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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1) : 교회가 평화를 누릴 때 (눅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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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1

교회가 평화를 누릴 때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 (눅 19:41-46)

I. 본문 배경

오늘 읽어 드린 본문은 연이은 두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나타나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호산나” 찬양소리를 들으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장면이고, 이어서 나타나는 사건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두 기사는 단순히 별개의 두 사건을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한 맥락 안에 있는 사건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주일이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그들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19:37),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 찬송과 환영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마태복음 21장10절은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처럼 환영 받으신 적도 없었습니다. 온 성의 환영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19:39)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이 환영과 하나님께 대한 이들의 찬양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이때는 마땅히 하나님께 그러한 찬양이 드려져야 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II. 심판의 운명을 모르는 도성

벳바게와 베다니를 떠나 온 예수님의 입성 행렬이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직도 환영의 기쁜 소리들과 찬양소리가 성곽 앞에 가득하고 뒤따르는 백성들도 수다한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그것도 그냥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 ‘우시며’를 ‘에클라우센(ἔκλαυσε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부활현장을 보도하는 데에 사용된 ‘눈물을 흘렸다(ἐδακρύσεν)’라는 동사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우시고’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것입니다.

찬송을 받으시고, 온화한 얼굴로 제자들을 대하시고,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던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 오시자 갑자기 목 놓아 우십니다. 그분 주위에는 찬양 소리가 그치고, 제자들과 따르던 백성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 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날은 함께 기뻐하고 웃으셔야 할 순간이지 결코 외로이 흐느껴 우셔야 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도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아니 하시고 계속 목 놓아 우십니다.
그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결단코 연약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강철 같은 분이셨습니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때도 결코 나약해지지 않으셨고, 복음을 전하시다가 동리에서 쫓겨나 악한들의 추격을 받으실 때에도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려 체포당하시던 때도 그 배신 때문에 상심치 않으셨고, 간악한 로마병정에 의해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의 순간에서 조차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강하신 예수님께서 가슴이 찢어지시는 슬픔과 비탄으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 오사 목 놓아 우신 것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분이 그토록 대성통곡하셔야했던 이유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우신 사건에 대해 이처럼 강렬한 울음을 뜻하는 단어가 쓰인 곳은 이 곳 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저 “성을 보시고 우시며”(19:41)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신 것은 단지 성을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예수님 혼자 보셨습니까?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을 뒤따르던 모든 인파가 다 함께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예수님의 통곡을 이해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 그 성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목 놓아 울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그랬던 것처럼, 어제처럼 견고하게 서있고, 성문으로는 지난주처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받은 성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을 보셨습니다. “성을 보시고” 이 ‘보시고’를 헬라어 성경은 ‘이돈(ἰδὼν)’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외관상으로는 어제와 다름없는 편안한 수도였고,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도성을 영적인 통찰로 꿰뚫어 보셨고 이 때 주님은 목 놓아 우셨습니다. 주님이 목 놓아 우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견고하게 서 있는 이 성, 천여 년의 언약이 깃든 이 도성이 무너질 심판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큰 소리로 우시던 주님께서 젖은 눈을 들어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19:42). 이것은 선포가 아니라 차라리 홀로 되뇌이시는 독백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나머지 말씀 선포를 통해서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강퍅해진 종교적 도시. 이제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이 성을 향해 사십 여년 앞으로 다가온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정해진 아버지의 뜻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을 보시고 목 놓아 우시다가 독백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한 이 성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은 평화의 성(the city of shalom)이었습니다. 이 도성은 무려 천오백년의 언약이 깃든 하나님의 도성이었습니다. 모세 시대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만날 한 장소를 예정하십니다. 이 백성들이 모여서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 도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도성이었습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고, 이곳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왕권이 행사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거룩한 언약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유서 깊은 성 뒤편에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영적 통찰로써 꿰뚫어 보셨습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19:4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심판의 예언이 그 후로부터 정확히 사십 년 뒤, 얼마나 무섭게 예루살렘에 임했는지 아십니까?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기 전 이 때는 마침 유월절이었습니다. 이 성에는 백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로마의 장군 디도(Titus)에 의해 포위당한 예루살렘은 보급이 끊기자, 극심한 기근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주후 칠십년의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고, 급기야 어린아이를 잡아서 삶아 먹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전합니다. 주후 70년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되고, 7월 6일 항상 드리던 성전의 희생제사까지 그쳤습니다. 8월 27일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에 타버렸고, 9월 24일에는 전 도시가 디도 장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날이 바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습니다. 그들의 점령에는 무자비한 약탈이 뒤따랐고, 약탈을 위해서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으며, 거리 이곳저곳에서는 겁탈 당하는 부녀자들의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살육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거리마다 유대인들의 피로 도랑을 이루었고, 형식적인 제사 속에서 위안을 제공해주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폐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동족들의 시체가 거리거리에 쌓여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검투사로 개처럼 끌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별고 없이 서 있는 예루살렘, 이 성이 머지않아 당하게 될 비참한 심판의 종말을 미리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져 있었고, 그들은 끝까지 회개치 않고 있었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19:41). 헬라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이날에 너라도(καὶσὺ)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조국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여호와를 등진 것을 몰랐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십 년 후에 다가올 민족의 멸망도 몰랐습니다.
이 심판의 영적인 비밀을 사마리아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갈릴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다가올 민족의 위기를 유다가 깨닫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갑니다. 그러나 모든 성읍이 다가올 민족의 멸망을 몰라도 “예루살렘! 너만이라도” 알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앞에서 목 놓아 우시는데도 이 성은 깨닫지 못합니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말입니다. 이 성은 눈앞에 다가온 심판의 운명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예루살렘 성이 이처럼 눈뜬 소경이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헬라어 성경은 ‘숨기웠도다’라는 이 부분을 “에크뤼베”(ἐκρύβη)라고 읽습니다. 수동태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못 보도록 감추어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백성들, 그분과의 평화를 등진 교회의 비극적인 특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가려져 있고, 잠들어 있는 자들에게는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해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영혼을 어둡게 하는 죄의 작용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애통을 압니까? 민족을 향해 목 놓아 우시는 예수님의 심정에 관심이 있습니까? 저마다 예수를 믿고 복 받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방 신상 앞에서나 구하는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런 무지함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결단코 이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시는 눈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멸망 받을 예루살렘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올라가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III. 잠들어 있는 성전

