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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즐거운 교환 (갈 2:16-21, 갈 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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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즐거운 교환                 

  남자들이 제일 신나하고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 셋이 있다지요. 첫째 군대 얘기, 둘째 축구 얘기, 셋째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랍니다.

  남자들만이 살았던 군대 생활엔 많은 추억거리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용돈을 많이 갖다 쓰는 졸병이 있으면 고참들이 심부름을 시킵니다. 라면 사와라, 빵 사와라 - 그런데 그냥 사오라고 하면 강탈이 되니까 천원짜리 한 장을 줍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라면 다섯 개, 빵 다섯 개 사오고 2천원 남겨 와." 이런 엉터리 교환법이 통하는 곳이 옛날 군대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보다 더 터무니 없는 엉터리 교환의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갖다 주고 온갖 복으로 바꿔오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영원이 바뀌는 곳입니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즐거운 교환"(fr hlicher Wechsel)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의 저주가 하늘 복으로 교환된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성도들의 "즐거운 교환" 장소입니다.
· 우리는 그 분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가 용서를 안고 돌아갑니다.
· 상처를 가지고 나아가 치유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부요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유함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염려를 가지고 나아가 평강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존감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영벌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영생을 얻어가게 됩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교환입니까? 이 얼마나 행복한 교환입니까?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지요. 혹시 돈 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 지폐로 가득차 있지나 않은지, 혹은 밀가루 탄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입니다. 그러다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있으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깁니다. 모두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교환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참 이해할 수 없는 교환을 하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란 모조리 "쓰레기"들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십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시거나 짜증을 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다 받아주시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곤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은 참 이상한 교환을 즐기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즐겁고 하나님도 즐거우신 "즐거운 교환"입니다.

  고난절기를 보내고 부활절을 기다리며 참으로 즐거운 교환을 시도하고 즐거운 교환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운 교환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몸과 가슴 그리고 삶의 환경속에 남아 있는 모든 저주를 주께 가져가 천국 복으로 교환해 보십시다. 이 땅의 모든 상처 입은 가정들이 즐거운 교환의 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이 고난주간 멀어졌던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 관계들이 온전하게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갈등을 빚고 있는 교회들, 분쟁 중에 있는 교회들, 분열된 교회들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화해하고 하나 되었다는 소식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로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돌아오고 목회자들의 영성과 리더십이 회복되고 교회들마다 예배의 영광이 회복되는 소식으로 이 땅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우리민족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한일 양국이 '독도 영유권'을 놓고 날카로운 예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제정으로 한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한일 국교수교 40주년 기념의 해에 자행된 "제2의 침탈행위"로 양국간 갈등의 골이 더 깊게 패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한일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남북간의 문제, 통일의 문제, 북한의 핵의 문제까지 회복되어 이 땅에 자유와 희망이 선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I. 세상 종교와 생명의 기독교

  자! 우리가 어떻게 즐거운 교환, 이토록 행복한 신적교환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밖에서부터 안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둘째는 정반대로 안으로부터 밖으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런점에서 기독교가 종교라면 세상 모든 종교는 종교일 수가 없는 것이며 만약 세상 종교들이 종교라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이 조금씩 행위를 고쳐나가고 선행을 쌓아 가다보면 의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병든 가지를 짤라주고 시든 꽃도 따주고 하다보면 나무가 건강해 진다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고행도 하고 깊은 묵상도 하고 종교에 심취하다보면 어느날 도를 깨달은 부처가 되고 유교의 하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철학이 기독교 안에서도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계명을 지켜 나감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에 이르고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이해하려는 사람 - 소위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지치기로 병든 나무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뿌리입니다. 뿌리를 치료하고 뿌리를 바꾸어 줄 때 나무는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갈라디아서 2:16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 대명사가 3번 나오는데 "사람이"라고 시작했다가 "우리도" "우리가"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입니다. 그리고 이 한절 말씀속에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을 3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너희 힘으로 저주를 물리칠 수 없다. 너희 노력으로 복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율법지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지요.

  한국 천주교 지도자 가운데 윤 모 신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천주교의 연옥교리를 변증하는 글에 서창제라는 개신교 교인이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윤 신부에게 고백한 내용이 나옵니다.

  서씨가 개신교로부터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천주교의 교리들 중 가장 만족이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서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연옥교리입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자문자답해 보았습니다. 지옥 갈 만한 죄악은 물론 없지만 내가 천당 갈 것인가 물으면 양심의 대답은 '노(No)'였습니다. '너같이 게으르고 불평 많고 종종 남을 미워하고 흉보고 시기하는 것이 어떻게 천당에 가겠다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갈 곳은 지옥밖에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천주교에 개종하여 천당도 지옥도 아닌 거시서 덕을 쌓아 천당 간다는 연옥교리를 알고 나니, 이제 저 크나큰 인생의 난제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얼른 듣기엔 신앙이 진실하고 겸손한 인품에서 나온 고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독교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적 생각입니다. "눈을 감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니 천국 갈 확신이 없었다." 기독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눈을 부릅 뜨고 성경의 약속을 바라보는 종교입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지옥갈 만한 죄악은 물론 없고"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입니까? 기독교는 자기가 자신을 판단하여 의롭고 안의롭고를 결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 "그러면 내가 천당 갈 것인가 물으면 양심의 대답은 '노'였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생각입니까?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판단입니까? 성경적 기독교는 내 양심의 대답이 천 번, 만 번, 억만 번 '노(No)' 하더라도 예수께서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말씀하시면 그 죄는 사라집니다. 그때 "아멘 믿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겁니다. 할렐루야.

