날의 기독신자들 앞에서도 여전히 무색하고 무력한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꿀리지 아니합니다.
  '예수 이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할 줄 아는 신자는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복음을 믿고 전하고 있는지 질문 받을 때마다 이처럼 '기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멋진 복음의 전도자들, 하나님의 주권에 크게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충성된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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