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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 8: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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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남선교회에서 시작한 좋은 운동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사합시다, 칭찬합시다, 아멘합시다.’ 운동입니다.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도 했고 오늘 아침 남선교회 조찬기도회에서도 했는데 이 예배에서도 한 번 하겠습니다.

여러분 옆의 분과  인사하고, 칭찬 하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아멘’ 할 차례인데요, 오늘은 12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12월에 성도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많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좋은 일이 많기 바랍니다.
‘아멘’ 크게 한 만큼 복 받으실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34절의 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 어디에 이런 식의 문장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힌트 하나 드릴까요? 신약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5장 시작 부분, 팔복이지요.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34절 끝부분과 35절을 연결해서 그런 문장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생명과 은총을 얻을 것이요” 이렇게 됩니다.
잘 기다리셔서 생명과 은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기다라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성경에서 잘 기다려서 복 받은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먼저 누구를 드시겠습니까?
먼저 하박국을 들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궁금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답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서 2장 4절의 이 말씀은 개신교 신앙의 등뼈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것이 더 유명하지만 오리지널은 하박국서입니다.
하박국서의 말씀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하박국은 기다려서 과연 좋은 답을 얻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앞, 3절에 하나님께서 전제를 다셨는데 여기에도 역시 기다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했습니다.

여기에는 모순된 말이 나옵니다.
앞에서는 종말이 속히 이르겠다고 하고서 뒤에서는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어긋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 편으로는 “속히”입니다.
그런데 사람 편에서는 더디게 느껴집니다. 조급한 것은 항상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하신 것입니다.
정확한 뜻은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기다리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계, 사람의 시계, 어느 것이 정확합니까?
제가 시간관념이 강한 편입니다. 초 단위로 시간을 지켜야 하는 생활을 오래 했으니까요.
사무실 책상 위에 전파로 시간이 조정되는 시계를 놓고 있습니다.
교육관 강대상 위에도 같은 시계가 놓여 있습니다.
요즘은 시계들이 대개 정확합니다. 휴대폰의 시간표시는 아주 정확합니다.
그래도 공중에서 날아오는, 시간을 맞춰주는 전파에 의해 조정되는 시계가 정확할 것 같아 그 시계를 신뢰하고 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따릅니다.
그 시계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시계는 이것보다 더 정확하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보고 내 시계에 맞추라고 하지 말고, 내 시계를 하나님의 시계에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깨닫고 체험할 때까지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기다려서 복 받은 사람, 또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시므온입니다.
아기 예수가 정결예식의 날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지요.
성경은 시므온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큰 복을 받았습니다.
시므온이 찬양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러분, 시므온처럼 기다려서 예수님을 만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돌아온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의  아버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마 집을 나간 날부터 기다렸을 것입니다.
동리 밖에 나가서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아들이 집 가까이에 왔다가도 용기를 잃고 다시 돌아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돌아온 아들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다려서 복 받은 사람들은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기다려서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반대로 제대로 기다리지 못해서 어려움 겪은 사람들을 찾아봅니다.
이런 것을 반면교사라고 하지요.

기다리지 못해서 불행을 겪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만 불행을 겪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아니 그 사람이 웬일로?’ 하다가 ‘아, 그런 일이 있었지!’ 할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기다려야하는데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부인 사라가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말이오? 더 기다립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거요.’ 했어야 하는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창 16:2b).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 이스마엘이 아랍의 조상입니다. 중동 분쟁, 이라크 문제 이런 것이 여기에서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형편은 이해할만 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출산능력은 이제 거의 상실될 나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도의 기다림은 인간적인 계산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오점이 찍혔습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불행은 겪은 인물 한 사람을 더 들어봅니다.
사울입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데 불레셋 사람들이 병거 삼만, 마병 육천,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기가 떨어져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리면 용기가 생기고 힘이 날 텐데 제 때에 오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무엘은 이것을 알고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하는 것이 있습니까?
주실 때까지 기다리며 조르시기 바랍니다.
찾는 것이 있습니까?
찾아질 때까지 기다리시며 찾으시기 바랍니다.
50여 년 전, 6․25 때 전사한 분들의 유해를 지금도 찾고 있지 않습니까?
두드리는 문이 있습니까?
열릴 때까지 기다리며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긴장해서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문이 열리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다라는 것입니다.
축구의 공격수가 골문 앞에서 공이 자기에게 오기를 기다리듯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 때 물에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뤄진다.’ 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 37편 7절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은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도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참고 기다렸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 37편 2절의 뒷부분입니다.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왜 이루어지지 않는데 저 사람, 특히 악한 사람이 바라는 것은 잘 이루어지는가, 비교하면서 불평하지 말아야합니다.
비교하면 불행해집니다.

우리가 모두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기다림입니다. 최고의 기다림입니다. 무엇일까요?
주님의 재림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인데 대림절을 대강절이라고도 합니다.
강림절이라고도 하는데 저는 이 강림절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성령강림절과 혼동되고, 강림은 그 시간에 내려와서 임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 절기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대강절, 여기 ‘대(待)’는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대림절을 영어로 Advent라고 하는데  Advent는 ‘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육신으로 오셨고, 오늘 우리의 일상생활에 오시고, 앞으로 다시 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대림절은 그것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재림 이야기, 웬일인지 부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단들이 많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재림을 강조하지 않으면 여러분, 교회가 약해집니다.
현대교회가 약해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재림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재림을 간절하게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사도  ‘마라나타!’라고 했습니다. 
마라나타의 뜻은 성경의 끝인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입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 때 성도들이 제일 많이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그 때 길선주 목사님이 집회를 많이 인도했는데 길선주 목사님의 집회 때 빠지지 않고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바로 우리가 오늘 입례송으로 부른 찬송입니다. 167장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입니다.그 때는 가사가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였습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 얻을 자 회개하라
주 성령도 너희를 부르시고 뭇 천사도 나와서 영접하네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인 오늘, 여러분, 재림 신앙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재림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언제 오실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어디에 오실까?’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언제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오시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다리는 문제에 있어서 모범을 보인 분들이 있습니다.

우선 고린도교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참 말썽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윤리문제, 신학논쟁, 파당,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것 하나만은 잘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4절에서 7절까지에서 고린도교회교인들이 잘 기다리는 것을 이렇게 감사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잘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이 바울 사도에게 와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하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님을 잘 기다라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과 10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여러분, 이런 기다림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기다림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는데 대한 답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은 왜 기다리십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리십니까?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사랑의 기다림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이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잘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 기도응답을, 원하는 것의 성취를, 의의 최후 승리를 잘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 복을 받으시기를 기다림의 모범을 보이고 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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