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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만났을 때 (약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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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동행”이라는 월간지 10월 호에 보니, 강영우 박사의 글이 실려있었습니다.

‘서울 맹아학교 중등부 시절, 주말이면 나는 홀로 기숙사 뒷동산에 올라가 이제 거의 보이지않게 된 눈에 힘을 돋우어 별을 찾아 세곤 했다. 친구들은 모두 부모님과 외출한 뒤였다. 축구를 하다 눈을 다친 아들이 곧 시력을 완전히 잃는 다는 진단에 충격 받아 세상을 뜨신 어머니, 학업을 중단하고 식구들 뒷바라지하다 과로로 죽은 누나, 각각 고아원과 남의 집에 보내진 동생들을 떠올리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

  그 후  강영우 학생은 뜻 밖의 후견인을 만나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지금은 미국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의 높은 직위를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예민한 사춘기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고 가족까지 잃고 방황하던 한 젊은이는 이제 마음속에 믿음과 희망을 품고 시련과 싸워 오늘의 승리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종종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오늘 성경에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색깔의 여러 종류의 시험들이 늘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이라고 하면 어떤 분들은 유혹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시련 또는 연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3절에서는 “이는 너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이라는 말은 믿음의 시련이라고 바꿔도 무방한 것입니다. 시험은 곧 시련이고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 시험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시험에 대한 몇가지 전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시험이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시험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시험 치지 않는 학생이 없듯이 인생의 시련을 경험하지 않는 성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고난 앞에 열려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욥기 5장 7절에 보니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인생은 그 많은 고난 속에서, 마치 고난을 위하여 태어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시리아에 전해지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외아들인 한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떠납니다. 이 곳 저 곳을 헤매다가 마침 큰 맹수를 만나서 혈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가까스로 맹수를 제압한 후에 보니 옆에 있던 아들이 없어져 버렸어요. 이산 저산을 헤매면서 어떤 동굴 앞에서 아들을 발견하는데 아들은 이미 맹수에게 물려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정리해서 외롭게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 고통스러운 소식을 아내이게 어떻게 전할까하는 고민은 깊어만 갔습니다. 집에 당도해서 반갑게 맞이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내가 이번 사냥에선 아주 특이한 짐승을 잡았어요. 그런데 이 짐승은 한번도 고난이나 아픔을 경험하지 못한 집에서 그릇을 빌려다가 요리를 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오. 당신이 동네에 나가서 고난이나 아픔을 경험하지 못한 집이 있다면 그릇을 좀 빌려오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부인은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물었습니다. “이 집에 고난이 있었습니까?” “이 집에 아픔이 있었습니까?” 한 집도 없다고 말하는 집이 없었습니다. 결국 부인은 하루 종일 동네를 다 돌아다닌 다음에 빈 손으로 그릇을 빌리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그때서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과 아픔이 우리 가정에도 찾아왔소.”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 앞에 열려있고 언제든지 시험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시험의 강도가 높을수록 축복도 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험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축복도 크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즉, 다양한 색깔의 시험, 재물의 문제, 건강의 문제, 가정의 문제, 다양한 모습으로 옵니다. 그런데 그 시험도 크고 작은 문제들이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시험이 와도 조그만 시험이 오는데, 나는 왜 큰 시험이 오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큰 시험이 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한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험의 크기가 클수록 강도가 높을수록 하나님은 그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살아간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들도 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합니다. 그는 늙어서까지 자녀가 없어서 늘 근심이 되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기근을 만나서 양식을 얻기 위해서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왕자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동의 신세로 40년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는 고독을 되씹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들어서 위대한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40년이 없었다면 영광의 40년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없어서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요셉, 형들보다 더 귀한 옷이 입혀진 요셉이 한 순간에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어떤 집에 노예로 끌려가서 채찍에 맞고 배를 굶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의 세월이 지났을 때 하나님은 그를 들어서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하신것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윗은 늘 생명의 위협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자기를 죽이고자하는 사울왕으로 인해서 한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다리 뻗고 잔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걸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침을 흘리며 광인의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니 하나님이 그를 들어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세워주신 것 입이다.

