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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강해 : 이렇게 기도하라(1)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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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이 대체 뭐야?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 따라 교회에 갔는데 다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중얼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외우는지는 몰랐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하늘에 누가 계신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뭐였겠습니까? 나중에 교회에 제대로 나가면서 비로소 그것이 주기도문인 줄 알았지만 사실 교회 처음 나간 제게 뭔가 중얼중얼 외우는 일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교회 나오면 이렇게 뭘 많이 외워야 하는가보다 생각하니 부담도 되고, 또 나는 전혀 모르는데 자기네끼리 뭔가 열심히 외우는 모습을 보며 어쩐지 소외당하는 것 같아 솔직히 썩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갔지요. 만약 그때 누군가 제게 찬송가 맨 앞면을 펼쳐주면서 이것이 주기도문이라고 가르쳐만 주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예배 때 주변에 앉은 사람을 살펴볼 수 있기 바랍니다. 새신자는 있는지, 누가 성경 찬송 안 가져왔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친절이 그 사람의 평생, 아니 영원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들은 기도문은,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교회 제대로 다니면서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다음에 또 궁금한 것이 도대체 '주기도문'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오래 다닌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야, 주기도문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 그런데 제대로 대답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 교회처럼 고등부 교육전도사님이 계셔서 매 주일 예배 마칠 때 축도가 아니라 주기도문으로 마쳤는데 이렇게 매주 외우면서도 도대체 이 '주기도문'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제대로 아는 친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너무나 중요한 기초인데 이 정도야 다들 알겠지 싶지만 막상 물어보면 제대로 모르는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새가족들에게 이런 것들을 차근차근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주기도문'이 무슨 뜻입니까?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기도의 모범

'주기도문'이란 영어로 the Lord's Prayer라는 말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영어로 보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Lord는 '주님'이라는 뜻이니까 '주님의 기도'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기도'가 '주님의 기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주기도문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주님께 전혀 필요 없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4:15).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당시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그냥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이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누구든지 여러분에게 '주기도문'이 뭐냐고 물으면 "주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이다"라고 대답하면 100점짜리 대답입니다. 그래서 6:9에도 예수님이 이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이렇게 기도하니 너희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모범, 오늘 우리 성도들을 위한 기도의 모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이 뭐냐? 다시 한 번 아주 정확하게 정의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이다." 이렇게 말하면 진짜 만점짜리 대답입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유치부 교육전도사를 할 때 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도사님,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우리처럼 기도하지 않아요?" 무슨 뜻인가 싶어 자세히 물어보니 유치부에서는 기도할 때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하지요. "다같이 무릎 꿇고, 눈 감고, 손 모으고, 기도손!" 유치부 선생님들, '기도손'이 뭡니까? 두 손을 모으고 올려서 기도하는 자세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늘 유치부에서 이 '기도손' 자세로 기도하도록 배웠는데 집에 가서 보니 부모님은 '기도손' 안 하고 엄마는 손을 깍지 끼고 기도하고, 아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기도하거든요? 그래서 이 아이가 혼돈이 온 것입니다. 시험 든 것입니다.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저렇게 기도할까? 뭔가 잘못 된 것 같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기도손'은 유치부 어린이들 수준에 맞춰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친 것이지, 어른들에게도 똑같은 자세로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기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수준을 보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고 가르치신 것이지 주님도 그렇게 기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오늘 우리도 반드시 주기도문만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의 기도는 오히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를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 기도의 모범을 주님이 왜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동기가 있을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과 똑같은 주기도문을 기록한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즉 예수님이 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도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은 어렸을 때 부모가 늘 어떤 모습이었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는 늘 싸우는 모습만 기억난다," 혹은 "늘 책 보던 아버지 모습이 기억난다." 하면 자녀도 그 모습을 늘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들에게 늘 기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영향을 받아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늘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봐왔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요청한 것입니다. "주여, 요한(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절) 세례 요한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준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우리한테도 세례 요한처럼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한 것이지요. 이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니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주기도문'은 주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모범이 되는 기도문(祈禱文)이요,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주기도문을 예배마다 혹은 기도회마다 모범 기도문으로 암송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개신교는 기도문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칩니다. 얼마 전 어떤 새신자 한 분이 "목사님, 좀 기도에 대해 배울만한 책이 없을까요?" 하고 물으시기에 기독교서점에서 찾아보았는데 '기도문'이라는 제목의 책이 몇 권 있기는 해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개신교가 기도문을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천주교나 특히 유대교, 서양의 개신교회에 가보면 이 기도문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에 따라 온 교우가 함께 공동으로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이지, 각자 알아서 나름대로 기도하는 일은 오히려 적습니다. 사실 정해진 기도문을 함께 읽다보면 기도란 무엇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고 내 나름대로 기도하는 법도 배우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일을 잘 안합니다. 뭔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입니다. 제 생각에는 우리 교회도 기도를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기도학교'를 몇 주에 걸쳐 개최해서 기도에 대해 상세히 가르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실제적인 기도훈련도 시킬 것입니다.

모범이 왜 필요한가?

