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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에서 큰 자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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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7장은 예수님이 위대한 스승이심을 보여주는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는 이 고귀한 가르침의 핵심은 전복(顚覆)입니다. 즉 뒤집어놓는 것입니다. 역설입니다. `팔복` 말씀부터 예수님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들을 모조리 뒤집어놓습니다. 가치관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온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갱신하게 합니다. 소금과 빛 비유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의 생각, 가치관을 뒤집어놓으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갱신은 율법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 17절에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고 합니다.
예수 믿고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참 혼동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냐? 고 한다면
    교회는 영적, 도덕적 탁월함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기준이 율법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먼저 예수님과 율법은 어떤 관계인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1. 예수님과 율법은 어떤 관계입니까?(17절)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마5:17절 말씀입니다.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그런데 성경 속에서 의문을 제기하면 성경 속에는 명쾌한 해답이 있으므로
내가 답을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게 없습니다.

예수님과 율법은 어떤 관계인가?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인가?
예수님의 행하심을 지켜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정죄했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 것이나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리면서 부정(不淨)을 자처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듯 행동하시는 것을 보면서
율법에 대해 느슨한 생각이나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는 역설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자칫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율법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질 여지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과 율법의 관계를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란 표현은 구약 전체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모세의 율법만 아니라,
      구약 전체를 완전케 하러 즉 성취 하러 오셨습니다.
롬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는
사도 바울의 증거는 예수님의 전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구약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결론지은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이 증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성했는데
    왜 오늘 우리가 그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말합니다.
         
공작새를 통해 우리 인간의 이중성을 볼 수 있습니다.
공작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앞모습은 너무 멋있지만,
      뒷모습은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공작새는 한 번도 자기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자기의 모습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모습을 아는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나의 모습이라고 인정하십니까?
자식을 삶아먹는 여자가 내 모습이라 인정하시니까?
지금은 그럴 것 같지 않아도 극한 상황이 되고,
    그런 형편과 조건이 되면 그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모습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허락하셨습니다. 
즉 율법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병을 발견하게 하는 의사의 청진기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개인교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가 문화화 되면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미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에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노예제도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컨닝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고 있지를 않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혼율이 60%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모임에 가면 지금 자기 남편에게
    앞에 사람을 전에 같이 살던 남편이라고
    또 전에 같이 살았던 전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 사람들은
    마소 같은 놈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이혼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하는,
      너무나도 일반적인 일이기 때문에
      죄 의식 자체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드라마가 불륜을 로맨틱하게 각색하고
      폭력을 액션물로 각색하니
          그걸 죄의식 없이 문화로 받아드리는 현대인들입니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2.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17절)
17절 다시 봅시다.
[ 내가 율법이나 선자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
이 말씀은 다음부터 나오는 말씀의 머리말입니다.
  이제부터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결론을 미리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들은 흔히 모세의 율법만을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율법이라고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나` 하셨습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법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도덕의 법입니다. 완전한 의식(儀式)의 법입니다.
      인간이 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위의 법입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걷게 하는
    완전한 길잡이가 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결코 폐하여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폐하였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세 가지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의 태도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입니다.
    성경적인 율법관이 아닙니다.
둘째는 무율법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대부분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입장입니다.
    율법은 너무나 완전한 법이기 때문에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율법을 이루시고 폐하셨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에게 구속력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당한 율법관이 아닙니다.
셋째는 자신들을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굳게 믿으면서
    동시에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그 결과로서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맞는 말 같지만 율법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을 폐하는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긍(自矜)한 것은
        인류 최고의 유산인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었습니다.
바울도 말한 바 있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관심은 특심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율법을 지키고 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율법을 버렸다니 될 법한 말입니까?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밝힌 데에는,
구약이 ‘성취를 기다려온 계시’였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구약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향성을 가지고 뭔가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갈3:24절에  사도 바울은
[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 했듯이
그 내다본 것이 ‘그리스도’임을 확실하게 밝혀 주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은 구약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다 이루시러)’ 하러 오셨다는 것은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내포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계시 가운데 없앨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모든 계시가 완전케 됨을 목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강조합니다.
3. 왜 예수님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강조할까요?(18절)
일점일획이란 말은 위의 사실을 극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글자 중에는
      점을 찍은 듯한 모양의 글자가 있는데 (이오타, י), 
      또 획을 그은 듯한 글자가 있다(와우,ו).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글자도 계시 안에서는 자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율법의 한 점이나 획이 떨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약속이 완전히 다 이뤄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문구를 쓰셨습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어떤 랍비도 이런 표현을 쓴 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서명(書名)과도 같은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난 후 7:29절에
[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 고  감탄을 한 것도
이 표현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에 대해 인상이 깊었던 때문입니다.
