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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함과 안색이 변함이 어찜이뇨? (창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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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창 4:6-7)

  많은 사람들이 병든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병든 감정이 비상식적이며 있어서는 안 될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에,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저래도 되는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는 병든 감정이 만들어 내는 행동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그 일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살아갈 긍지와 용기를 잃기도 합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그 병든 감정의 행위의 주역임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이 병든 감정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든 감정은 우리를 파괴하며 우리로 하여금 더 큰 고통과 저주의 삶에 처하게 합니다.
  아담의 두 아들 중에서 형 가인은 농사꾼이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지고 아벨은 양의 첫 샛끼와 그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형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은 형 가인에게 병든 감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가인의 모습을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노로 안색이 변한 가인은 자신의 병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통하여 우리 자신에게 ‘네가 분노하며, 안색이 변함이 어찜이뇨’ 라고 질문하심으로 우리의 감정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게 하십니다. 병든 감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무시 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소외감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셨으나 자신의 제물은 받아주시지 않았다는데서 분노하게 되었고 안색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무시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소외감이 그를 불쾌하게 하였고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안색을 변하게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그 재산을 모두 팔아 외국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탕진하여 거지가 되고 맙니다. 그는 굶어죽게 되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이 돌아왔다고 그 아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첫째 아들이 들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동생을 위한 잔치를 보고 분노하며 아버지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샛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29-30)
  아들의 분노와 불평과 원망은 아버지가 자신을 무시하여 소외시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의 무시하였다고 느끼게 하는 소외감은 분노와 불평과 원망의 병든 감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결코 어느 아들도 소외시키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1-32)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시의 대상으로 소외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죽어야 마땅할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희생의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서의 많은 서신 가운데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2)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2)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1)
  사단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무시 받는 대상으로 느끼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것처럼 느끼게 하여 절망의 감정을 조성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감정의 사람으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화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잘못된 느낌이 병든 감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병든 감정은 소외감에서 옵니다. 더구나 하나님으로부터 무시의 대상으로 자신을 소외시키는데서 이 병든 감정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된 삶을 사십시오. 우리를 용서하셔서 용납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킴으로 소외된 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 병든 감정을 치유 받으십시오. 병든 감정을 극복하시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을 행함에 실패한데서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못함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소외시키신 것이 아니라 가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낯을 들지 못하는 이유는 선을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시는 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린 가인의 예배는 선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가인의 예배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예배는 선한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예식의 예배일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가 되지 못할 때는 선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내 의도와 내 방식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일방적인 태도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되지 못할 때는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나의 의, 가치 있는 행동, 훌륭하고 멋진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되지 못할 때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관점에서 선이라고하나, 하나님 앞에서는 선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선을 행할 때에 그곳에 보람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에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하고 허무함에 빠지게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신의 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며 분노하여 얼굴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선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이루어 보십시오. 그곳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쁨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선은 거짓입니다. 그 거짓의 선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공허하게 합니다. 거짓된 선을 만드는 곳에 병든 감정이 만들어지고 병든 행동이 일어납니다. 그 행동은 분노와 함께 원망이고 비난입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일진대, 그곳에 하나님의 기쁨인 즐거움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병든 감정에 빠지기보다는 참된 즐거움에 있게 하고, 그 즐거움을 표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찾으십시오. 왜 분노하며 안색이 변해야 하고 낯을 들지 못하고 감추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함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을 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곳에 병든 감정을 치료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곳에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행복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죄의 소원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비참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소외시켰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당하게 한 원인은 동생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동생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시의 대상으로 소외당했다는 것입니다. 동생 아벨만 없으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되거나 소외당하지 않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죄의 소원이 나타난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죄의 요구가 가인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소원은 죄를 짓게 하고, 죄가 지배하는 강한 충동을 말합니다. 이 충동은 가인으로 하여금 살인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죄의 강한 소원은 분노와 같은 병든 감정을 만들고 안색을 변하게 합니다. 죄의 근거는 잘못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동생 아벨에 있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데서입니다. 원인은 자기 자신임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죄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희랍의 어느 도시에 경기에서 늘 우승하는 육상 선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선수로 말하면 국내 경기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며 공을 세웠기에 나라에서 동상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그와 맞먹는 훌륭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수는 경기 때마다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실의에 빠져 경쟁선수의 동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맞았어, 바로 저 친구 때문에 내게 승리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야. 저 친구만 없애 버리면....” 이러한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그날 밤부터 매일 동상을 찾아가 조금씩 구멍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상이 쓰러지는 날, 네놈도 끝장이다. 네가 없으면 내가 승리자가 될 거야”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동상에다 대고 분풀이하던 그가 마침내 동상을 쓰러뜨리고 말았습니다. 아! 하는 환호성을 지르는 순간 넘어진 동상이 그의 몸을 덮쳤고, 그는 그 밑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경기에 우승하지 못한 원인이 경쟁선수에 있다고 보지 말고, 자신의 부족한 연습, 좀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함에 있음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의 원인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서운 죄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고 힐문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고 변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고 하시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고 변명했습니다.
  죄의 소원은 변명과 원망 그리고 불만과 분노의 병든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잘못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에도 그 원인을 다른데 돌림으로 그 대상을 미워하고 원망하여 분노하며 안색이 변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더 심각한 원인이 있음을 보는 데서 우리는 죄의 소원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아벨을 살인한 가인의 모습이 있지 않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병든 감정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증오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형제입니까? 아니면 친구입니까? 대적자입니까? 혹 하나님은 아닙니까? 그러기에 분노하고 얼굴색이 변해 있습니까? 현실에 대하여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원인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지 못한 자기 자신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볼 수 있을 때 그곳에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이 생겨납니다.

  무시 받고 있다는 소외감에서 자유하지 못한 가인은 자신의 병든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이르지 못한 가인은 선을 이루지 못함으로 자신의 병든 감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죄의 강열한 소망 아래서 죄의 노예가 된 가인은 병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함으로 동생을 살인하는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가인의 결과는 더 큰 저주를 받는 불행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는 더 큰 변명과 함께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죄에 지배당하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 빠진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 4:9)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1-1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시대의 어려운 환경과 힘든 삶은 우리를 병든 감정의 상태로 몰아가는 환경을 조성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잘못된 감정에서 치유되어 건강한 모습으로 축복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16-23)
  이 말씀대로 병든 감정에서 벗어나 영적 풍요의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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