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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부활이 준 여섯 가지 선물 (고전 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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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20세기 초 미국의 유명한 마술사가 해리 후디니의 주특기는 어떤 자물쇠와 밧줄로 자신을 결박해도 금방 풀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넣고 바깥에서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도 얼마 후면 군인들을 비웃고 빠져나왔습니다. 또 심지어는 관속에 넣고 못을 다 박아놓아도 그 관을 열고 나와서 어디론가 도피를 해버렸습니다. 그는 도피의 전문가였습니다. 사람들은 후디니를 가리켜서 뱀장어 같은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런 그가 1926년 10월에 죽음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임종 직전에 후디니는 그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죽음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빠져나올 것이오. 내가 빠져나오면 반드시 당신을 찾을 것이오. 내가 죽은 지 1주년 되는 날에 당신에게 연락하리다.” 그러나 1주년이 되는 날에 연락하겠다고 이야기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 소식이 없습니다. 그 사이에 그의 아내도 죽었습니다. 두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아마도  천국에서 재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신성을 가지신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처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배고프기도 하시고, 슬프기도 하시고, 기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육신의 사망의 고통을 맛보신 것은 많은 가현설(Docetism -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은 척 했다고 주장,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고통을 당하는 척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실제로 육신의 사망과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죽으셔서 삼일 동안 무덤에 갇혀 계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사망의 족쇄를 풀고 다시 살아 나오신 것입니다. 해리 후디니는 이루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사망을 풀고 다시 살아나서 사망 권세를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나눌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나셔서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3일 이상 잡아둘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도 무덤에 계시고 살아나오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여섯 가지 부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증언도 거짓 증언이 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더욱 더 불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또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저도 정신 나간 사람이요, 여러분도 정신 나간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환자가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 환자를 건져서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건짐 받은 환자가 그 다음날 방에서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정신병원에서는 자살한 환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그를 물속에서 건져준 환자를 표창하기로 했습니다. 원장이 그 사람을 불러서 말하였습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동료를 구해준 것을 보니 당신은 이제 병이 다 나은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이제 퇴원해도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신이 구해준 그 사람은 오늘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환자가 “원장님. 그 환자는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물에서 건져내보니까 옷이 너무 젖어서 좀 말리려고 천장에 걸어놓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던 사도들은 구해준 정신병 환자요, 또 그 증거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건짐 받은 정신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섯 가지의 부정이 모두 긍정으로 바뀌어 전세가 역전이 된 것입니다.

1.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선물은 우리는 죄 사함을 확증 받게 된 것입니다. 17절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죄사함을 확증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지옥에 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부터 영원히 면제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죄에 대해서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다가 타락하면 지옥에 간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이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타락하는 일이 있을까요? 그런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놔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다가 타락하면 그를 징계하셔서 다시 돌이키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다가 영원히 최종적으로 타락시키시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그래도 믿다가 타락하는 사람들이 있던데요? 믿다가 불교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던데요?”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거듭나고 믿는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았고, 심판에서 영원히 면제될 것이며, 지옥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지옥 가려고 노력하면 얻어터지는 일 밖에는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갈 백성처럼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갚아주기 위함이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이 갚아진 것을 하나님께서 인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호랑이굴에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호랑이를 때려잡고 3일 만에 호랑이 가죽을 걸쳐 메고 걸어서 나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사람이 3일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도 없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저 호랑이의 도시락 노릇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3일 만에 호랑이 가죽을 걸쳐 메고 걸어 나온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가 너희 죄 값을 갚기 위해서 죽는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3일 만에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준하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구주를 얻게 되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15:14)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은 확고한 근거를 가진 믿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돌아가신 분이 아닙니다. 상상 속의 존재도 아니요, 철학적인 존재도 아니요, 살아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절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못 믿을 존재요, 또 다른 사람도 쉽게 못 믿을 존재라는 것을 점점 배워나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자녀들에게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솔로몬은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전 7:38)고 말하였습니다. 일천 남자 중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을 하나 얻었는데 일천 여자 중에서는 하나도 못 얻었다고 했습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 7:29)고도 했습니다. 사람은 꾀가 많습니다. 그래서 믿을만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따라 꾀를 내고 변질되는 모습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두 사람은 더불어 큰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블레셋이 침공해 왔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병기든 소년을 신뢰함으로 단 둘이 블레셋 군대를 완전히 파괴하고 대승리를 거두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이 진실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들은 절대적으로 아내 편을 들고, 아내들은 절대적으로 남편의 편을 들어줘야 합니다. 설사 상대방이 조금 잘못을 했더라도 믿고 편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자식도 부모를 못 믿고, 부부도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온탕에 들어가서 “어,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아들이 신나게 들어갔다가 너무 뜨거워서 뛰쳐나오면서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네”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또 어떤 여자가 옆집 사는 총각하고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고 싶어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옆집 사는 오빠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그러자 그 아버지가 “ 안된다. 사실은 그 애는 내 아들이란다. 고로 네 오빠가 되기 때문에 결혼하면 안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딸은 너무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엄마, 어떻게 저런 아빠하고 여태까지 살아왔어요? 내가 옆집 오빠하고 결혼하려 했더니 글쎄 그 오빠가 아빠 아들이라지 뭐에요.” 그러자 그 어머니는 “얘야, 결혼해도 괜찮다. 사실 너는 네 아빠 딸이 아니야”라고 대답했다는 확인이 안된 이야기도 있는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우리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데도 없다는 풍자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못 믿을지라도 우리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한 분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 자신도, 이웃도 믿을 수 없을 때, 절대로 믿고 의지해도 배반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구주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3.