  시험과 연단이 많을수록 그들은 위대한 삶을 살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나의 가는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내가 그가 나를 달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시련의 용광로 속에 불순한 쇠를 넣어서 불순한 것들을 다 녹여내어 깨끗하고 정결한 금을 만들어 내듯이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이라는 용광로를 통해서 우리 인생을 순수하게 만들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정금같이 가장 고결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조지왕이 한 도자가 공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공장에는 도개의 도자기가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한 도자기는 윤기 나고 생동감이 있고 빛나는 가치있어 보이는 도자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쪽에 있는 도자기는 아주 볼품 없고 투박스럽고 빛이 없는 도자기였습니다. 왕은 묻습니다. "이 두개의 도자기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요?" 관리는 답하기를 "이 두개의 도자기는 똑같은 모습이고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같은 시간에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윤기나고 생동감 있는 도자기는 바로 뜨거운 불에 구워서 마지막 마무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볼품없고 투박한 이 도자기는 뜨거운 불을 통과하지 않은 도자기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불과 같은 시련은 힘들고 고통스런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 영혼은 빛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놀라운 신앙의 유익과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읽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하여 함이라" 아멘.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것입니다. 시련이야말로 우리의 인격이 성장하고 믿음이 성장하는 놀라운 축복과 유익을 우리에게 준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험의 강도가 높을수록 축복도 크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시험에 대해 생각할 것이 있다면 시험을 맞이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이 크든 작든 어떤 종류의 시험이 오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태도로 그 시험을 맞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실보다 태도가 더 중요하다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내 인생에 불청객처럼 찾아온 이 고난을 어떻게 맞이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사무실에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칩시다. 5년 전에 어느 곳에선가 잠깐 본 사람인데 찾아왔다고 하면, 무슨 도움을 얻으러 왔나 하고 무슨 친구 사이도 아니고 잠깐 지나가면서 본 걸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나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바쁘다고 하며 문전박대하고 쫓아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5년 전에 잠깐 바닷가에서 스쳐간 사람인데 여기까지 찾아와 주다니 너무나 고맙다고, 명함한장 교환했을 뿐인데... 귀한분이 오셨다고, 5년 만에 뵈니까 더 좋아보이는것 같다고 자리를 안내해 드리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해드리며 반갑게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우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떤 태도로 맞이 할 것이냐? 시련이라는 불청객을 여러분이 어떻게 맞이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태도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 플러스(+)가 될수도 있고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도 있고 실패로 이끌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조그마한 가구점의 종업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날 따라 초봄이 되었지만 여전히 쌀쌀한 날씨 속에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되어 가구를 정리하고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가구점 앞에 한 연로한 할머니 한 분이 비를 맞고 서 있는 것입니다. 춥고 어두운 시간에 비 맞으면 감기걸리면 안되지 싶고, 또 고향 계시는 어머니도 생각이 났답니다.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할머니, 누굴 기다리시는 모양인데 가구점 안에 들어오셔서 난로도 쬐고 여기 앉았다 가세요. 차도 한잔 드시구요. 혹시 혹시 길을 잃으신거면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하고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데 좋은 차를 탄 한 신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가구점 앞에서 두리번거렸습니다. 할머니는 반색을 하시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고는 그 차를 타고 사라졌습니다.

  몇 일 후 한 신사가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어느 회사의 회장의 비서실장인데, 자기 회사의 회장님 어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여기서 회장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회장님이 급한 일이 생겨 그만 늦어져서 어머니가 추위에 떨고 계셨는데, 이 가구점 직원이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어머니가 너무 고마워하신다는 사연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이번에 새로운 사옥을 지었는데 그 사옥에 들어갈 모든 가구를 이 가구점에서 구입하기로 했다는 회장의 결정 사항을 전했습니다. 그야말로 복이 찾아온 것이지요. 그 가구점 종업원은 얼마 후 큰 가구점 사장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성공과 실패의 지름길이 갈라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늘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시험 앞에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시험을 주십니까?” 이건 누구 때문에 그런 거라고 남을 원망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비관합니다. 시련 앞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고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늘 낙관적으로, 희망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면 좋은걸 거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나쁜 것을 주시는 법이 없잖아. 반드시 결과가 유익할거야. 내가 이런 어려움도 잘 이겨내야지, 믿음이 뭐할 때 쓰는 거야. 이럴 때 필요한거지...” 그렇다면 그에게 그 시련은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그것이 고난이든 축복이든 슬픔이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너희가 고난을 만나거든, 시련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니,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려고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보니,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어린 아이에게 대학생 문제는 내 주지 않으십니다. 고등학생에게 고등학생 정도의 문제를 내 주시는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시험입니다. 그 다음에는 피할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게 얘기해주세요.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십니다.”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실 뿐 아니라 또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시험을 회피하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해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기를 시편 119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태도로 이 시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시험을 맞는 또 하나의 태도가 있다면 시험 앞에 인내해야 합니다.