이처럼 뜻밖에 통곡을 그친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방문하신 곳이 어디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이 두 기사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목 놓아 우시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격렬히 행동하시는 분으로 돌변하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이변을 맞으신 것처럼 분노와 흥분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내어 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진노하시는 모습을 가리켜, 많은 사람들은 “의분(義憤)”, “의로운 분노”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지나칠 수 없는 교회의 생명에 관계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이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그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셨을 때 무슨 엄청난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성전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제처럼, 지난 절기 때처럼 사람들은 성전에 찾아왔고, 작년에 행하던 그 일이 올해도 되풀이 되고 있었으며, 지난번에 행해지던 의식이 이 날에도 되풀이 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갈리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제사장, 서기관 모두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에 쓸 동물들을 팔았다고 하지만, 이 전통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누가 성전을 말아 먹으려고 작당을 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과 로마에게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동족들이 흩어졌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구약의 규례에 따라서 동물들을 가지고 제사 장소까지 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습니다. 처음에는 성전 가까운 동네에서 구입해 가지고 올라왔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아예 성전에서 그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에서는 헬라 돈, 로마 돈, 히브리 돈이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헬라 돈, 로마 돈은 명목 가치가 실질 가치보다 높은 일종의 악화(惡貨)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돈, 세겔은 표준 중량을 지니고 있어 “흠이 없는 하나님의 예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헌금의 편의를 위해서 이처럼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어느 날 갑자기 무슨 포고령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천천히 진행된, 과정상의 논리적인 무리가 없이 그렇게 되어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제물을 팔고, 돈을 바꾸면서 엄청난 이득을 제사장들이 착복했다고 하지만, 부르스(F. F. Bruce) 같은 학자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압니까? 진심으로 유대 종교와 성전 의식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환영인파도, 예수님을 밤낮없이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성전에서 별다른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징그러운 뱀을 보시기나 한 것처럼 흥분하십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인 인습에 따라 매매하는 자들을 쫓으십니다.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하신 것처럼 상과 의자를 마구 둘러엎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저는 이 본문 속에서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이 조국 교회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귀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은 먼저 그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視角)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IV. 하나님의 시각

