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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자의 여자의 영적 질서 (고전 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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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여자의 영적 질서

고린도전서 11,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세 가지 신앙의 행습에 대하여 그 원리와 지침을 가르쳐 줍니다. 11장에서는 두 가지, 예배드릴 때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풍습에 대한 것과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그리고 12장에서는 은사에 대하여 가르쳐 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예배 중 여자가 수건을 쓰는 풍습에 대하여서는 칭찬을 하지만, 그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신앙행습에 대하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고린도교회가 전통은 애써서 지키지만 예배의 마음은 형편없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 11장 2-16절에서, 전체적인 논리의 흐름은 여자는 기도하거나 예언을 할 때에는 머리에 무엇을 써야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바로 이런 질문이 떠 오릅니다. 오늘날에도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카톨릭 교회나 형제교회 등 몇몇 교회들에서는 미사포 내지는 하얀 손수건을 씁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왜 머리에 무엇을 씁니까?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 교회에서 언제부터 이런 풍습은 전해져 내려왔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당연히 떠 오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많은 해석적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머리라는 단어가 18번이나 나오는데, 사실적으로 두부(頭部)나 머리카락을 가리킬 때가 있고 비유적으로 대빵, 우두머리를 가리킬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해석이 제일 어려운 구절로 꼽히는 것은 <10절>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그 머리에 권위의 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남자, 여자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천사들은 왜 끼어들어가지고 복잡하게 하는지...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써야한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질서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고<8절> 남자로부터 여자가 만들어졌고 남자를 위하여 여자가 창조되었고<9절>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3절>,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여자는 남자라는 권위 아래 있는 피조물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들의 안색이 벌써부터 이상하게 변하려고 하네요~)

천사는요? 천사가 무엇하는 존재인가? 천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감시자라면, 천사들 때문에 라는 것은 천사가 감시하기 때문에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많이 해석됩니다.

요는 오늘 본문 자체의 증거는 여자는 기도나 예언 중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풍습에 대하여서는 사도 바울 자신은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논쟁을 불허합니다<16절>.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는 왜 머리에 수건을 안씁니까? 성경에서 이렇게 명확히 증거하는데 정말 안 써도 괜찮은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교회는 개혁을 지향하는 교회이니까, 과감히 머리에 수건을 쓰기로 해야 하나요?

먼저 여자가 기도 중에 머리에 무엇을 쓰는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부터 보겠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율법의 어디에도 여자가 기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한다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이것이 자신이 고린도교회에게 전해 준 전통이라고 밝혔지만, 이 전통이 예수님에게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침례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 외에 어떤 신앙행습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는 전통은 유대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 시대 사람인 요셉푸스도 “여자는 모든 면에서 남자보다 열등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유대의 18 기도문에 의하면, 유대교에 속한 남자는 매일 아침마다 세 가지 이유로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하지요? 여자와 종과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대교 문화에서는, 여자가 자기 머리를 남자에게 노출시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남편에게는 이혼 사유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머리를 밀거나 또 외출 시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나는 수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스스로 거리의 여인, 창녀임을 선전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유대인 출신들도 있었지만, 그리이스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문화가 다른 그리이스 출신 사람들 중에 다수는 아니어도 머리에 무엇을 꼭 써야 하냐 반문하는 사람들이 약간 있었지만, 다수의 여자들은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것을 합당한 풍습으로 여겼습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이 말하자면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왜 여자가 기도나 예언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하는가, 그 풍습에 담긴 의미를 깨우쳐 주면서 당시 세상과 차별되는 고린도교회의 풍습을 지지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배경을 기억한다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써도 되고 안 써도 됩니다. 예배드릴 때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쓰는 교회를, 그것만 가지고 잘못되었다 할 수 없으며, 안쓰는 교회를 향하여 “아니 성경에 이렇게 명확히 기록되었는데 왜 안써?” 하며 세속적 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는 성경말씀 그대로 여자들이 미사포, 예배포를 쓴다” 라고 하여 자기들만이 정통인 것처럼 우월의식을 갖는 마음이 사실은 미성숙하고 그릇된 마음이고, “니들 그것 왜 쓰냐? 꼭 티를 내야 하겠냐, 알맹이 없는 것들이 꼭 외적인 것가지고 티를 낸다니깐” 하며 공격적인 태도를 갖는 것도 미성숙하고 그릇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을 <2절>에서는 전통, <16절>에서는 풍습이라고 지칭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이나 풍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를 담고 좋은 뜻을 전승하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지만 그 형태를 절대화시키고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형태, 껍데기를 고집하여 고수하려는 사람들을 세인들은 흔히 꼴통보수라고 합니다.