그러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도대체 왜 기도에 모범이 필요하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모범이 필요합니다. 왜냐? 잘못된 기도를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라고 해서 다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올바른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 주님은 대표적인 잘못된 기도가 뭔지 말씀하십니다. 5절에는 '외식하는 기도'가 나오고 7절에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주로 유대인들이 기도하던 방법인데 말 그대로 외식(外飾), 겉으로 꾸미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기도의 구체적인 예를 드시는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못된 기도를 하는 가장 많은 사례입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어야만 하는데 많은 사람이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유혹은 저나 우리 모두에게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사람들이 내 기도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은혜를 좀 받을까? 나중에 뭐라고 할까? 그 사람 참 기도 잘 한다고 할까, 아니면 왜 기도를 저 모양으로 하냐고 할까?"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하게 되는데 특히 예배 시간에 회중기도(대표기도라는 말은 엄밀하게 따지면 잘못된 말입니다)를 맡으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머리를 싸매고 기도를 준비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썼다 지웠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기도에 대해 "지금 너는 그 기도를 누구한테 하는 것이냐? 누구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정작 기도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하나님은 사라지고 오직 사람들만 의식하고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기도를 외식하는 기도라고 부르고 이런 외식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기도는 6장 7절에 나오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인데 '중언부언'이란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쓸데없는 말을 하다'는 뜻으로 이런 기도는 주로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입니다. 열왕기상 18:26에 보면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대결할 때 제단에 불을 내려달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불교신자들은 '나무아미타불' 하고 불경을 몇 시간씩, 하루 종일도 외웁니다. 부처 앞에 몇 천 번 허리를 굽혀 절하는 천배, 삼천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불경이라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서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우곤 합니다.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기도, 뜻도 모르면서 무의식적으로 하는 기도, 이것이 중언부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기도를 하지는 않는지요? 무조건 길게만 하면 좋은지 알고 뜻 모를 내용을 중얼거리거나 한 말을 또 하고 계속 반복하면서 마치 주문이나 불경 외우듯 기도하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런 잘못된 기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를 막기 위해 기도의 모범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요즈음에도 보면 교회 안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기도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데 내용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들 들으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설교를 합니다. 이것은 설교처럼 보이지만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설교지, 아무리 설교시간에 해도 사람의 생각을 전하면 설교가 아닙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장로님들이나 안수집사님 중에 기도시간에 목회자를 비난하는 기도를 합니다. 설교로 치면 기도로 되받아 치는 모양이 된 것입니다. 이것 역시 기도가 아닙니다. 왜냐?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참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동원해 멋진 기도를 하지만 전혀 은혜가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기도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 간절한 마음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듣기에 멋진 말만 늘어놓는 말잔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뜻 모를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며 주문처럼 기도합니다. 기도란 상황에 맞아야 하는데 전혀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만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합니다. 여전도회 헌신예배 회중기도를 맡으면 다른 기도도 해야 하지만 당연히 여전도회를 위해 상황에 맞는 기도를 해야지요. 다행히 아직 우리 교회에서 그런 분은 못 보았지만 어떤 분은 여전도회 헌신예배인데 세계 각국을 한 바퀴 돌며 선교사만 위해 기도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다 끝나더군요. 이건 아닙니다. 어떤 이는 기도에 적절하지 않은 표현을 써서 귀에 몹시 거슬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기도지요. 바로 이런 기도가 안 되기 위해 주기도문처럼 기도의 모범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무쪼록 기도의 모범을 잘 택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기도문이 제일 좋은 기도 모범입니다. 주기도문은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우리가 구해야 할 모든 내용을 다 담고 있는 완전한 기도의 샘플입니다. 또 주기도문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좋은 기도의 모범이 참 많습니다. 시편이나 믿음의 조상들의 기도도 좋고,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는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도 좋습니다. 또는 교회에서 목회자나 믿음의 본이 되는 좋은 분을 모범으로 삼거나, 기도에 관한 책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 핵심은 기도를 '많이'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릎으로 들어가는 천국

저는 이번에 주기도문 강해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기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그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또 저는 목사로서 그동안 기도에 대해 얼마나 많이 가르쳤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 기도의 능력이 무엇인지 다시금 배우게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기도는 무엇이다." "기도는 이렇게 해라" 하고 강의하신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기도문을 연구하면서 주님의 강의를 듣고 다시 한 번 기도에 대해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 제 마음속에 기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한 두 해 한 것도 아닌데 기도야 당연히 할 수 있지." 특히 "목사가 기도 잘 하는 것은 당연하지." "목사니까 당연히 성도들보다 기도 잘 한다 소리 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요 교만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인지, 지금까지 내가 해온 기도가 '올바른' 기도였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주님, 제가 정말 제대로 기도한 것입니까?" 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을 수밖에 없더군요.

누가복음 11:1에 보면 제자들은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지 "기도에 대해(about)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도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절대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대한 온갖 이론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특성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았던 제자들도 그래서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한 것이고, 주님도 '기도에 대해'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정말 실제적인 기도,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기도로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은 무릎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겸손히 무릎 꿇어 기도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기도하는 사람들입니까? 정말 기도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며,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찬송가 482장)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이번에 주기도문에 대해 설교하는 동안 무엇보다 저 자신의 기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열심히 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도 이번 설교를 통해 저와 똑같은 축복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기도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내 삶이요, 내 생활이며, 내 호흡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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