본문을 묵상할 때, 우리가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있게 된 거대한 기독교, 치밀한 교회 조직, 역사 깊은 종교 습관들을 대하면서 문제를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마치 격정에 들떠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못 느낀 백성들처럼, 들끊는 환영의 물결 속에서 예수님께 헌신을 맹세하기는 했으나, 예루살렘 성전이 그토록 예수님의 진노를 살 만큼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거대한 기독교가, 그토록 오랜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교회가, 이토록 많은 교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관습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 만큼 잘못된 것이라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교회의 역사가 흑암을 향해 내려가던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이 그러했던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오늘날 조국 교회 속에서 이러한 의식의 빈곤을 느낍니다. 사람과 전통의 시각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예루살렘에서 행해져 오던 이 관습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논쟁거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수천 년의 약속이 깃든 이 거룩한 하나님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기에 그 어떤 종교적 건물보다 성자 예수님과 친밀해야 할 성전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이미 이 성전은 거룩한 약속의 전당이 아니라, 진노의 굴혈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들이 지금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칭찬보다는 책망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항들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자신과 조국 교회를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해 하나님이 당신과 이 시대의 교회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스러운 특징은 “하나님의 시각”(視角)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작년 이맘때도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돈을 바꾸고, 그렇게 제물을 사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난 번 절기에도 이 성전에서는 그렇게 바꾼 돈을 헌금으로 드렸고, 그렇게 사온 동물들로 제사 드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당도하시기 전 오늘 아침에도 이 같은 헌금과 제사 방식에 아무런 이의를 품지 않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분노하십니까? 그의 공생애 중에 이처럼 치를 떨듯 분노하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순간도,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진노하시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 “별다른 일이 없는” 이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왜 그토록 진노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러난 신적 정염(情炎)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자비하신 주님을 하나님의 격정에 사로잡히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視角),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원합니다. 교회를 원합니다. 참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일 없이는 이 조국 교회가 결단코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주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 시각(視角)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켜보시면서, 눈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나누어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기에 앞서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도록, 그리스도의 마음(pathos)을 갖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뉴잉글랜드의 각성운동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 그는 천재에 가까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이미 3살에 자기 사고를 글로 쓰기 시작했고, 9살에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써 밝혔으며, 12살에는 자연 철학에 관한 문제들을 분석 평가하는 글을 썼습니다. 1716년, 그가 13세 되던 해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특히 라틴어를 익숙하게 구사하며 고전을 섭렵하면서 예일(Yale)대학에 입학하였고, 4년 후에는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19살에는 예일 대학에서 교수로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 같은 예리한 지성(知性)이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학벌과는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가슴을 지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처절한 열망에 짓눌린 가슴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체험한 후 그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교회와 역사를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729년, 그가 메사추세츠 주 노샘프턴(Northampton)에 있는 교회에 부임하면서 끊임없이 외쳤던 것은 지옥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그 시대의 완악하고 타락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과 열정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은 “지옥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그 같은 설교와 열정을 비난했고, 자기 교회 교인들조차도 단순한 위로와 심방만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735년 어느 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은 후 한 젊은이가 자살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동역자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열정에 사로잡혀서 외치는 고독한 설교가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여러 가지 핍박과 회유에 직면하던 그는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기를 거부하고 23년이나 정들었던 교회를 사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자의 예언적인 선포는 그 영광스러운 제1차 대각성 운동에서 하나님이 왜 이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를 들어서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환영하는 엄청난 인파가 아니라, 종교적인 충동으로 헌신을 결심한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視角)으로, 이 시대와 교회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런 한정된 소수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는가에 대한 실증입니다. 조지 휫필드(J. Whitefield)가 그 시대의 교회에 대해 이 같은 시각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1741년 그 영광스러운 대각성 운동에 에드워즈와 함께 일하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교회의 현실 속에도 주님의 고통은 있습니다. 그 고통을 또 다시 받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의 시각을 구하십시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이 시대의 교회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분의 시각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그릇된 교회와 여러분 자신의 삶을 보면서 오늘,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노에 차서 외치시는 주님의 격정과 눈물을 갖게 해 달라고 매달리십시오.