전통과 풍습에 대하여 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들의 주님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율법에서도, 형태보다도 그 정신과 내용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적용 형태와 전통이 내용과 정신의 장애가 되는 율법은 오히려 일부러 어기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준수와 관계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인 안식일의 의미는 생각지 않고, 안식일 규칙을 정하여 그 규칙에 따라 얼마나 각을 잘 잡았느냐로 사람을 판단하고, 스스로 우월의식을 갖는 것은 위선임을 예수님께서 깨우치셨고 그 위선의 껍데기를 깨뜨리시려고 일부러 안식일을 범하기도 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삶의 태도와 습관, 예절입니다.

사람은 겉의 형태를 규격화시켜서 속의 사랑의 마음이 길러지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는 깨우쳐 주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변화되어 행동이 변하고 습관이 형성되고 인격이 세워집니다. 사람의 변화는 안에서부터 밖으로의 변화이지, 밖에서부터 각잡아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밖에서부터 각을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튀고 반박을 합니다. 군대 보세요? 아무리 각 잡아도 안 변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율법의 잣대로서 사람들을 재어보시지 않았고, 도리어 율법의 규격과 잣대만을 들이대는 사람들의 오만한 꼴통근성을 책망하셨으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이 없음을 깨닫게 하셨고 그 공갈빵처럼 빈 마음에 진정한 사랑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당신이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인류 역사에 사랑의 대혁명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조차도 어떤 의미에서 폐기하기까지 하셨는데, 예수님 이후 유대문화에 비취서 비롯된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꼭, 반드시 고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옛날의 바리새인보다 더 꼴통인 네오 바리새주의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쓴다고 잘못되었다고 정죄하지 말고 안쓴다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써도 괜찮고 안써도 괜찮습니다. 정작 문제가 되는 마음은, 우리 교회가 쓰기 때문에 안쓰는 교회를 다 잘못된 교회라고 매도하는 오만함이고, 또 우리 교회는 안쓰기 때문에 쓰는 교회는 다 이상한 교회라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표준이 되려고 하는 마음, 선악과를 따먹은 죄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또 써도 되고 안써도 된다고 했으니까, 간혹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쓰기로 하였는데 나는 내 주관이 있습니다 해서 독야청청(獨也靑靑) 안쓰고 있다거나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안쓰기로 했는데 구지 고집을 부려서 쓰는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왕왕 있습니다. 스스로 야당이 되어서 튀려고 하는 사람은 내가 정말로 거듭난 사람인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머리에 무엇을 쓰기로 했다면 쓰시고 안쓰기로 했다면 쓰지 마십시오. 성경에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영역에 대하여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이렇게 하자고 한 것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자고 한 것은 저렇게 하고 얼마든지 움직여줄 수 있는 마음이 자유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있게 하는 모습입니다<고전14:40>.

그런데, 여자가 기도나 예언 중에 머리에 무엇을 써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되느냐보다 오늘 저희가 더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재인가, 차별적인 존재인가 과연 남자와 여자의 위치에 대하여 성경적인 견해가 무엇인가입니다. 왜냐하면 풍습은 변할 수 있지만, 풍습을 낳게 한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풍습과 그 풍습을 낳은 성경적 원리를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자와 여자의 영적 질서에 대한 원리에 주목하여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하셨듯이,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건 유대교적인 생각이고 유교적인 생각이다, 성경적인 견해는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가치관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가가 정해집니다. 대표적인 예로 오늘 교계의 화두가 된, 과연 여자에게도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이 성경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교단 전체적으로 아직까지도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안주는 교단은 침례교단밖에 없습니다. 장로교의 일부 교단에서도 아직 여자목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것이 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여자 대통령도 나오려고 하는 때인데, 여자 목사가 무슨 문제가 되는가? 이런 논리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나타난 현상을 표준으로 삼는 것은 미련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모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합당한가? 남성과 여성의 위치에 대한 성경적 원리에 따라 적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성과 여성의 위치에 대한 성경적 원리는 무엇입니까?

남성과 여성의 위치와 관계에 대한 바른 가치관 정립을 위하여, 우선 우리는 양 극단을 피하여야 합니다. 양 극단이라 함은, 남존여비(男尊女卑)로 대표되는 남성우월주의와 남녀동권(男女同權)을 주장하는 페미니즘(feminism)입니다. 

