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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왜 회개입니까? (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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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1:5-10
제 목 : 하나님 왜 회개입니까?

현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영국의 어떤 심리학자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죄책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신의 죄나 죄책이라는 말앞에 반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점점 죄라는 말이나 회개하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갖고 있으면서 죄에 대해서 너무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죄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처럼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의 중간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구원받지 않는 상태에서 불완전한 구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 이미와 아직의 중간지대에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지배를 피할 수 없는 연약함들이 우리 모두에 있습니다.

이미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이런 죄의 문제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또 베드로와 바울조차도 이런 죄의 문제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매일같이 삶을 사는 시간만큼 우리는 죄 앞에 완전한 사람은 없는 자신의 부족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에게는 두종류의 죄가 있는데 원죄와 자범죄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을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원죄와 자범죄 모두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살면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런 날마다 우리가 짓는 죄문제와 관련하여 잘못된 해결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관련없이 죄에서 완전하다고 믿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은혜교회라고 하는 구원파의 주장입니다.보통 구원파는 구원의 확신을 날짜,시간을 확인하는데서 갖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의 날짜 시간을 알아야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욱 우리가 문제되는 것은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죄사함을 받았으니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삶 속에서 죄지을 수 있고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죄를 교회가 용서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카톨릭의 경우 오직 카톨릭교회는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주교와 사제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는 고해성사를 행합니다. 모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죄를 용서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에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서 신부 앞에 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고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분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죄문제를 처리할 수 잇는 분명한 해결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오늘 본문에서 성도는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1.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의 거룩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 광채를 발하시면서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 모든 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빛의 특징은 모든 것을 노출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둡던 집안에 창문을 통해서 빛이 들어오면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얼마나 잘 보입니까? 그 비추는 빛 앞에 깨끗하게 보이던 방안도 얼마나 더러운지 다 보이게 됩니다.그 더러운 먼지를 보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빨리 걸레를 빨아서 더러운 곳을 청소할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그곳이 더러운지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을때까지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의로울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착각 할 수있습니다. 그런데 빛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험하면 얼마나 우리 자신들이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에서 빛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더러움을 철저하게 인정하게 됩니다. 출3장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꼭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자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성전에 하나님께서 빛으로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행9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빛으로 사울에게 나타났습니다.홀연히 빛으로 나타나서 사울을 둘러 빛추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반대하던 자였습니다.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체험하자 결국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었습니다. 빛되신 하나님은 속일 수도 없고 그 빛 앞에서는 거짓을 범할 수 없습니다.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조그마한 죄도 그냥 무시하고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모든 죄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둠의 작은 죄가 허용되어지면 점점 우리 마음 속에 전염되어집니다. 우리가 겪는 질병의 문제를 보십시오.항상 그 시작은 작은 바이러스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너무 미세하여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병균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결국 큰 병을 가져오고 그 질병은 우리의 몸 전체를 마비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죄의 문제부터 민감하게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작은 죄를 그냥 허용하는 것은 내 몸안에 병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빨리 그 죄를 빛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고 해결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문제를 잘못 해결하는 우리들의 몇가지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그 남편을 죽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그 죄를 은밀하게 저질렀고 그것을 숨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누구도 다윗의 죄를 몰랐습니다. 다윗은 은밀하게 우리아의 아내를 침실로 불러들여 죄를 지었고 은밀하게 그 남편을 전쟁터의 선봉에 서게 하여서 적의 공격 앞에 죽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은밀하게 완전범죄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의 양심과 또 하나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많은 사람들의 범죄에는 그냥 허용하실지 모르지만 자기 백성 자기가 쓰는 일꾼의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단선지자를 동원시켜 다윗의 죄를 폭로하게 합니다. 죄는 숨김으로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빛되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음 죄를 지었을 경우에 전가하는 경우입니다.
내가 범죄하고 나서 그것을 남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경우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하나님이 ‘너 왜 선악과 열매를 먹었느냐’ “왜 불순종했느냐”추궁하셧습니다. 그러자 아담은 ‘당신이 나와 함께 한 저 여자 때문입니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뱀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면서 자신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 중에서 자기와 같은 잘못을 남에게서 보게 될 때에 그 이웃을 지나치도록 잔인하게 비판합니다. 또 그 반대로 내가 잘못한 것과 비슷한 잘못을 다른 사람이 범하면 자기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상대방에게는 얼마나 잔인하게 대하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간음하던 여인이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저런 여자는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하면서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꼭 같은 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쳐라”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현장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책임 내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가하면 죄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또 잘못된 방법은 자기 합리화입니다.
“내가 잘못하기야 했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꼭같이 실수하고 잘못하는 거야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는데” .그래서 자기의 잘못을 가볍게 여겨 그 잘못과 죄책에서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합리화는 죄를 허용하는 잘못된 죄의 해결방법입니다.

