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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끼리 화목하라 (살전 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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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끼리 화목하라
본문 : 살전 5:12~15
 
‘화두(話頭)’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야기 화(話), 머리 두(頭), ‘이야기의 말머리’라는 뜻입니다.
올해 감리교회가 화두로 삼고 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올해 감리교회가 제일 강조하고 있는  말,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인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힌트 하나, ‘화’자로 시작합니다.
정답은 ‘화해’입니다.

여자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올해 여자속회공과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화해자로서의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남자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지난 7월에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WMC)가 서울에서 성대하게 열렸었는데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교사들에게 묻습니다.
오늘은 73회 기독교교육진흥주일입니다.
먼저 교사 여러분의 수고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올해 기독교교육진흥주일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보 12면 교회소식 1번으로 올려놓았는데 교회소식이 넘쳐 빠졌습니다. 
올해 기독교교육진흥주일 주제는 ‘아름다운 세상(화해)’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경 스물일곱 권 가운데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성경의 끝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화목과 화해는 같거나 형제쯤 되는 말입니다.
화목은 화해의 결과입니다.

화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5장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욥기 22장 21절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레위기를 본문으로 해서 설교했는데 레위기는 ‘제사규정집’입니다.
제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레위기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보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렇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는 이웃과의 화목입니다.
성도들끼리 화목, 가족과의 화목, 이웃 주민과의 화목, 직장 동료와의 화목, 친구와의 화목을 말합니다.
이웃과의 화목은 ‘나는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는 증거가 됩니다.
이웃과의 화목이 없으면서 ‘나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었습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말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화목은 이웃과의 화목입니다.
특히 성도들끼리의 화목입니다.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데살로니가교회는 화목한 교회였을까요? 화목하지 못한 교회였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치가 빠른 분들은 얼른 ‘화목하지 못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하실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했으니까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해 “너희끼리 서로 화목하라”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런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맞습니까?
저는 데살로니가교회는 화목한 교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데살로니가교회는 화목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교회는 좋은 소문이 널리 퍼진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을 보세요.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화목하지 못하면 좋은 소문이 퍼질 리가 없습니다.
“믿음의 소문”이라고 하였으니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매우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잘 모였고, 기도를 열심히 했고, 말씀을 잘 받아들였고, 봉헌생활에 힘썼고, 경건생활에 힘썼고, 환난을 이겼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화목하지 않으면 좋은 소문이 퍼지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너희끼리 화목하라” 한 것은 ‘계속 화목하라’ ‘더욱 화목하라’ 이런 뜻으로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성도들이 믿음이 좋아서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이 은사가 제일이다.’ ‘아니다, 내가 받은 이 은사가 제일이다.’ 이렇게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에 대해 좋은 소문이 퍼지겠습니까?
아니지요, 반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난거리가 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염려하게 만드는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그런 소식을 듣고 염려하면서 기록한 성경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럴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성령의 은사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데살로니가교회에도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인지 아십니까?
종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금방 다시 오실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지?’하는 질문이 그때 교회 안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곧 오실 터인데 일은 해서 뭐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기록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런 문제에 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본문 앞의 4장 16절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재림의 확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4장 11절에서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하였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데살로니가교회는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하면서 좋은 소문이 널리 퍼지도록 했습니다.

예배당이 아무리 웅장해도, 섬김과 나눔을 열심히 해도, 그 교회의 다른 분야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안에 성도의 화목이 없으면 그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잠언서 17장 1절의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는 말씀은 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어떤 분이 이사를 와서 등록할 교회를 정하기 위해 그 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순방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먼저 알아보는 경우들이 많지만 최종확인은 와서 합니다.
그 분이 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가 참 은혜로웠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도 감동적이었고 찬양대의 찬양도 탁월했습니다.
‘아, 다음 주일에 전 가족이 이 교회에 등록해야 하겠다.’ 작정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차를 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갔는데 그 교회 교인끼리 차를 먼저 빼겠다고 다투고 있습니다.
삿대질을 해 가며 큰소리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 분, 그 교회에 등록했을까요? 등록하지 않았을까요?