먼저 남성우월주의에 대하여 살펴보면, 남존여비, ‘남자가 존재하는 한, 여자는 비참하다’ 라는 뜻이라지요? 유대교사상에서나 우리나라의 유교사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이 유교사상의 잔재가 많이 남아서 웃지도 못할 해프닝이 많지요? 남성이 여성을 상품처럼 여기는 사회병폐에는 남성우월주의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경제의 통계를 보면, 세계의 사유재산의 1%만 여성이 소유하고 있고 99%를 남성이 소유하고 있으며, 여성이 창출하는 경제력은 10%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시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의 비율을 보면, 전세계적으로는 15.8%이고 우리나라 국회에서는 여성의원이 16명으로써 5.9%이며 기초자치단체장은 0.4%(2명), 광역의회는 9.2%(63명), 기초의회는 1.6%(77명)입니다. 이는 아직도 전세계도, 우리나라도 남성중심사회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여권신장운동, 남녀동권주의라고 번역하는 페미니즘은 이와같은 남성중심사회, 남성우월주의를 타파 혹은 극복하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한 2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사회 문화 운동으로 활발하게 영향을 미친 것은 1960년대초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40-50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이 면에서는 서구 사회보다 훨씬 늦어서 1983년에야 여성문화연구소가 처음 생긴 것을 보면, 남성우월주의문화를 극복하고자 시도가 많이 늦었습니다.

페미니즘이, 남성우월주의로 말미암아 억압되었던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주고 여성도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행복과 의미에의 참여를 보장의 폭을 넓혀온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남녀동등운동, 더 나아가 여성상위시대를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흑인인권운동을 했던 말콤 엑스가 백인우월주의를 극복하고자 흑인우월주의를 주창했던 것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오류를 범했듯이, ‘지금까지는 남자중심으로 돌아갔으니 이제부터 세상은, 교회는 우리 여자들이 장악하겠다, 이제부터 우리 가정, 교회의 중심은 여자다, 여자중심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여권신장, 남녀동등에 대한 개방은 자유주의보다 공산주의사회에서 조금 더 앞섰습니다. 그런데 유물론에 기초한 공산주의 사회에서 남녀평등에 따라 여성에게도 똑같은 노동을 보장하고 기회를 주는 것이 여성의 행복을 오히려 앗아갔음은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남성우월주의든, 남녀동권주의든 어느 쪽이든 양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둘 다 인간의 행복을 장애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위치, 질서에 대하여 뭐라고 가르쳐 줍니까? 사실 성경에는 남성중심적인, 남자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성경구절들이 몇 구절 있습니다. 반대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의 존재라고 가리켜주는 구절은 아쉽게도(?), 다행히(?) 하나도 없습니다.

그중에 남자의 권위를 제일 직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말씀 중의 하나가 <딤전2:11,12>입니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이 역설하는 근거로 제시된 것은 유대교문화가 아니라, 창조질서입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13,14절>

이 구절들을 문화적 배경을 제시하여 참된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여도, 성경을 해석하는 제일 안전한 도구인 상식과 문맥에 따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남자에게 권위가 있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남자와 여자의 위치, 질서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가르쳐 주는 참 좋은 본문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우선적인 위치에 있음을 가르켜 주기도 하고<3,7-9절> 또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고 가르켜 주기도 합니다<11-12절>.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서로 자기 주장을 지지해 주는 구절들을 들이대면서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양보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내가 머리야, 머리 알기를 발톱의 때만큼도 못알어?” 하고 여자는 “하나님이 똑같다고 했잖아!” 하며 지지 않을려고 하지요? 이런 경우 뭐가 맞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지지 않으려는 심보가 항상 문제입니다. 절대로 질 수 없다 작심해 놓고 온갖 구실들 갖다 붙이기 잘하는 죄부터 회개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두 말씀의 가르침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우선적으로는 어느 것 하나를 배척하지 마십시오. 둘 다를 받아들이십시오. <7-9절>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11-12절>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어느 것 하나를 가지고 다른 것을 공격하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내가 좋은 것만 생각하고 편하게 살지 머, 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불편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등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또 하나님은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머리가 된 가정이나 공동체,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가정은 바람직한 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기적, 자기 중심적인 태도입니다. 이 두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죄된 성질과 야망, 욕심에 따라 한쪽만 주장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둘을 함께 받아들이는 제일 좋은 개념은 “질서있는 파트너쉽”(orderly partnership)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파트너쉽이라 함은 한쪽만으로서는 존재가치가 없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남자는 여자없이 온전할 수 없으며 여자도 남자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거하는 것을 결코 좋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아담도 혼자 있을 때 무지하게 외로웠을 것입니다. 인간은 남녀가 함께 있어야 온전하고 아름답습니다.

옆 길로 잠깐 빠지면 그러므로 결혼하십시오. 혼자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요새 청춘 남녀들이 결혼하면 괴로울까봐 결혼을 자꾸 안하는데, 괴로울까봐 외로운 것이 낫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사실 결혼생활에 괴로움은 작고 행복은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최선의 삶이지요. 그러므로 결혼들 하십시오.