빛되신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정직하게 죄의 문제를 내놓고 순결하고 정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인간적인 해결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정결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 사귈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오직 우리가 빛가운데 있을 때만이 사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죄가 있으면서도 죄가 없는 것처럼 꾸미는 거짓말을 싫어하십니다.
내가 죄가 있으면서도 죄가 없는척 속이고 회개하지 않은채 죄없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 하나님은 그 자리에 임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자기 백성들이 그런 거짓의 죄를 계속 짓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약 250만명이 가나안을 향해 나갈 때 여리고성에서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죄를 보셨습니다. 여리고성 싸움에서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여리고성에서 승리하고 난 노획물 중에서 금과 은과 외투한벌을 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햇는데 한 사람이 거짓말하고 그 죄를 숨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가 작은 아이성의 싸움에 실패하게 만드십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당황하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아간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지 않았습니다. 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문제를 처리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결국 아간의 죄인임을 알고 깨끗하게 해결합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도전하여 아이성의 싸움에 승리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하지 않는 죄문제를 갖고는 결코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는 사건들을 보여주고 우리가 아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아간이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까 ? 우선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세겔과 오십세갤중의 금덩이”를 보았습니다.‘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고 결국 타락의 길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지붕에서 보지 말아야 할 풍경을 보고 죄악 속에 빠졌습니다.사탄은 모든 사람들을 보는 것을 통해 미혹하려고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겟다고 했습니다
여기 아간은 보고 나자 마음에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아름다운 외투를 보자 탐심이 일어났습니다. 큰 은덩이를 보자 마름에 탐심이 생겼습니다. 많은 금덩이를 보자 소유하고 싶은 마음의 욕심이 일어난 것입니다.여러분 우리의 조상 하와는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다고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 육신은 우리 속에 여전히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풀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 것입니다.그 밭에 심지도 않는 풀들이 날마다 얼마나 나옵니까? 매일 뽑아주고 약을 쳐주어도 또 생기고 또 자랍니다. 여러분 사람의 마음밭도 그렇습니다. 죄는 항상 행동하고 있으며,죄는 항상 잉태하고 있으면,죄는 항상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죄를 그냥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은 결국 그 죄가 충만하게 차버리게 되고 결국 보는 대로 듣는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때마다 그 죄를 십자가의 피에 의지하여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면서 깊은 만남을 갖도록 임재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고 고치고 새롭게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그 말씀이 나를 비쳐줍니다. 진정한 성도는 말씀에 나를 비추어 나의 더러운 것과 추한 것, 병든 것들을 말씀을 따라 바로잡습니다.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더욱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풍성하게 사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더 깊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3.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8절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절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께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먼저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없는 자‘라고 합니다.
이미 요한일서는 이미 믿는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요 진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말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난 뒤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초대교회에 많은 교회들이 이 죄를 지었습니다. 요기 요한일서를 받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바로 믿어보려고 바로 살아보려고 하지만 알게 모르게 연약하여서 실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얼마나 실패를 많이 했습니까?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실패를 했습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대해 실패한 우리를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거나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을 때 “자백”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자백이란 본래 두 개의 단어가 합한 복합어입니다.
“무엇무엇과 함께” 라는 전치사와 “말한다”는 동사의 결합어입니다.
그러면서 이 자백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첫째 “누구누구와 함께”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수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수준에서 보면 “저 사람도 죄를 지었는데 나라도 별수 있나”라고 하면 결국 죄가 합리화됩니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나님이 내 잘못을 어떻게 말하는가?”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 우리는 죄를 자백하는 동기가 생깁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이 죄를 버리고 포기한다는 행동을 수반해야 합니다.

자백이란 단순히 입술로만 잘못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이 죄를 떠납니다 더 이상 우리 하나님을 슬프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빛이신 하나님을 내가 불편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이 죄를 포기합니다“라는 것이 자백입니다. 자백은 나의 소원 나의 의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소원을 따를때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첫째는 미쁘시고 둘째는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언제나 구약성경에서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중에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아십니다”“주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아십니다”“주께서는 우리의 단점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로 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쁜 아니라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불의함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불의를 보면 반드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처벌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대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허물과 불의를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위대한 용서를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 놀라우신 용서를 한번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앞에 자백하면서 나아갈 때 그 놀라운 십자가의 용서를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믿음으로 주님께 자백하면 우리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용서한 죄를 내가 스스로 죄책감에 쌓여서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정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서를 읽다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깨닫고 난 뒤에도 자꾸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하루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사단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범한 모든 죄를 쓰기 시작합니다. 죄를 조목조목쓰면서 “네가 이러고도 용서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계속 죄를 열거합니다. 이때 갑자기 자기가 본 성경구절이 생각 났습니다.

바로 요한일서 1장 7절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번민케하던 죄를 향해서 사용하자마자 마귀가 떠납니다. 그리고 루터가 갑자기 소스라쳐 깨어났습니다. 루터는 그날 일기속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나는 이제 깨끗함을 느낀다”.그리고 자유한 마음으로 일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자유 이 담대함 이 용서 이 행복을 여러분은 체험하셨습니까?
저는 이시간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진정으로 여러분은 자백하셨습니까?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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