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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상처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않게 하라 (삼상 1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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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누구나 상처가 있습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이고 크고 작음의 문제이지 사람에게는 상처가 있습니다. 어떤 대중 가수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아직도 아물지 않는 지난 날의 옛 상처를 가지고 있고 상처난 날개를 접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건이 내 마음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상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물건을 잃어버렸다든지,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인격적인 수모를 당하였다든지 배신을 당하였을 때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 인간들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받은 상처는 잠재된 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어떤 상황을 만나면 결정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어느 날 파괴적인 위력으로 다가옵니다. 어느 날 남편과의 관계에, 부모와의 관계에, 자식과의 관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칩니다.

받은 상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삶의 성격과 기질과 습관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내 성격의 일부, 내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할까? 왜 이렇게 행동할까? 설명할 수 없는 나의 마음,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습관과 행동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격이라고 말하고 기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격과 기질의 형성에 상처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참 신기하게도 사람은 자기가 받은 상처만큼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2000년 5월 25일, 명문대 고려대에 다니는 한 대학생이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해서 시체를 토막내서 버린 끔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대통령 영부인을 꿈꾸는 명문여대 출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위에서 신앙이 독실하다고 평가되는 신학교를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연세대 이윤구 박사님이 그 일기를 보고 발췌한 것을 연구하여 책을 냈는데 그 학생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유치원 때- 시계보는 법 맞으며 배운 것,
초등학교 때- 운동화 끈 리본 못 묶는다고 맞고 운 것,
초등학교 3학년 때- 새 컬러TV 조정스위치를 없앴다고 맞고, 대변 검사하는 것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밤중에 쫓겨날 뻔한 일등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 밥을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던진 일,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맞은 일, 책가방에 동화책 있다고 형과 비교해 혼난 일, 무릎꿇고 잠언 등 성경 낭독한 것, 전화 받은 것 전달도 못한다고 맞은 일, 고 3때는 과천고등학교도 못 갈 거라며 형과 비교해 문책을 받은 일, 키가 작아 사회생활 하기 힘들것이라고 모욕적인 말을 들었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ꡐ엄마,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나요?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으면 그 한마디만 들었더라면...ꡑ

여러분, 어쩌면 이 어머니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나 영부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군인과 결혼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좌절된 꿈을 그 아들이 이뤄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기대에 못미칠 때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자신도 모르게 미워지고 그래서 아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신학교를 나왔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된 꿈의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그 상처가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게 함으로 자신도 죽임을 당하고 아들도 죽게 만드는 불행한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신앙을 가진 이 어머니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상처를 치료받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였다면 그 자녀 역시 이 시대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부모의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는 무섭습니다. 그리고 상처는 우리의 성격과 기질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많은 질병을 일으킵니다. 오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로 말미암는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고 상처 때문에 암에 걸리고 상처 때문에 고혈압 당뇨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상처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상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언제 우리가 상처를 받게 되는지, 상처가 그 인생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승리의 개선행진을 맞는 여인들의 환영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나아와 환영하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6절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통상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여인들이 나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을 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여인들의 환영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성에서 나아왔습니다. 노래하며 춤추며 환영하였습니다.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나아와 환영하였습니다. 여기서 소고는 오늘날의 템버린을 말합니다. 경쇠는 우리 말로 ‘셋’이라는 말인데 그것을 보면 세 줄로 된 악기이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악기 같습니다. 악기를 들고 나아 노래하며 춤추며 환영했습니다.

