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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출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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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오늘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앞의 부분, 1장 1절에서 7절까지는 창세기의 뒷부분을 요약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니까 출애굽의 이야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새 왕은 유능한 왕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보니까 강력한 파워를 가지고 통치합니다.
강력한 추진력을 가지고 자기의 정책을 과감하게 펴나갑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학대해라, 아들들은 출생 즉시에 죽여라…, 
애굽에서는 왕을 바로라고 하는데 이 왕은 ‘물 바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이 왕은 지혜로운 왕, 명군(明君), 또는 성군(聖君)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유능한 장수에는 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용장(勇將) 또는 맹장(猛將), 용감하고 싸움 잘 하는 장수이고, 그 위는 지장(智將), 지혜로운 장수이고, 제일 위는 덕장(德將), 덕스러운 장수라고 합니다.
새 왕은 용장이나 맹장은 되어도 지장이나 덕장은 못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왕은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9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과장이고 과대망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정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새 왕이 이렇게 마음 놓고 학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아들을 죽이는 잔인한 정책을 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어디까지나 흘러들어온 소수민족이었습니다.

이 새 왕은 무엇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단순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동시에 요셉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이 됩니다.
또 자기 민족의 역사를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웠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하여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새 왕을 지혜롭지 못한 왕, 폭군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새 왕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른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알아야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새 왕이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요셉이라는 인물을 몰랐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왕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새 왕은 하나님을 알 기회가 있었습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이거 이상하다.’ 하면서  그 원인을 진지하게 탐구하였다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 당시 애굽의 왕은 달랐습니다.
그 왕의 이름은 아포피스(Apophis)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왕은 요셉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왕이 요셉을 애굽 전국의 총리로 임명할 때 신하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왕은 봉건시대의 제왕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총리 임명 같은 중요한 일은 신하들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요셉은 총리로서는 대단히 부적격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방 소수민족 출신이고, 노예이고, 죄수였습니다.
더구나 그의 죄목은 친위대장 부인에 대한 강간미수범이었습니다.  파렴치범이었습니다.
요셉을 총리로 임명할 때 보디발이 시위대장 직책을 그대로 가지고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 자리를 그만 두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펄쩍 뛰면서 ‘폐하,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 반대했었겠지요.
보디발이 그 직책에서 떠나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명분이 있어야 했습니다.
왕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창41: 38)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존재이다. 이 사람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다.’ 한 것입니다.
신하들은 이 말에 설득을 당한 것 같습니다.

요셉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왕은 요셉에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창41: 39~40) 하며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이 말을 줄이면 ‘하나님이 대단하니 하나님이 사랑하는 너도 대단한 사람이다.’ 이렇게 되겠지요.
요셉을 총리로 임명한 왕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를 칠 년 대흉년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 왕이 요셉을 몰랐던 것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을 몰랐던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니, 목사님, 저를 어떻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을 압니다. 잘 압니다.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에 오늘 여기 나와서 그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에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께 예물을 봉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펄쩍 뛰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대강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석구석, 자세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계십니까?

신학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조직신학입니다.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신론(神論)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조직신학의 교과서 안에 누워 계시는, 조직신학자들만의 하나님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아신다면 그 하나님을 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면서 하나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안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기한 일을 보면 그거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에 나오는 복두(幞頭)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알게 된 놀랍고 신기한 사실,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의 귀를 닮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니까 병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실컷 외치니까 병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은 임금님이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보다 더 신기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요셉 당시의 애굽 왕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도 요셉이 하나님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요셉을 불러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창41: 15) 하니까 요셉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창세기 41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바로가 자기의 꿈을 말하니까 요셉은 그 꿈을 풀어주면서,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창41: 25~32).
그것 때문에 그 바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총리로 임명해서 7년 흉작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모세와 아론도 그 때의 바로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바로는 듣지 않았네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이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입니다.

1985년경부터 선교 전문가들이 ‘주후 2000년이 되기까지 세계 모든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하는 운동을 벌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후 2000년 운동(AD 2000 Movement)라고 부릅니다.
그 때 그 분들이 한 말이 ’듣고 믿든지, 믿지 않든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다만 복음을 듣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도록 모든 방법을, 집회, 방송, 영화. 서적,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전하자!‘고 했습니다.
이 ’주후 2000년 운동‘은 세계선교의 역사에서 아주 의미 있는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힘써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새 왕처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새 왕이 요셉을 몰랐다는 것은 자기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의 일은 아득한 고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삼백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몰랐다는 것은 이 새 왕이 왕이 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오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나갈 길도 바르게 알지 못하게 됩니다.
요즘 자기가 있는 곳을 알고, 찾아갈 곳으로 가는 길을 알기 위해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 오는 손님들에게 ‘약도 보내드릴까요?’ 하면 ‘아니요, 네비게이션 보고 찾아가면 되요.’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네비게이션, 참 세밀하고 편리하지요.
역사는 더 정밀한 네비게이션입니다.