예수님께서 그토록 상상을 뛰어넘는 진노 끝에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와 마가복음 11장 17절의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이 부분을 이렇게 읽습니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hL'îpiT.-tyB)이라 불리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잠시 이사야의 글에 실린 이 구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한 후, 54장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이 인용된 이사야서 56장이 바로 이 문맥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 은총의 시대를 맞게 될 때, 그러한 영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 변화가 하나님의 성전에도 있을 것이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전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집!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셨고, 오늘 예루살렘 성전이 이 같은 하나님의 열망에서 떠나 잠들어 있는 것을 예수님은 목격하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원문은 이 성전을 단순히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격을 써서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버린 그 집”,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의 집”임이 잘 드러나지 않을 바로 그 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시대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섬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위한 제사장적인 애끊는 중보의 기도가 없이는 결코 교회가 그 존재의 목적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성전에 이처럼 진노하신 것도 사실은 “내 집”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V.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매매하며 돈 바꾸는 일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이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은 갑자기 생긴 일도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매매”했으며, 무엇을 하려고 돈을 바꾸었습니까?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제사를 위해서였고,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엇이 주(主)이고, 무엇이 종(從)이었습니까?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한 사실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제사와 기도가 “주(主)”된 일이었고, “매매”와 “돈 바꾸는 일”은 그것을 위한 “종(從)”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 보려는 몇 번의 묵상 속에서도 결코 이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들이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나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존경심을 생각해 볼 때,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한 행위가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사드릴 장소가 없을 정도로 번잡한 시장이 성전 안에 섰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성전에 대해 충성심 깊고 경외함이 많은 여러 사람들이 벌써 예수님과 같은 일을 행하고 갔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기도는 교회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이런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기도하기 위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는 것입니다.

많이 기도하면서도 좀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해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해도 왠지 그 기도가 능력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느끼십니까? 먼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을 둘러엎으십시오. “매매하는 자들”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몰아내십시오.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 잡은 탐욕과 심령에 뿌리박은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결단코 경험해 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모습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의 특징이 단지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의 사람이 되고 있지 않다면,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고함치며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이 시간 만나십시오. “회개하라! 네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라.” 주님의 진노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만민을 위한 기도의 사람이라!” 우리 주님의 열정에 사로잡힌 눈길과 마주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앞에 가난한 이 시대의 조국의 교회와 초라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입니까? 영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그분의 보내신,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보내시는 성령을 의지합니까? 기도가 참으로 온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기능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기도를 압니까? 여러분들은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한 언어적인 보고(report)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아십니까? 마음을 다해 드리는 기도, 단지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가 아님을 아십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의 기도의 진수인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기도 속에서 영적인 세력들과의 싸움이 있음을 느끼십니까? 그들의 칼날과 맞부딪치는 금속의 굉음을 듣습니까? 기도가 깊어지면서 언어가 영혼의 신음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기도가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전쟁임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받는 대신 정교한 규칙에 의해 운영되고, 성령의 능력주심에 의지하기 보다는 잘 짜여 진 조직과 기구들을 믿고, 기도 대신 사람과의 사귐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으로는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에로 회복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묵은 땅입니다. 이제는 깨어나십시오. 일어나십시오. 기도함으로 자신의 심령과 이 시대의 교회를 기경하십시오.
그렇다면 왜 기도가 교회의 중심적인 기능이 되지 못할까요?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데 교회는 어떤 이유로 그 일에 있어서 이렇게 약할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첫째, 교회가 기도하는 일을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기도하는 일 자체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해야 할 일들 중 하나 정도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무지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일들 중 잘하면 잘할수록 좋고, 못해도 할 수 없는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지 아니하고는 민족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외칠 수 없음을 아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할 때, 민족 앞에 다가온 멸망도 그들 눈에는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민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피할 길을 외쳤던 선지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과의 열린 교제의 창문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국의 교회를 사랑하고 이 민족을 위해 슬퍼하는 여러분들은 이 시각을 향해 새롭게 눈을 뜨셔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충실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이 기도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일인 동시에 영적인 투쟁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무리한 영적인 일을 꺼려합니다. 왜 기도가 육신에게 무리한 일입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죄악이 보다 선명히 인식되고, 하나님의 면전의식이 우리 마음을 교차합니다. 이 같은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정직해지도록 요구하고 피상적으로 속여 왔던 많은 문제들 앞에 서게 합니다.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같은 일이 영혼에 무리한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잠잠히 간절히 기도로 섬기기보다는, 몸으로 때우고 육체적인 노고를 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가지고는 그의 헌신이 진정 하나님만을 향해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기꺼이 희생하고 노고를 치루는 것만 가지고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의 기도의 세계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그의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 드려지는 깊은 기도의 세계가 그가 진정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인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경박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에 대해 “기도만 하면 다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것은 기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기도! 그 기도의 세계를 생각할 때 마다 저는 드넓은 바다를 생각합니다. 푸르고 끝없는 기도의 바다, 저의 기도생활은 그 바다 가장자리에게 가랑잎 배나 띄우고 있는 형편에 불과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바다보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요?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을 깨닫게 해주지만,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깨달은 그분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 이상의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일도 기도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기도! 그 드넓은 기도의 바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까지나 바닷가에서 모래성이나 쌓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의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표호 하는 격랑의 회오리바람을 봅니다. 그 시대를 향한 진노의 폭풍소리를 듣습니다. 그 넓은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바다에서 이 시대의 조국교회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시는 눈물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한없는 사랑을 만나기에 그 바다에서 우리는 소망을 얻습니다.

