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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의 아들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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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신하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여왕폐하께서 얼마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저에게서 떠나갔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인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우리의 소명을 일컬어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자신에게 위로가 된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4:11). 여기서 '위로'는 대단히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주님이 성령에 대해 말씀하실 때 위로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위로라는 용어는 영어로 '진통제'를 의미합니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에서도 진통제라는 단어는 의학용어입니다. 힘든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보내주신다면 우리 영혼은 언제든지 진통제를 얻은 것과 같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를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람, 사랑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을 사람, 우리의 진가를 알아주고 이해해줄 그런 사람,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위로 중 그 어떤 위로가 이런 사람을 얻는 것과 한 순간이나마 견줄 수 있겠는가?

성경에는 자기의 본명보다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려져 본명이 그로인해 잊혀질 정도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나바로 늘 불려졌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가 얼마나 위로에 능한 사람이었고 그만 보면 위로가 떠올랐으면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바나바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이 되었을까요?

바나바는 엄청난 박해를 감수해야 하는 초대교회 시대의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야하고 잡혀가 고문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믿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형을 당하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속에서 놀라운 기적이 보편화된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로 깨달아지는지라 당연히 믿음을 결단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엄청난 박해를 견뎌내야만 하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성도들 사이를 누비고 돌아다니며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자생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이 그 일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바나바의 그러한 활동은 교회안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도들이 그의 사역으로 인해 큰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상처받고 신음하던 많은 사람들이 치유받고 회복되었으며 영적으로도 강건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교회로 밀려들어와 안디옥교회가 크게 부흥되었습니다.
신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누구나 사도 바울을 꼽습니다.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그런데 그 바울이 바울될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란 사람 때문이었습니다.그의 격려 덕택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바울이 예수를 믿었을 때 아무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교회를 파괴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8:3).그는 스데반을 죽이던 무리의 주동인물이었습니다(사도행전 7:57∼58).이러한 소식을 초대교회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바울이 예수를 믿기는 했지만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를 반길 리 없었습니다.사도행전 9장26절은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라"

아무도 바울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없을 때 바나바가 담대하게 바울을 사람들에게 소개시켰습니다."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사도행전 9:27).또한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하다가 바울을 격려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했습니다.다소에 있는 바울을 격려해서 안디옥교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한 것입니다.원래 바나바란 이름의 뜻은 격려자,위로자입니다.그의 격려 때문에 위대한 사도 바울이 탄생한 것입니다.바울이 위대하지만 바울이 바울되게 한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바나바는 별명처럼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위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위로를 통하여 교회를 견고하게 세워서 부흥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헤의 통로로 귀하게 쓰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강건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위대한 사람뒤에는 위로의 사람이 숨어 있습니다. 목숨 걸고 엘리야를 격려한 사르밧 여인이 있기에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열왕기상 17:8∼16).다윗이 다윗될 수 있게 만든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다윗이 절망의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다윗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다윗이 그로 인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사무엘상 20:1∼3,17).격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격려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내가 격려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을 예수 믿도록 격려해야 합니다.곤궁에,시험에 빠진 사람을 격려해야 합니다.남편과 아내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격려해야 합니다.우리 모두 바나바가 됩시다.

이번에 영국 런던 한인침례교회 수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수양회 첫날 치유수양회를 인도하면서 참 힘들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이 마음을 닫고 잘 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전하여도 튕겨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굳어있는 얼굴을 보며 그리고 억지로 마지 못해 앉아있는 그들을 보며 답답했습니다. 힘이 빠지고 의욕이 꺽이며 빨리 마치고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성령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억지로 사랑하는 마음을 짜내듯하여 말슴으로 격려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마음문이 열려가는 것과 은혜가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받은 은혜를 나누는 시간에 주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간증이 참석자들의 입술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강한 인상을 주는 간증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전도사님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분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의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 몇 년동안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몇 년동안 담임목사님과 교회 중직들과 갈등이 심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기도로 서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가운데 심령은 메말라갔고 심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학간다고 교회를 사임하고 영국으로 도망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에 와서도 그런 두려운 기억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몇 년동안 한 번도 설교를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유수양회를 통해 주님께서 모든 상처를 치유하시고 소명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가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신 큰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그 간증을 듣고 우리 교회를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따듯한 위로가 넘치는 천국과 같은 곳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위로하고 격려하여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곳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싸우고 미워하며 상처를 주고 낙심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그렇게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위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떤 큰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 사람도 교회에 와서 위로와 격려와 성령님의 만져주심 속에 치유받고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끈임없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따뜻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더 위로와 격려가 넘치는 교회로 세워지게 해 달라고 쉬지말고 기도합시다. 우리 자신을 위로의 아들로 삼아주셔서 찢겨진 마음을 어루만져 싸매는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르짖읍시다.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작은 사랑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위로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위로를 받습니까? 고난 속에 위로의 체험을 받은 자의 위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약함, 나의 실패가, 나의 약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가난함이 고통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가 있는 곳에 사막이 오아시로 변합니다. 미움과 질투, 원망과 불평이 있는 곳이 희락과 평강으로 변합니다. 증오가 있는 곳에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위로가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위로가 있는 가정이 평안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위로가 있는 직장이 흥왕합니다. 위로가 있는 기업의 노사가 화합하고 생산성이 올라갑니다.
사람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배우자나 연인을 떠 올릴 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괴롭고 외로울 때 우리 교회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우리교회의 어떤 셀을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나의 모든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창원침례교회에는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보고 싶어하며 달려올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의 공동체로 우리 교회가 기억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문기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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