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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4: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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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있는 고정 관념은 절대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여러 행사 중에 사회자 혹은 집례자가 성경과 찬송을 선택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정 관념에 의해서 성경과 찬송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예컨대 찬송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탄절에는 108장에서 126장까지 정해진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헌금 시에는 69장에서 72장까지 불러야 안심이 됩니다. 어린이 주일에는 298장에서 301장까지 만을 불러야 하고 가정의 달에는 쉴 사이 없이 305장만 불러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고정 관념입니다.
장례도 예외는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장례식 때는 공식적으로 4번에 걸쳐 예배를 합니다. 저는 본문에 따른 설교를 장례식 설교 4번 가운데 자주하는 편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고정 관념을 깨고 본문을 주일 설교로 선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이른바 7대 복 중의 하나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조지 수윈록은 "죽음의 제동장치에는 손잡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필연성에 대하여 윌리암 거널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도록 우리의 체내와 본성 속에 죽음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도망하느니 차라리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하는 게 낫다. 벌목꾼을 써서 나무를 자를 필요가 전혀 없다. 나무속에 벌레가 있고, 그 나무속에서 자란 벌레가 그 나무를 죽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 안에 사람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죽음의 본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 안(in christ)에서 죽는 자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라는 원문은 호이 네크로이 호이 엔 퀴리오 아포드네이스콘테스(oiJ nekroi; oiJ ejn kurivw/ ajpoqnhv/skonte")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뿐 아니라 그로 더불어 연합하여 교제하는 생활에 거하다가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 안에서"를 원어(디아 투 예수, dia; tou' !Ihsou')로 직역하면 '예수로 말미암아'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 에스커위드(Askwith)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자들과 부활하신 예수와의 관계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왜 복되다고 했습니까?

Ⅰ.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기록하라"는 것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복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기록의 의미는 ① 사실에 대한 정확성을 위함입니다. ② 사실에 대한 역사성을 위함입니다. ③ 사실에 대한 미래의 정확한 고지성(告知性)을 위함입니다. ④ 사실에 대한 투명성을 위함입니다. ⑤ 사실에 대한 다량의 사건을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결국 그 삶에 대하여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Ⅱ. 성령이 보증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장 13절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라고 했습니다.
"자금 이후로"에 "자금"은 "죽는"을 수식합니다. 문제는 "자금 이후로"가 언제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를 말할 수도 있고 성도들이 죽는 순간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내세 신앙을 보증하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을 보증하는 이유는 저들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온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세상에서 살 동안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저들은 언제 어디서나 오직 주의 영에 의해 성별된 삶이었습니다.
주의 영에 의해 포로된 삶이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으로 찬송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영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결과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살전 1:6).

Ⅲ. 이 땅에서 수고가 끝이 나고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장 13절에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 살 동안 거룩한 본분에 충실한 자들입니다. 저들은 영광의 세계에 들어가 안식할 자들입니다. 이 땅에서 저들의 수고가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의 수고입니다. 즉 주를 위한 수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한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자기 십자가를 메고 갔던 수고입니다.

① 보은의 행동화에서 오는 수고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이 땅에서 받은 사명수행에서 오는 수고입니다. 이것은 능동적 수고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② 시험에서 오는 수고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③ 이들은 잘 싸워 세상을 이긴 자들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5장 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결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계 14:11).

Ⅳ.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장 13절에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행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 주신 의로운 행위들입니다. 그 행위들은 바로 본문 14장 12절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한 내용입니다. 믿음을 끝까지 빼앗기지 아니한 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2장 6-8절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4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성도의 행한 일에 따라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행함으로 상급을 받는 원리입니다.
히브리서 6장 10절에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빌 3:14).

1) 주를 영접한 성도가 주의 이름으로 행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 행위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0-42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영접"은 고백적 행위입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믿고 따른다는 말입니다.

2) 의를 뿌린 자의 상이 있습니다.
잠언 11장 18절에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고 했습니다.

3) 수고한 것에 대한 상이 있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4)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한 상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2-24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5) 주의 이름으로 동정하고 희생한 상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4-35절에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6) 주를 인하여 핍박당한 상입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7)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는 상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8절에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8)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의 상입니다.
잠언 13장 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제일 큰 상은 이미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구원의 상은 모든 상급의 총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중가요 가사 가운데 "우리 어머니 동동구루모 아껴 쓰더니 다 못 쓰고 가셨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헨리 스미드는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죽고 타인처럼 무덤에 묻히며 그 다음에는 타인처럼 흙이 되어 사라지고 그런 다음에는 타인처럼 심지어는 문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처럼 될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도 병들고 저 사람도 병들어 사람은 다 죽습니다. 또 이 사람도 쓰러지고 저 사람도 쓰러지고 결국 누구나 예외 없이 무덤으로 갑니다. 그래서 부자나 나사로 중 어느 한 편의 처지가 나의 처지임을 볼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죽음의 한 순간은 모든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위로하고 있습니다. "만약 오늘은 병으로 낙심하고 있는 사람이 내일 아침에는 건전한 몸으로 일어나고 오늘은 가난으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 내일은 왕자가 되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는 또 말하기를 "먼저 육신의 쾌락과 안일을 포기하라 그리하면 죽음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바소 포웰은 말하기를 "모든 인간의 본성 속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공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은 그 공포를 제거해 버린다."라고 했습니다.
윌리암 거널은 말하기를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라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소망을 가진 자가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주님이 기뻐하시면 언제든지 기꺼이 이 세상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만 이 세상을 사랑하도록 하라. 죽음을 사모하되 주를 위해 살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아담의 죽음은 그가 범죄한 날 즉시 시작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의 슬픔을 달랠 때 내세의 소망에서 위로를 받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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