제 이야기입니다.
삼십 여 년 전에 수원의 어느 학교 교사가 되어 수원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출석할 교회를 정하기 위해 여러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 큰 길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역사가 깊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여럿 출석하고 있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등록했는지 아십니까?
제일 화목해 보이는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 교회는 골목 안에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사택을 개조해서 예배드리고 있어서 시설은 제일 빈약했습니다.
그래도 화목한 분위기가 좋아서 그 교회에 등록하고 봉사하고, 사랑 받고, 수원에서 떠날 때까지 그렇게 지냈습니다.

아까는 주차장 이야기를 했지만 주차장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끼리끼리만 어울리고, 낯선 성도는 굴러온 돌을 보듯 하고,  심지어는 ‘왕따’ 시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지 않고 사람들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다른 것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화목하지 못하면 헛일이 됩니다.

지금은 그 단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독일에 마리아부흥자매단이라는 신앙공동체가 있습니다. 
이 단체는 20여 년 전에는 한국에서도 출판활동, 방송활동 같은 것을 활발하게 했었습니다.
이 단체는 거기 속한 분들이 수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고, 단체 이름도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 단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신교 단체입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아주 황폐해졌습니다.
거리도 황폐해졌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공허해지고 의욕을 잃었습니다.
바실레아 슈링크라는 분이 ‘지금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 하고서 담스타트라는 곳에 규모가 큰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순전히 여자들의 힘으로 터를 닦고 건물들을 지었습니다.
그 때의 이야기인데 한 건물을 짓기 위해 흙을 나릅니다.
그 때는 불도저나 포클레인 같은 것이 없을 때이어서 땅에 레일을 깔고 구루마에 흙을 담아서 날랐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고가 납니다.
구루마가 탈선을 하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합니다.
사람이 구루마에서 떨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계속해서 사고가 납니다.
바실레아 슈링크 여사는 작업을 중단하도록 하고서 모두 예배처소에 모이게 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결과 서로 간에 불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이것을 회개하면서 화목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업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일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사고도 나지 않았고, 능률이 높아졌습니다.
예정했던 것보다 빠른 기간에 그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화목해야 일이 제대로 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려면 먼저 화목해야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의 말씀, 산상보훈, 잘 아시지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그 다음에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오늘은 오늘 봉헌순서 때 이웃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그것을 먼저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은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예배 분위기가 어수선해집니다.
그 사람이 먼 곳에 있다면 예배 중에 일어나 그렇게 하고 돌아오면  예배가 오래 전에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문자적으로 따르려 하지 마시고 이 설교 순서 다음에 봉헌특송이 있는데 화목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 성도들, 특송을 들으면서 기도하세요.
‘하나님, 그 형제와 화해가 이뤄지게 해 주세요.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다음에 찾아가세요. 
‘우리 화해합시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세요.

지난 주일 저녁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Again 1907 in Mokyang'이라는 주제로 창조의 밤을 했습니다.
'Again 1907 in Mokyang' ‘1907년의 대부흥을 목양교회에 다시 한 번!’ 이런 뜻입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은 회개에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회개하고 일어나 자기가 잘못한 사람, 자기가 손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 갔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배상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특징은 ‘실천적 회개운동’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천적 화목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신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의 말씀을 봅니다.
먼저 18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화목하게 하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를 ‘직분’이라고 합니다.
그것과 함께 우리 모두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았습니다.

이 직분 이름을 그저 알아듣기 쉽게 ‘화목사’라고 하십시다.
여러분, 속으로 ‘나는 화목사이다.’ 해 보세요.
먼저 화목사 직분을 잘 감당해야 좋은 집사이고, 좋은 권사이고, 좋은 장로입니다.
직분이 없는 분들, ‘직분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고 ‘나는 직분 없습니다.’ 하기가 쑥스러우면 ‘나는 화목사입니다.’ 하세요.
‘아니 화목사라는 직분도 있습니까? 나는 그런 직분 이름 처음 듣습니다.’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8절을 펴 보이시기 바랍니다.
‘이 직분은 예수님이 나에게 준 권위 있는 것입니다.’ 하세요.