선교사 후보생들을 가르칠 때 제가 힘쓰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 나라 기독교의 역사, 선교의 역사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우물을 팔 때 조금 파다가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다른 곳을 파고 그러면 물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앞에서 파던 곳을 계속해서 파내려 가면 얼마 있지 않아 물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고 하지 않습니까?
몽골단기선교팀, 몽골 기독교의 역사를 알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에 파송예배 드릴 때 아주 조금 말씀드릴 것입니다.

내년이 중국 선교 2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807년 9월 4일, 로버트 모리손(Robert Morrison)이라는 영국 선교사가 광동성 마카오에 상륙했습니다.
이것이 중국 개신교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지난 4월에 중국에 가서 중국인 목사님, 재중동포 목사님, 선교사들을 여러분 만났는데 이것을 아는 분이 없었습니다. 
꼭 한 분이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인가 들을 것 같습니다.’ 하더군요.

저는 이번 주간 수요일에서 토요일까지 북한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해외여행 할 때 얻는 소득의 하나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타는 시간에 책을 읽기 좋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행하는 곳과 관계있는 책을 읽으면 현장감이 있어서 더 잘 기억됩니다.
이번에는 중국 심양으로 가서 거기에서 북한의 고려항공을 갈아타고 들어가는데 무슨 책을 가지고 갈까 하다가 아까 말씀드린 로버트 모리손 선교사의 전기를 읽으려고 서가에서 꺼내 놓았습니다.
총신대 조훈 교수가 쓴 「중국에 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서 로버트 모리손」이라는 책입니다.

한 권쯤 더 읽을 수 있겠는데 어느 책을 가지고 갈까, 이번에 가는 곳은 숙천(肅川)이라고 북한이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하기 위해 힘쓰는 곳인데 청천강 하류에 있습니다.
청천강, 을지문덕 장군 이야기를 사서 가지고갈까 하다가 내년이 평양 대부흥운동 100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생각해서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쓴 「평양대부흥운동」이라는 책이 좋겠다고 여겨져서 역시 서가에서 꺼내 놓았습니다.

우리는 특히 어려웠던 때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주일 저녁 예배 마치고 집에 가면 KBS 1TV에서 ‘서울 1945년’ 라는 드라마 중간부분을 방영하는 시간이 됩니다.
북한에 유리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해서 말썽이 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보면 수준이 그렇게 높은 드라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6․25때 장면들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 그 때 고생 참 많이 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6․25 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고 용산 삼각지에 살았었습니다.
3, 4년 전, 심방을 하다가 1남선교회 회원인 권사님 한 분이 그 때 같은 동네에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그 때 중학교 3학년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때 이야기를 실컷 했습니다.
결론은 ‘아, 그 때 참 살벌했었지요. 너무 고생스러웠었지요.’  이었습니다.
그 동네, 용산전화국 뒤편에 절이 하나 있는데 6․25 때 인민재판을 거기에서 했습니다.
저는 어른이 된 다음에도 그 절 앞은 피해 다녔습니다.
지금 그런 것들을 얼마나 기억하십니까?
그런 고난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얼마나 우리의 삶에 살리고 있습니까?

열흘 전쯤에 육군방공학교에 가서 안보특별종교강연을 했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부 출신인 송광근 목사님이 그 부대의 군목으로 아주 의젓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교육대상은 논산훈련소에서 기본군사훈련을 마치고 방공 병과를 받은 신병들입니다.
오후 3시 반부터 90분 강연이라고 합니다. ‘이거 야단났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세요?
7월 중순의 오후 3시, 제일 졸린 시간입니다. 또 배가 출출해질 때입니다.

6․25때 이야기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부대가 조치원에서 대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6․25 때 대전이 함락된 날이 바로 그 무렵, 7월 20일입니다.
그 이야기도 하고 ‘녹음의 계절 중동부 전선에서’라는 시도 가지고 가서 병사 한 명을 지목해서 읽게도 하고 열심히 강연했습니다. 아무래도 잘 듣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설교 시간에 성도들이 이렇게 집중해서 열심히 듣는 것이 참 감사하게 여겨졌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니까 송광근 군목이 ‘그래도 목사님 강연은 열심히 들은 편입니다.’ 하더군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기억은 너를 자유롭게 하고 망각은 너를 다시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민족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고난당하던 일을 잊어버리면 그런 고난을 다시 겪는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 비슷한 건물의 입구에도 이 말을 새겨놓았습니다.