파트너쉽에 질서가 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똑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남자를 위하여 여자를 지으신, 남자를 머리로 지으신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하십시오. 그래야 인간답게 행복하게 삽니다. 리더쉽은 남자에게 주신 책임입니다.

파트너쉽을 강조하느라고 질서를 무시하지 말고, 질서를 잡겠다고 파트너쉽을 파기하지 마십시오. 여전히 추상적이지요? 조금 있다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저희가 눈여겨 볼 것 중의 하나는, 사도 바울이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가르쳐 주면서, 고린도교회 독자들의 마음과 양심의 자연스런 느낌과 받아들임에 호소하는 대목입니다. <14절> “자연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남자는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이 보기 좋고 여자는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습니까? 이게 보편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남자가 치렁치렁 머리를 한다거나 여자가 스포츠 머리를 하는 모습이 보편적인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거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신이 약간 이상한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기준이 자꾸 헷갈리게 하는 것이 말세의 증거입니다. 다시 반복하면, 세상에서 되어지는 현상이 표준이 아닙니다. 무작정 따라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본성적으로, 자연스럽게 좋다고 받아들여지고 느껴지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머리카락의 길이에서만이 아니라, 그 위치와 관계에서도 무엇이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난 번 전바나바 선교사가 가르쳐 주었듯이,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여성답게 살고 싶어서인 것은 기억해 봄직합니다.

남성우월성의 폭력성에 대항하여 페미니즘을 부르짖었지만, 여성의 행복은 남성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임을 경험을 통해서 깨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주관적인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종종 보편적 질서를 거부하지만, 인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기쁘고 좋게 받아들여집니다.

예컨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고통을 받는 여성이 “이젠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하여 혼자 사는 것이나 혹은 정 반대로 내(여성)가 구박하고 구타를 해도 그냥 맞고 기죽어사는 남편을 두어서 옛날의 한풀이를 하는 것이 그 여성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한번 그런 남편 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자매가 있으면 내적 치유를 좀 받아야 합니다.)

  이 여성의 행복은 건강한 가정, 사랑으로 지도하는 새 남편을 만나서 그래서 기쁨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삶을 살 때에 행복합니다. (자칫하면 이혼하고 새 남편 만나라고 오해를 끼칠까봐 두렵습니다)

여러분 사실, 여자가 남자같이 하고 다니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우리들에게도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남자가 여성화되어가는 것이 영 부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다운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제일 아름답고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기에도 제일 좋고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있는 파트너쉽”을 존중하십시오.

구체적으로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남자를 주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편을 따르기를 배우십시오. “남편이 좀, 목사님처럼 멋있으면(?) 잘 따르지요? 으이그 속터져~”하지 마십시오. 남편을 구박하면 할수록 남편의 마음은 아내에게서 멀어짐을 기억하십시오.

미혼 자매 여러분, 결혼 배우자를 선택할 때 내 말 잘 들어주는 남자를 고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랑한다고 하면서 머든 다 해 줄것같은 남자에게 속지 마십시오. 내가 존경하고 잘 따르고 싶은 형제인가를 고려하십시오.

전도서에서 극단적인 표현으로 경계해 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捕繩)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전7:26> 자매들이여,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내 뜻대로 만들어야 하고 좌지우지하고 휘두르려는 이런 여자는 되지 마십시오. 여자의 행복은 순종하는 삶에 놓여져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남자들에게 말합니다. 책임있는 존재로 성숙하기를 힘쓰십시오.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거든 머리로서의 아량과 책임감을 기르십시오. 가정경제이든, 자녀양육이든 귀찮고 힘들다고 리더쉽으로서의 책임을 유기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교회가 자꾸 여성화되어가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사랑을 오해하여, 남성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교회의 무기력을 낳고 있습니다.

남성다움은, 룻기의 보아스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이, 희생을 감수하는 책임감, 불편함과 어려움을 감수하는 포용력, 그리고 정도(正道)를 행하는 강한 마음입니다. 형제들이여, 남자가 되십시오. 영적으로도 최소한 자매를 인도할만큼 성숙하기를 힘쓰십시오.

행여 사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소명을 팔아먹지 마십시오.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남자의 사랑은 멋있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남자들이여 여자에게 헌신하지 말고 소명에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명을 잘 이루도록 당신의 소명에 함께 헌신하여 당신을 돕는 배우자를 마련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파트너쉽의 행복을 당신에게 누리게 하십니다.

남성우월주의와 페미니즘의 극단을 달리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질서있는 파트너쉽”을 존중하며 따르기를 원합니다. 남성의 폭력(暴力)과 여성의 일탈(逸脫)이 난무(亂舞)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아름답고 멋있게 함께 사는 천국을 누리며 또 증거하는 우리들이기를 바랍니다.
(이덕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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