18절은 예수님께서 친필로 서명하시듯 하신 말씀이기에
    구약에 대한 임의적이고 가벼운 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면,     
예수님은 구약의 가르침, 특히 율법의 계명을
      모조리 지켜야 할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까?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바가 완전한 형태로 성취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칫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천국에서 큰 자라는 말입니다.
4.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가 어떤 자라고 말합니까?(19절)
19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문자 그대로 말한다면
    율법 그대로 철저하게 지키고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율법을 철저하게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면
    우리는 전혀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율법 자체를 ‘행함’으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의 중심에 ‘성막’이 있었던 것도
    구약의 백성들이 결코 율법에만 머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성막을 향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율법을 행했더라도 또 다른 계명이 정죄하며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에 머물러 의(義)를 맛볼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을 행하면 행할수록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있는 성막을 찾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제도를 자세히 보면 나중에 성전도 마찬가지이지만
    성소 안에 등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합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등불이 켜져 있지 아니하면 성막 안이라도 캄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등불이 무엇인냐? 바로 성령의 조명인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그 누구도 율법을 행할 수 없고
                    바로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행함’은 단지 ‘행동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성취된 구약은                 
  더 이상 ‘사람의 행함’을 통해 또 다른 성취를 그 목적으로 가지지 않습니다.
구약의 계명은 그 요구를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계명을 행하려 하는 자에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이 커지며,
    성령이 맺어주시는 열매가 충만하며,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경외심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 20절의 말씀입니다.         
5. 20절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20절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지구상의 어떤 인종도 따라 갈 수 없을 것입니다.
행동으로만 한다면 어떻게 우리들의 의가
    이십 사 시간을 율법의 행함에 매달려 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 30분 기도 하기도 어렵고, 하루 한끼만 굶어도 배고파 못 견디는데
어떻게 일주일에 3번을 금식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형식이지만 율법을 지키는데는
    결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의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할지라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근본 타락한 본성과 인격과 생각이 변화됩니다. 
더 나아가서 속사람이 변화되면 점차적으로 행위로까지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의는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온전한 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인정되어진 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그 의로 덧입혀진 칭의(稱義)의 의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이 행위를 보이려고 애쓰는 의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덧입혀진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이루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의를 가지고선 도저히 그들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8>
하지만 제자들의 의(義)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더 나은 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입니다.
제자들의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의(義)인
      그리스도를 믿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제자들의 ‘행함’의 일순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의(義)가 없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양심적으로,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가지고는 천국이 열리지 않습니다.
율법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
곧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율법을 보면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에 천국은 열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데
      여전히 율법이 내게 걸림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굉장히 햇갈리는 말씀이지요.
어떻게 우리가 서기관 바리새인의 의에 대한 열심에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서기관 바리새인의 의에 대한 열심에는 뭔가 하나가 빠져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도
          실감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어떤 시각 장애인이 친구 집에서 어두운 밤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시각 장애인에게 등불을 들고 가라고 권했습니다.
시각 장애인이 볼멘소리로
    소경에게 등불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대구합니다.
친구가 말합니다.
“등불이 소경에게는 소용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 등불을 보고
    자네를 피해갈 터이니 다칠 염려가 없지 않느냐”고 설명했습니다.
친구의 의도를 이해한 시각장애인이 등불을 들고 길을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급히 오던 사람과 소경이 그만 마주쳤고, 두 사람 모두 넘어졌습니다.
이때 시각 장애인이 화를 내면서 “등불이 보이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마주친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합니다.                  <10>
“등불은 무슨 등불이요? 당신의 등불은 이미 꺼져 있었소!”라고 말입니다.
마치 불 꺼진 등을 들고 가는 소경과 같이
오늘 우리 성도들이 빛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
    성령의 조명의 빛을 잃어버리니
        말씀을 들고 가는 삶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가지고도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대한 열정은 등불이 꺼져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열심히 있다 할지라도
    어두운데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으로 눈이 뜨여진 사람과 게임이 안되지요.
그래서 성령의 은혜 받은 성도의 의가 더 나은 의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한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조명이 비취면 깜깜한데서 찾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한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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