때로는 그 잔잔한 바다와 갈매기들의 노래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하노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조국의 교회가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를 묶어 온 온갖 얽매인 닻줄을 끊고 기도의 바다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쉬지 아니하는 특별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무도 보지 못한 예루살렘에 멸망을 보시고, 아무도 문제를 느끼지 못하던 예루살렘의 잠들어 있는 성전을 영적으로 통찰하시기까지, 그리고 지금 백성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러 올라가는 그 시간까지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살아 오셨던 삶의 방식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쏟으신 피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드리는 십자가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땀과 눈물의 기도를 먼저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져 보신 일이 없이 그분과 동행해 오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셨는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참으로 그분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 이전에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광야의 사십일 기도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까? 그 바쁜 일과와 수많은 논쟁과 봉사 속에서도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을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 놓으시던 예수님의 이 기도의 삶이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보십시오. 잠들어 있는 제자들 곁에서 하나님께 매달리시는 우리 주님의 신음어린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VI. 기도-하나님의 능력

교회의 역사가 성령이 역사한 역사(History)라면 이 성령의 역사 뒤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선교의 역사만을 전해도 하나님은 그 권능을 가져오게 했던 기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계십니다. 선교의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천국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역사가 기록하기를 빼 놓았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던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무릎이 약대다리처럼 굳어지고 아직도 그 뺨에는 눈물 자욱이 지워지지 않는 교회와 역사를 움직였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각성되고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게 되기까지는 특별히 깨어 일어선 기도의 사람이 있었고, 이들이 기도할 때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어서 깨어났습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교회는 다시 한 번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오분, 십분 기도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위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떨쳐 깨어나기를 원하고 교회가 그 약속된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를 원하면 먼저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일에 있어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진정으로 이 조국의 교회와 여러분의 공동체가 이 민족을 이끌 영적 지도력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면 더 오래도록 무릎으로 싸우십시오. 여러분의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하십시오. 기도의 헌신이 없는 눈물은 종교적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 채 민족을 지도하고자 헌신하는 것은 무모한 모험주의와 다름없습니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 뒤에는 생명을 건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혼을 쏟아 부으며 그 시대를 짊어지고 중보자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진노의 사랑을 미리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기도의 투쟁이었습니다. 민족과 조국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전투였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에 사용되었던 찰스 피니(C. Finny)의 생애를 상세히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을 움직인 위대한 복음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하던 아벨 클러리(Abel Clary)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피니를 위해 기도로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 14시간 이상 계속되는 살인적인 기도로 피니의 각성운동과 전도 사역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병약한 몸으로 자신을 기도의 싸움에 드렸을 때, 1830년 로체스터(Lochester) 시에서 피니가 복음을 외쳤을 때 교회는 각성되었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회심해 들어왔습니다. 세 교회에서 피니가 집회하기로 당초에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교회는 목사를 내어 쫓으려고 궁리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교회는 목사끼리 서로 고소해서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해 피니가 그 도시에서 복음을 외치자 이 잠들었던 교회들이 깨어났고 10만 명이 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와 각성의 물결에 떠밀려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습니다.