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절대진리를 알게 되었다.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될 것이라”(15:15).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은 절대 진리가 됩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가리켜서 헬라어로 ‘케리그마’라 합니다. 교회가 이 케리그마를 요약해서 정리해 놓은 것이 바로 사도신조입니다. 물론 해석 여하에 따라서 사도신조에는 로마 가톨릭의 편견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라는 구절을 해석할 때, 로마 가톨릭은 공회가 가톨릭교회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 전체, 즉 우주적 교회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해석을 한다면 사도신조는 케리그마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도들의 증언은 절대진리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장소가 달라져도 세계 어디서나, 누구나 믿어야 될 절대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오늘날을 가리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모더니즘이 근대기이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근대 이후의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상의 상대성입니다. 모든 사상은 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진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진리가 된다는 사상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가 죄인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죄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은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성연애가 죄냐고 물으면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되겠지만,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안 된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상대성을 말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사사시대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사사시대의 후반에는 동성연애와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동족끼리 서로 치고 죽이는 내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절대진리가 없고 단지 상대적으로 자기가 믿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살게 되면 결국은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절대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절대진리입니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이 복음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절대진리가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4.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말(설교)은 큰 가치를 갖게 되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라”(15:14b).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설교는 가치를 갖게 됩니다.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철학자들은 많은 말을 합니다. 역사에 보면 칸트, 슐라이에르마허, 쇼펜하우어, 장 폴 샤르트르 등 위대한 철학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말은 별로 큰 가치가 없습니다. 어려운 말로 심오한 사상을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이 하나님보다 지혜롭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것은 헛된 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파하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through the foolishness of preaching)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설교와 전도라고 하는 이 어리석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저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셨도다”(행 3:14-15)라고 부활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을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행 24:15)고 했습니다. 베드로도 부활을 설교했고 바울도 부활을 설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실이기 때문에 설교는 가치를 갖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파는 의미를 갖게 되며, 영혼구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의 철학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의 철학은 복음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처세술을 묻는다면 복음이라고 대답하고, 우리의 사상을 묻는다면 성경이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칸트주의자니, 샤르트르주의자니, 실존주의자니 이런 것들은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해도 아무 알맹이가 없는 헛것인 것입니다. 오로지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을 공부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왜 헛것인가를 알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로지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경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말과 설교는 참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5.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영원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15:19).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부활이 없다면 우린 정말 불쌍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 중 일부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립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참 헛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 있다면 지금 밖에 나가서 노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주일은 나가서 노는 시간이 아닙니다. 차라리 직장을 하루 결근하고 나가서 놀고 말지 하나님의 시간인 주일을 빼서 놀러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나가서 노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아까운 시간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헌금 드리고, 찬송 드리는 일이 헛되지만,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시에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헌금은 헛되지 않습니다.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는 하늘의 창고에 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헌신하며 봉사하고 교회를 세우는 모든 노력들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모든 수고는 부활로 말미암아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은 58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만약에 부활이 없고 영생이 없다면 우리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허무하지 않겠습니까? 부활도 믿지 않는데 크게 돈 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부활도 믿지 않는데 크게 출세하고 죽었다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인생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의 모든 수고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고, 영혼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상급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내세에 부활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 선물은 18절에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망하였으리라”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성도들은 망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우리가 지금 서로 다투면 나중에 부활해서 다시 만날 때 아마도 “우리가 왜 그 때 별 것도 아닌 일 가지고 다퉜을까?”하며 후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해서 만날 때 무안하지 않도록 서로 서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부활시에는 영광도 모두 다르다고 했습니다. 해와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듯이 부활할 때의 영광은 모두 다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고 헌신한 사람들은 부활시에 큰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리스도 일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은 사람은 부활을 할지는 몰라도 그 영광은 미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어 없어질 이 땅의 영광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한 영광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 론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큰 여섯 가지 선물을 주었습니다. 첫째로 죄사함입니다. 둘째로 절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절대진리입니다. 넷째로 우리의 언어의 의미를 주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의 삶에 영원한 의미를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내세에 부활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모든 선물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의미 없는 삶, 의미 없는 언어, 믿을 자도 없고, 믿을 진리도 없으며 내세의 소망도 없는 삶을 통해 죄 가운데 고통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도리어 부러워할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부활신앙을 입술로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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