  3절, 4절 말씀을 읽습니다.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아멘. 

  시험 앞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연단을 통해 우리는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참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내를 배우는 것입니다.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은 공부도 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다 지겨우면 덮어버리면 안되지요. 사업하다가 좀 힘들다고 내팽겨쳐 버리면 사업이 끝납니다. 인간 관계가 좀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사람이 인생의 정상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디모데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기 위해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내입니다.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늘 인내하는 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내하는 사람만이 승리자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등산을 해도 그렇습니다. 정상에 선 그 기쁨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중도에 포기하면 정상에 서는 기쁨과 감격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 정상에 오르면 너무 좋잖아요. 땀도 흘리고 다리도 아프지만 ‘야호!’ 하고 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산 아래 있는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거지요. “저 미친 사람들 봤나, 고생하고 땀흘리고 올라가서 소리는 왜 질러...” 그 자리에 서 보지 못하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내한 사람의 영광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란 시가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기 위해서는 소쩍새도 울고, 먹구름속의 천둥도 쳤습니다. 그 가운데 인내해야만 국화꽃은 아름다운 꽃을 만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소쩍새가 우는 즐거움도 있지만 천둥이 치고 서리가 내리는 괴로운 시기도 있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낸 로릿 배스 존스 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이 책을 정성을 다해서 저술 했습니다. 그리고 출판하고 싶어서 출판사에 갔더니 출판을 다 거절 당했습니다. 뭐 책의 내용이 어떻고 어떻고 트집을 잡으면서 책을 출판하지 않는 겁니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그것을 밤새도록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출판사에 가서 출판을 의뢰해도 또 거절당하고, 또 집에 와서 또 다시 문장을 수정하고 보충을 하며 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차례, 드디어 한 곳에서 가까스로 출판을 했는데 그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인내하지 못했다면 그 영광을 맛볼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을 당할 때 기쁘게 여길뿐 아니라 인내를 배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오늘 성경 우리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아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험 앞에서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만사는 기도를 통해서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무릎 그것은 닫힌 문을 열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이 시련 앞에서 내가 어떻게 이것을 감당해야 할지 몰라요.”할 때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은 너의 길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난 당하는 자에게 기도는 필수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에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고 즐거워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찌니라” 아멘. 여러분이 고난 앞에서 기도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지혜를 구하십시오. "오늘 이 엄청난 일을 해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하나님!” 지혜 있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딛고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농부가 노새를 끌고가다가 한 눈 파는 사이에 그만 노새가 집 앞의 꽤 깊은 우물에 미끄러져 떨어져 버리고 말았답니다. 아마도 우물의 턱이 낮았던 모양입니다. 자, 우물은 깊고 노새가 첨벙거리지만 뭐 끌어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이 우물은 버린 우물이고 노새는 끄집어 낼 수 없으니, 저렇게 죽어가는 모습 보기보다는 흙으로 메꾸어 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흙으로 우물을 매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노새가 가만히 안 있고 계속 몸을 움직이면서 흙을 밟고 서고, 밟고 서고 하는 게 밑에가 다져지는 거예요. 나중에이 노새는 흙이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위로, 위로 올라와서 결국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의 깊은 우물에 빠졌을 때 그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매장 당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살 길을 찾아 부르짖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거기에는 탈출 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징계를 통해서 그에게 유익한 교훈을 주시고 그의 인격을 성숙시켜 주십니다. 로버트 브라우닌 헤밀턴이라는 크리스챤 시인이 있는데 그가 그런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읽어 보면, ‘나는 쾌락과 함께 몇 마일을 걸어갔다 그 쾌락이 떠나간 후에 난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나는 슬픔과 함께 몇 마일을 걸어갔다 나는 슬픔이 떠난 뒤 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쾌락은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떠나고 나면 허무합니다. 그러나 슬픔은 비록 그 당시에는 아픔이지만 지나고 나면 수많은 유익과 감격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시험이 있고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선한 계획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연단을 주시는데 그 연단 앞에서 여러분 깨어있으시고 기도하시고 긍정적인 태도로 맞이함으로써 전화위복의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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