이어 19절을 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 270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는 엘리자 테일러 카셀(Elijah Taylor Cassel  1849-1930)이라는 목사님이 작사를 했습니다.
이 분은 원래 의사였었는데 60이 넘어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카셀 목사님은 틀림없이 고린도후서 5장 19절의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으니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후렴에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이 말을 넣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이 찬송은 작사자 카셀 목사님의 부인인 플로라 해밀턴  카셀(Flora Hamilton Cassel 1852-1911) 사모가 작곡을 했습니다.

남편이 작사를 하고 부인이 작곡을 했습니다. 부인은 원래 음악대학의 교수였었습니다.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는 부인 최봉춘 권사가 작사를 하고 남편 장수철 박사가 작곡을 했지요.
부부간에 화목해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화목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그 가운데 꼭 소개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절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시기 바랍니다(70쪽).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의 일부이지요.
그 다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아주 창피한 이야기인 데요,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화목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려면 먼저 성경에서 화목에 대한 말씀들을 모두 찾아서 살펴야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이 귀한 말씀을 지금까지 왜 놓쳤을까?’ 
성경을 읽을 때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앞에 있는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이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응, 이거 잘 아는 말씀이야, 통과!’ 해 버린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냥 넘겨버린 귀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먼저 화목을 이루려면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려면 녹아야합니다.
내 체면 다 세우고, 내가 챙길 것 다 챙기고 하면서 화목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체면, 내 이익, 소금처럼 녹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화해합시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화목을 이루려면 여기에서 끝내야 합니다.
‘우리 화해합시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체면을 차리기 위해 ‘그런데‘를 붙이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한쪽이 ‘우리 화해합시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다른 쪽은 ‘아닙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할 때 아름다운 화목이 이뤄집니다.

그 다음에 ‘화목을 이룰 때 비로소 소금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웃과 화목하지도 못한 사람을 빛이라고 할 수 없고 소금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도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빛과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소금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화목을 이루었으면 그 화목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언약을 소금 언약이라고 합니다.
역대하 13장 5절에 하나님이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의 화목은 소금 화목이 되어야합니다.

화해라는 말을 대하면 저는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거의 자동적으로 참 안타까워지고 부끄러워집니다.
8․15 해방 뒤에 우리나라 교회는 심하게 갈라졌습니다.
감리교도 갈라졌고 장로교도 갈라졌습니다.
주로 일제 때 신사참배하고 일본사람들에게 협력한 사람들 편과, 일제 때 핍박 받은 사람들 편으로 갈라졌습니다.
일제 때 핍박 받은 사람들은 신사참배한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신사참배한 사람들은 ‘우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그랬다.’ 변명했습니다.
정죄, 변명, 그 결과가 바로 분열입니다.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분열에 대한 사랑의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것이 6․25입니다.
일은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심한 갈등과 국론분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의견 다툼은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에서 국론이 이렇게 심하게  분열되어 백성들이 상처를 받은 때는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뒷날 역사는 이 책임을 반드시 지금의 대통령에게 물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면서 동시에, 교회가 60여 년 전에 이런 씨앗을 뿌려 놓았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해방 뒤에 신사참배한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여 그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회개하고, 고난 받은 사람들은 ‘우리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우리 다 같이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회개, 용서, 그 다음은 아름다운 화해입니다.
그 때 그렇게 화해의 씨앗을 뿌렸으면 지금 교회의 모습이나, 나라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평가나 교회의 위상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통일도 훨씬 이전에 이뤄졌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선례를 독일교회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재림을 믿는 성도들의 삶, 재림을 앞둔 성도들의 삶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자’
‘지도자들을 잘 섬기자’

본문에서는 지도자들을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12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화목하라” 이것은 지도자와 교인들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끼리 화목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이 말을 들어야합니다.

예수님은 화평 그 자체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보세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강하고 단정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렇게 화목과 관계된 말씀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화평 그 자체, 화평 덩어리, 순수한 화평, 순도 100%의 화평, 진화평(眞和平), 순화평(純和平)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끼리 화목하라”

이 말씀에 따라서 화목에 더욱 힘쓰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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