7절을 보면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뛰놀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니까 노래하며 춤추며 뛰면서 온 몸으로 즐기면서 환영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축제적 분위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온 도시가 거대한 축제의 마당이 되었습니다. 
승리의 개선행진을 맞는 여인들의 환영은 통상적인 환영의 차원을 뛰어넘는 대단한 환영이었고 축제였습니다. 왜 여인들은 이토록 기뻐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그렇게 기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자신들의 자존심을 짓밟았던 골리앗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들을 압제해 오던 블레셋 군대에 대하여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강력한 대적들로부터 구원할 새로운 영웅 다윗이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환영의 열기가 고조되어 가자 많은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감정이 up이 되면 대한민국을 외친다든지 아리랑을 부른다든지, 애국가를 부르잖아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여인들도 환영의 열기가 고조되자 뛰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비극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7절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그런데 여기서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사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6절을 보면 왕 사울을 환영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왕인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 사울의 반응
8절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사울이 이 말을 듣고 불쾌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말은 7절에서 여인들이 뛰놀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하는 승리의 노래 때문입니다.
불쾌했다는 말은 감정이 상했다는 말입니다. 감정이 상했다는 말은 상처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보인 반응을 보면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었겠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장 먼저 자신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 갔을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 갈 때 그냥 끌려갔겠습니까? 삼손처럼 눈이 뽑인채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자신의 왕권이 보장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생명의 은인으로 알고 도리어 포상을 하고 존귀한 자리에 그를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에 사울은 감정이 상했습니다. 심히 화가 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9절을 보면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9절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지금 이전까지의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 인격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왔던 그 사건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 상처로 인하여 이전과 이후의 삶이 너무나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날 이후 시기와 질투의 눈동자로 다윗을 바라보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였다는 말은 그냥 쳐다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질투심의 눈동자로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주목하였다는 말은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야로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상관없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부부간에 상처가 있어 질투와 의심의 눈으로 고정시키면 의부증이나 의처증으로 나타납니다. 자유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상하면 그 감정을 상하게 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이유없이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만 미워지는 것이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꼴보기 싫습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 박사에 의하면 미국 범죄의20%가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합니다. 화이트 박사에 의하면 이혼한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말합니다.
시기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는 인간이 갖는 가장 악마적인 성품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상처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시기는 소유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을 말하고 질투는 내가 받아야 할 사랑을 다른 사람들이 받는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불편한 감정을 넘어 상대의 명성과 인격을 파괴시키는 행위까지 나아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단 시기심이 발동하면 모든 이성이 마비되고 맙니다. 그래서 살인도 불사하게 만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왜 돌로 쳐죽였습니까?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에서가 왜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했습니까? 시기와 질투심 때문입니다.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라”(막15:10)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라고 외칠 때 빌라도가 한 말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이렇게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성품입니다.

□ 사울은 왜 상처를 받았는가?
이제 우리는 왜 사울이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상처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에 매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평생 그 상처가 자신의 인생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울은 상처를 받았지만 다윗은 상처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정확한 표현은 상처를 받았을지라도 그 상처에 매임을 당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왜  상처를 받았을까요? 아니 우리는 왜 상처를 받습니까?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2절에보면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울과 함께 계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떠난 것입니다.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취하였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사무엘이 늦게 도착하니까 자기가 제사장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고 말았습니다. 늘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 판단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사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면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주님 신랑되신 주님,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과 깊은 사귐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의 방패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고 안식이 있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상처로 말할 것 같으면 다윗이 사울보다 훨씬 더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아내를 빼앗긴 상처가 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할 장인으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장인인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10년이 넘는 세월을 피하여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아들이 구테타를 일으켜 자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가 있습니다. 밧새바와 관계에서 낳은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상처도 있습니다. 자기의 간음죄를 모면하기 위하여 밧새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어 보내어 죽게만든 살인의 상처도 있습니다. 믿었던 신복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상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상처에 매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에 매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늘 자기의 생각과 뜻을 버리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리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8절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사울이 자신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깊은 상처를 받았던 것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리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는 말은 자신의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그가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의 관심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내가 어떤 자리에 앉느냐? 그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제자들이 길을 걸어가면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싸웁니까?
누가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 자리에 앉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적을 행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무리 고통 스러운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한다 할지라도 상처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자리에 연연할 때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자리에 연연하게 될 때 상처와 아픔이 내 삶 속에 찾아옵니다. 교회에서 장로 투표와 권사 투표를 하면 교회가 술렁거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직분을 자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일 자리에 연연했다면 아들 압살롬이 구테타를 일으키고 예루살렘에 쳐 들어올 때에 끝까지 왕권을 사수하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싸우지 않고 신발도 신지 못한채 울면서 감람산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또 그가 만일 자리에 연연했다면 잃어버린 왕권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피난 중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왕권을 다시 되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도했던 한 가지 일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해 달라는 일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상처를 받습니까? 자리 때문입니다. 정욕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기자는 약4: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4: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좇아 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기분이 나쁩니까? 왜 자녀가 공부를 못하면 기분이 나쁩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왜 기분이 상하고 상처를 받습니까? 솔직히 자녀를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기분이 나쁘고 내 안에 있는 욕심대로 되지 않아서입니다.

