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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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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1-5에,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제물은 드리는 중, 빌라도의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것을. 그렇게 예수님은 먼저 회개를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번뇌무진’(마음이 시달려 고통스러운 것이 끝이 없다.) 이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아무도 고통이 없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삶을 “고해” 고난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난의 바다를 헤쳐 나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 공부시키려고 발버둥 칩니다. 언제가 신문 보니까. 자식을 학원 보내기 위해 학원비 벌려고 그 엄마가 매춘 행위를 하다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그렇게 가르친다고 고생 안하며 살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더 알고, 남보다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해서 고생 안하고 사느냐구요?
부모가 재산을 많이 물려준다고 고생 안하고 삽니까?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겪는 고난은 돈 때문이 아니거든요. 배우지 못해서 생긴 것도 아니거든요. 권력이 없이 생긴 것도 아니거든요.
왜 사람은 고난당할까? 왜 번뇌무진이 생겼을까?
성경은 그 원인을 말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근원에서 이탈한 결과라고 합니다. 즉,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써 원래 가졌던 본 모습에서 스스로 등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그때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등을 돌린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등을 돌렸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와도 등을 돌렸습니다. 균열 곧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즉 하나님께 죄를 범한 사람은 그래서 생긴 번뇌의 뿌리를 갖게 되었는데, 교오(교만하고 건방짐), 인색, 탐욕, 분노, 질투, 게으름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이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가 균열을 일으킵니다. 금이 가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죄로 인해 고통 속에 사는 사람이 그 번뇌의 뿌리 때문에 또 다른 번뇌의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 사람이 싫다.” 싫어하는 그것이 벌써 번뇌 곧 마음의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안 만나고 안 보면 되는데, 안 만날 수 없습니다. 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 사람이 싫어서 번뇌하는데 또 가끔이라도 보게 되면 더 번뇌의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건, 시작도 고통이요, 결과도 고통입니다.
문제는 이런 고통에서 사람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통은 늪과 같아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빠져들게 됩니다. 도망간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나는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선언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있다면, 단 하나의 방법뿐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래요.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생긴 거라면, 하나님에게서 등 돌렸기 때문에 생긴 거라면, 방법은 하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닙니다.
영화 ‘타워링’ 불타는 고층 건물 속. 그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 부부가 서로 지난날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서로 용서합니다. 죽음 앞에서 가진 이들의 고백과 용서는 진지하고, 아름답고, 참으로 거룩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죄를 자백하고 서로 용서했다고 해서 구원 받은 것 아닙니다.
구약의 회개는 과거와 자기가 저지른 잘못 또는 죄로부터 도망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를 기점으로 할 때 뒤를 보는 것입니다. “그때 이런 거 했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신약의 회개 역시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지난날의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과거의 죄가 깨끗이 씻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가 저지를 죄만을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 짓도록 하는 근원으로서의 죄 곧 원 죄도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그렇기에 신약의 회개는 지난날의 죄 씻음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역점을 둡니다. 죄로 부터의 도망이 아니라 죄를 이겼다는 긍정적인 요소가 더 강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곧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하십니다. 지난 죄는 용서하고, 그리고 이제 부터는……. 그 “이제부터는” 이것이 신약의 회개입니다.

누가복음 3장,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외칩니다.
(9절) “이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니라” 그러자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뉘우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간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 아닙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이제부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는 사람들에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기가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세리들에게는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했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회개란 그렇게 살아온 것을 용서함 받는 동시에,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리들은 부과한 세금 외에 더 많은 것을 거두어 자기 것으로 가졌습니다. 회개란,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해 용서 받는 것이요, 동시에 앞으로는 그렇지 않게 사는 삶입니다. 군인들은 사람들에게 강탈했습니다. 거짓으로 고발 했습니다. 받는 급료가 적다고 늘 불평하며 살았습니다. 회개란, 그렇게 살아온 삶에 대해용서 받는 것이요, 동시에 앞으로는 그렇지 않게 사는 삶인 것입니다.

도적질 하는 사람이, 도적질하고 뉘우치고 또 도적질하고 뉘우치고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만 두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간음하는 사람이, 간음하고 뉘우치고 또 간음하고 뉘우치고 이것 역시 회개가 아닙니다.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만 두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설사 그렇게 해 왔다 하더라도 회개하는 그 순간부터는 그런 것 전혀 생각조차 하지도 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회개는 ‘이제부터’입니다.

물론 회개에는 죄에 대한 통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역점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전인적인 방향전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죄나 잘못을 들추어내서 현재를 공박하거나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지금 여기서 누구를 공박하거나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회개했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람일 수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나간 것 갖고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회개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거라면, 누구든지 회개해야 합니다. 만약 회개가 지나간 죄에 대한 거라면, 지나간 삶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또 죄지어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렇게 죄지은 책임을 다른 사람 혹은 사회에 넘길 수 있다면 회개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거라면 죄 지은 것이 있든 없든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조그마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완전히 새로운 현실을 향해” 스스로 몰두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나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기에,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자기 비움입니다. 죄를 씻어 깨끗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의 설교에 청종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분명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말씀드리지만, 지나온 죄를 씻김에서 끝나는 것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회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자기 비움이라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그 비움을 채워야 합니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회개는 잘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지은 죄를 반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안 계시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귀신이 돌아다녀도 있을 곳이 없어서 쫓겨난 곳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귀신은 다른 귀신을 더 데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갔고 그 사람의 형편은 이전보다 더 나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깨끗하게 되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하게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지 않으면 여전히 과거의 죄를 반복하게 되고, 그것은 자신을 이전보다 더 나쁘게 만들게 됩니다.

사도행전 19:1-7,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이 떤 제자들을 만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 사람들의 대답은 “요한의 세례입니다.” (4절)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셨으니 이는 곧 예수라.” 그래서 그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여기 ‘요한의 세례.’ 그것은 ‘회개의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죄를 씻게 하고 그래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 밖에 모른 겁니다. 그 비움에 성령으로 채워야함을 모른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죄를 반복하는지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왜 번뇌무진, 마음이 시달려 끝없는 고통을 당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 씻음 받는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죄를 반복하는지, 왜 회개하고 예수 믿었는데도 번뇌무진, 마음이 시달려 끝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 믿었어도 예수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예수의 생각, 예수의 뜻, 예수의 말씀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말씀이 삶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죄 짓고, 그래서 또 통회하고 그러는 일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믿지만 여전히 마귀에 끌려 다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믿지만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없으니까.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 삶 가운데는 없으니까.
회개 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지배아래 놓여야 합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순종해야 합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잠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컵에 물을 부으면 안으로 넘쳐 밖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컵 안에 물이 있고, 컵은 또한 물 안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찬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 아래 사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인 것입니다. 분명 그래야만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으신 여러분 이제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여기, “하여, 받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리 된다는 말씀입니다.
소금을 먹으면 짭니다. 사탕을 먹으면 답니다. 그것을 필연적이라고 합니다.
회개하여,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성령이 임하시고, 그래서 성령의 선물 곧 새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반드시 그리됩니다. 그건 애써서 되는 것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은 왜 일까?
회개를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그냥 지은 죄에 대한 고백이요, 그래서 용서함 받는 정도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회개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 받고, 그 죄를 몰아낸 깨끗하게 비운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렇게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고 맨날 지은 죄만 반복해서 뉘우치고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1장, 빛으로 오신 예수. 그것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빛으로 나아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빛으로 나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빛 가운데서 번뇌무진을 기쁨과 감사로 바뀝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차별 없는 사랑 곧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다면, 구원 받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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