III. 먼저 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라

  어떻게 우리가 즐거운 교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시대는 썩고 역사는 병들고 백성들은 망하게 생겼는데 자신만 의로운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상중에 깨달았습니다. "내가 쌓은 의란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이구나." 여기 더러운 옷이란 부상병의 피고름을 감싸고 있던 냄새나는 붕대를 말합니다. 타락한 남편, 방탕한 자식을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의 부족함, 옹졸한 가슴, 변화되지 못한 성품의 못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가정이 회복되는 겁니다.

  이사야는 어느날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사회가 너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회를 고쳐주세요'하고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이사야가 자기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 주여, 나는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입술을 가립니다. 왜요? 그 당시 전통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성한 사람을 만났을 때, 입술을 가리며 '나는 부정하다' 소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한 사람이 그를 돌로 쳐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회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였구나, 가정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였구나,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나병환자 같은 죄인입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정결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강물로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구조대원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합니다. 그제야 구조대원이 물에 뛰어들어가서 그를 건져냅니다.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소?" 구조대원은 말합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에 물에 들어가면 나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손을 들어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다음에야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버둥버둥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스스로 의롭게 해보겠다며 자기 노력과 자기 의지로 백 번을 맹세하고 손을 자르고 해본들 될 일이 아니예요. 혈서를 쓴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 노력까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길이요, 의의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이것은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의를 수용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수용합니다. 그 거룩한 능력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거기서 바로 즐거운 교환은 시작되는 겁니다.

IV. 십자가를 통해서 내 저주를 담당하시고 나를 복되게 하신 사실을 받아 들여라

  주려 죽게된 자신, 저주의 물에 빠져 망하게 된 자신의 실존을 발견했으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그 신적교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저주받은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기준이 없으면 잘못도 없고 정답이 없으면 오답도 없고 과녁이 없으면 오발탄도 없는 거지요. 인생의 정답을 주신 이유는 지금 내 상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육체적 저주, 정신적 저주, 영적 저주, 환경적 저주, 물질적 저주에 빠진 너는 희망이 없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율법은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 죄를 담당하고 내가 져야할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거기서 "다 이루었다. 다 갚았다" 말씀하시며 내가 감당해야 할 형벌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한 절 속에 "저주"란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왜 그냥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고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굳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합니까? 여기에 배경이 있습니다. 그냥 살다 죽으면 땅에 묻지요. 그러나 율법을 범하고 저주받아 죽으면 돌로 치고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내가 저주를 짊어지고 돌에 맞아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받아 들여야 즐거운 교환이 내게 일어납니다.

  본문 2:19-20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내 저주도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날 때 내 의도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하나님, 저 김 아무개 성도를 저주하셔야 합니다. 저주의 구렁텅이에 그냥 버려두셔야 합니다. 저가 자신의 죄와 허물로 저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변호하십니다. "아닙니다. 저희 저주를 내가 다 담당했습니다. 저가 나를 믿고 이 즐거운 교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제가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선언하십니다. "다시 정죄함이 없으리라" "다시는 저주가 없으리라!"

  받아들이세요. 아멘하고 수용하세요. 즐거운 교환을 당당히 받아들이세요!

  오 주여, 이 신나는 교환이 제게 일어났음을 믿습니다!

  성경에 제일 뻔뻔스러운 한 사람이 나옵니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준다 해서 떡하니 잔치상을 받아먹는 그 아들을 좀 보세요. 얼마나 뻔뻔 스럽습니까? 형이 투덜거릴만도 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영접해 주니까 그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염치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영원히 죽을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 - 이것을 깨끗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즐거운 교환은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주시겠다는데 나는 의로워질 때까지 받을 수 없다? 이 얼마나 교만한 태도입니까?

  수용! 이것이 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도 즐겁고 아버지도 즐거운 신적 교환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환이요 즐거운 교환입니다.

V. 즐거운 교환을 경험한 사람의 즐거운 사명

  즐거운 교환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행하신 그 교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 즐거운 교환을 경험한 사람들이 당연히 하게 되는 즐거운 사명이 있습니다. 즐거운 교환은 즐거운 사명으로 완성되어집니다.

  즐거운 교환은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뿌리를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이 접붙임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접붙임 이후에 가지가 하는 일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맺는 열매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품의 열매요 다른 하나는 사역의 열매입니다. 여기 성품의 열매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즐거운 교환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열매란 이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오늘 본문에서는 늘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는 어떤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산다"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즐거운 교환을 맛보았으면 그대로 산다는 겁니다. 그 복된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잘 18절 후반부에서 19절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여기서도 세 번씩 반복되어 나오는 "화목"이란 말은 원문에서 "교환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교환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교환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즐거운 교환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즐거운 교환의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상처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 저주에 눌려 살아가는 사람들, 율법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상처를 낫게 하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② 그분께 나아와 당신의 짐을 맡기고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십시요.

③ 십자가는 당신의 능력입니다. 축복입니다. 즐거운 교환의 장소입니다.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소식입니까? 이 얼마나 즐거운 사명입니까? 이 얼마나 즐거운 직분입니까?

  H.A.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나와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순간에 죄인은 "조건이 있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왕은 그를 석방했습니다.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그 후 역사는 이런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종은 없었다." 평생 여왕의 명예를 높이는 일을 위해 생명을 바쳐 일을 합니다.

  이것이 은혜요 은혜입은 삶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즐거운 교환은 즐거운 사명으로 완성됩니다.

  ·죽음이 영생으로 / ·상처가 치유로
  ·죄책감이 자유함으로 / ·염려가 평강으로
  ·열등감이 자존감으로 / ·우울증이 유쾌함으로
  ·가난이 부요로 / ·위기가 기회로
  ·갈등이 화목으로 / ·저주가 축복으로

  교환되는 즐거운 교환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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