역사를 알기 위해 힘쓸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니까 말입니다.
특히 어려웠을 때의 역사를 알게 될 때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 우리나라, 나, 그리고 우리 교회의 역사를 기억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만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자기를 도와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요셉이 애굽의 7년 대흉작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으면 애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근을 피해 애굽에 와서 처음에는 요셉 덕분에 대접을 잘 받다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 왕 때 노예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요셉이 애굽의 흉작 문제를 지혜롭게 극복해 주지 않았다면  애굽도 그런 일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은 애굽 국난극복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왕은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원수는 물에 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는데 애굽은 반대로 은혜를 물에 써서 흘려보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도와준 사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에게 전도한 분들이 있지요?
그 분이 이 교회에 계시면 오늘 예배 끝나면 카페로 모시고 가서 차 대접하면서 고맙다고 인사하세요.
다른 곳에 계시면 감사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교회학교 학생이었을 때 가르쳐주신 교사에게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의 자녀를 맡아서 가르치고 있는 교회학교 교사에게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교회학교 각 부서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있었는데 교사들, 수고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학생들과 숙식을 같이 해 가면서 헌신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치열하게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부산에 가면 남구 대연동에 UN 묘지가 있습니다.
6․25 때 참전했다가 전사한 장병들 가운데 처음에는 16개국 1만 천 명의 유해를 안장했다가 본국으로 이장하기도 하여 지금은 11개국 장병 2,300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 묘지의 묘비들에는 그 사람이 몇 살에 전사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스무 살을 갓 넘은 꽃다운 나이입니다.

요즘 터키 관광을 많이 가시지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 성경에 갈라디아라고 나오는 이 곳에는 한국공원이 있습니다.
6․25 때 참전했다가 전사한 터키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만든 공원이라고 합니다.
6․25 때 이들은 배를 타고 한 달 걸려 한국에 왔다고 합니다.
외국에 가면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런 것을 그 나라 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아서 수첩에 적어놓고 필요한 때 쓰는 것이 좋습니다.

터키말로 ‘고맙습니다.’를 ‘싸올’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한국공원을 방문했을 때 추모비 앞에서 수첩을 꺼내들고 ‘싸올’을 연발했습니다. 
이 나라는 그와 같은 귀한 희생들 위에서 오늘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지금 세계에서 제일의 복지국가는 덴마크입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 덴마크는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864년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연합군에게 패배해서 국토의 많은 부분을 빼앗겼습니다.
그때 그룬트비히(Grundtvig) 목사님과 공병장교 출신인 달가스(Dalgas)의 지도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달가스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하면서 대대적인 나무심기 운동을 했습니다.
달가스는 단순히 나무만 심어준 것이 아니고 실의와 좌절의 수렁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푸른 의욕을 심어주었습니다.

어떤 분이 덴마크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쓴 글을 보니까 덴마크의 복지정책도 인상적이었지만 그와 함께  사람들이  나라를 어려움에서 건진 그룬트비히 목사님과 달가스를 잊지 않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 것이 더 인상 깊었다고 했습니다.

이 새 왕은 마땅히 알아야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잔인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왕을 대단히 미워할 것입니다.
시편 105편 25절에서는 애굽의 왕이 이런 정책을 쓴 것을 교활하게 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도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이런 것을 역시 교활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인 사도행전 7장에서 18절과 19절을 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새 왕은 이와 같이 교활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교활하다.’ 이것은 욕 가운데에서도 대단한 욕입니다.

이 새 왕이 요셉을 알고, 요셉의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알고, 특히 어려웠을 때 역사를 알고, 어려웠을 때 도와준 사람을 알았다면 여러 가지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애굽 왕이 이 때 박해정책을 쓰지 않고 오히려 우대정책을 썼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애굽에 동화되었을 지도 모룹니다.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고 햇볕이니까요.
다만 이 세상에는 햇볕을 아무리 많이 쪼여주어도 외투를 벗지 않는 나라도 있기는 합니다.
어느 나라인지는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 왕이 누구냐,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아무도 라암셋 1세(RaamsesⅠ) 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1절을 보면 이 왕이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다고 했는데 라암셋은 자기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세티(SetiⅠ)세가 애굽을 다스렸고,  그 다음 왕인 라암셋 2세 때 출애굽이 이뤄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이 왕, 영화 ‘십계’에서 율부린너가 배역을 맡았던 그 왕은 하나님을 더 몰랐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의 존재는 알았겠지요.
그러나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능력 있는 존재인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수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들을 겪었습니까?
열 가지 재앙을 겪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물 폭탄을 맞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때 애굽은 개구리 폭탄, 이 폭탄, 파리 폭탄, 악성 종기 폭탄, 우박 폭탄, 메뚜기 폭탄, 흑암 폭탄, 여러 종류의 폭탄을 맞았습니다.
나중에는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이 죽는 참극을 겪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장자도 죽었습니다(출 12: 29).

그 때의 바로는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일단 놓아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잡아오기 위해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고 병력을 동원해서 추격하다가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홍해에서 죽는 일을 겪었습니다.
엄청난 국력손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일을 겪습니다.
이 나라도 하나님이 이 나라를 이끌어 오셨고 수많은 위기에서 건져주셨던 것을 잊고 있기에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고 계속해서 그렇다면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처음에는 ‘우리는 알지 못하지 맙시다’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어색한 것 같아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깊이,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체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
알았다는 증거로 그 하나님을 힘써 전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합니다.
특별히 어려웠을 때의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를 알고, 어려웠을 때 우리를 건져주신 손길을 아는 가운데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도와준 사람의 고마움을 알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지혜를 얻고, 하나님을 더욱 잘 믿고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 인도, 사랑을 더욱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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