살다보면 가난한 자리에 처할 때도 있고 짓밟힘을 당하는 자리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연약할 때도 있고 병중의 자리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또 내가 높은 자리, 부요한 자리, 남이 알아주는 자리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간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만이 이뤄주기를 기도하고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비교의식입니다.
사울이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비교의식입니다. 비교의식은 자신의 가치와 평가의 기준을 사람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왕의 자리를 자신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무명의 한 소년과 자신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왕인 자신과 다윗이 비교되는 것 자체도 기분 나쁜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겠습니까?
비교의식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비교는 나를 교만하게 하든지 나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의 성공과 실패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나의 자녀를 나의 남편과 아내를, 나의 부모를 비교하지 마십시오.
사울이 다윗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었고 결국엔 어둠의 영이 틈을 타 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피흘 흘려 값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이고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부모가 버릴 지라도 나는 너를 손 바닥에 새기며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 왜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까?
어둠의 세력이 상처를 통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타고 어둠의 세력은 침투합니다. 악한 영이 언제 사람들에게 역사합니까? 상처입니다.
10절a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상처가 있는 사람은 악한 영들이 그 상처를 교두보로 삼아 그 사람을 계속 괴롭힙니다. 섭섭한 것만 생각나게 만들고 자기가 실패한 것만 떠오르게 만듭니다. 외로운 것만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나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 세상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충동질합니다. 스스로 생명을 끊게 만드는 유혹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게 만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울은 나라를 구하고 자기를 지켜줬던 다윗을 죽여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악신이 임하였습니까?
그 이튿날입니다.
여기서 그 이튿날은 바로 개선행진이 있던 다음 날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던 그 다음날입니다. 하나님이 부리던 악신이 힘있게 사울에게 임했습니다. 여기서 악신은 바로 악한 영을 말합니다. 그런데 악신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악의 왕 사단만이 아니라 사단의 하수인인 악령까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신이 힘있게 내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동일하게 사울이 여호와의 신에 충만하였을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는 것과 악령이 임하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가 동일합니다.

왜 악신이 힘있게 내렸습니까?
악신이 힘있게 내릴 수 있도록 마음에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영, 악한 영, 더러운 영은 언제나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을 때 강하게 임합니다. 악한 영이 강하게 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적절한 환경이 무엇입니까? 상처를 통해 주어진 시기과 질투 미움과 분노, 불평과 원망, 슬픔과 탄식, 용서치못함등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마음이 감사와 기쁨, 온유와 자비, 용서등으로 충만하면 어둠의 영은 절대로 역사하지 못합니다.  감사와 감격 속에 사는 자에게 어둠의 영은 절대로 임하지 못합니다. 아니 들어왔더라도 적응할 수 없어 스스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악한 영이 강하게 임합니까? 상처를 통해서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입니다. 어둠의 세력은 언제나 상처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악한 영은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 강하게 임합니다. 준비되면 준비된 만큼 강하게 임합니다.

□ 악신이 임한 결과
첫째로 야료했습니다.
10절b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악신이 강하게 임하자 야료하였습니다. 여기서 야료(惹鬧)라는 밤에 오줌을 쌌다는 말이 아니라 ‘끌야’(惹) ‘시끄러울 료’ (鬧)가 결합한 말로서 까닭없이 떠들어 대는 행동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헛소리를 말합니다. 사울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경우에 맞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위하여 손으로 수금을 타고 있었는데 사울의 손에는 창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10절c“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얼마나 상반된 모습입니까? 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손에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다윗을 향하여 던집니다.
11절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번 피하였더라”
사울은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작심하고 창을 던졌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세게 던졌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 던졌다는 표현을 보면 사울이 창을 던지고 또 다시 던졌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단의 성품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성품은 살리고 회복시키고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들어 여인을 죽이려 하던 자들이 돌을 놓고 한 사람, 두 사람씩 사라지고 아무도 없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성품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잣대를 가지고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과 자기의 전통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난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로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의 신이 사울을 떠나고 다윗과 함께 계심으로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다윗이 왕인 사울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신분으로 보면 목동인 다윗이 왕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울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다윗이 더 두려워 떨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 지금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두려움의 영입니다. 두려움의 영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더군다나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더욱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상처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타고난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상처는 운명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상처에 매임을 당하여 살지 않습니다.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면 사단이 우리 가운데 역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면 자유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 나아갈 수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안겨 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도 비참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16절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많은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하였기에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에게는 사랑스러움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189장
(김은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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