1613년 아일랜드에서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은 일곱 사람이 무릎으로 헌신하였을 때 그 유명한 얼스터(Ulster)의 대각성 운동이 부패 속에 잠들어 있는 죽음의 땅 아일랜드를 강타했습니다. 병들어 쇠약한 제임스 글랜드닝(J. Clendenning)은 기도가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허약하고 병이 많은 몸을 이끌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 시대에 잠든 교회와 부패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부르짖을 때 올드스톤(Oldstone)의 집회에서는 그의 선포 앞에 12명의 악한 자들이 졸도해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존 웰치(J. Welch)가 그의 사위, 존 녹스(J. Knox)를 위해 하루에 7-8시간씩 기도하면서 3천명의 영혼의 중보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 더럽고 타락한 땅 스코틀랜드 위에 역사적인 장로교회를 서게 하였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한 시대를 깨우고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한 사람은 운동가 이전에 설교가였고, 설교가 이전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시대를 깨우고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삶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요한 웨슬레와 같이 탁월하게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 brainerd)와 같이 곧 쓰러져 죽을 듯 연약한 사람들도 사용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예일 대학의 수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처럼 초등학교를 중퇴한 무학자를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유명한 목사를 사용하시는가 하면 무명의 평신도를 전도자로 사용하셔서 한 시대를 깨우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사자처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도의 사람 마르틴 루터(M. Luther)를 들어서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깨워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얼어붙은 땅, 눈 덮인 숲속에서 폐결핵 3기의 몸으로 버림받은 인디언들의 영혼들을 위해 피를 토하며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통해서 수백 년 동안 우상숭배로 잠들었던 아메리카의 하늘 아래 영광스러운 십자가가 서게 하셨습니다.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기도하던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J. Huss)를 칠흑 같이 어둡던 중세 암흑의 교회사를 밝히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 되게 하셨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오직 기도에만 바쳤던 보스턴 신학교의 수재 아도니람 져드슨(A. Judson)을 들어서 생명 없는 죽음의 종교, 불교에 잠들어 있던 미얀마를 깨워 6만 여명의 가슴속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되는 일 없이는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도구로 교회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는 결단코 이 민족과 조국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공동체가 이 민족을 위해 아무리 많은 비전을 가슴에 품고 이것을 위해 뜻을 모은다 해도, 여러분의 공동체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충성스러운 도모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앞둔 도성 속에 잠들어 있는 예루살렘”의 처지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공동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이 치욕스러운 시대 속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까? 정녕 이 민족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다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할 때, 여러분의 공동체는 깨어날 것이며, 교회는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것입니다. 조국의 교회들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때, 강퍅한 이 불신의 시대, 강철같이 굳은 이 백성들의 뺨에도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민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세상은 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 위하여 교회의 선포 앞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예수님의 외치시는 이 음성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결단하시렵니까?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불타는 전도자(행8:1~6)를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또한 예루살렘 성이 눈 뜬 소경과 같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우리들 앞에 놓인 거대한 기독교, 치밀한 교회조직, 역사 깊은 종교적 습관들을 대하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입니까?
4. 예수님께서 인용한“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막 11:17)는 말씀은 이 시대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이어야 한다고 말합니까? 기도하는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 각자에게 적용한다면 무엇이 있을지 나누어봅시다.
5. 기도가 교회의 중심적인 기능이 되지 못하는 2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기도생활에서 결단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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