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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행 1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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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은 죽었다?”

120여 년 전 독일의 哲學者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신의 죽음을 외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죽었다는 증거와 자료에 의한 결론은 아닙니다. 또 자신의 哲學的인 사유에 의한 결론도 아닙니다. 그가 신이 죽었다고 외친 이유는 실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에 대한 강한 疑問이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의 살아계심을 증거해야 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한 소리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래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영혼들의 외침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이 믿으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시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만약 오늘 이 시간에 약 120여 년 전의 철학자 니체가 다시 나타나 여러분에게 ‘신이 없다’고 한다든지, ‘신이 있으면 증명해 보라’든지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반박하고 설명하실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계십니까? 아니면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도 그 철학자처럼 “글쎄, 그러고 보니 요즈음 하나님이 참 조용하시네! 뭔 일이 있으신가? 설마 돌아가신 것은 아니겠지?”라고 반문하시지는 않겠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이며, 또한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전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오늘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과 존재에 걸맞게 당신의 능력을 무한히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그리고 성도의 삶에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교회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보여 줍니다.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다는 것,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또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

1) 주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사람

오늘 本文에 나오는 교회와 성도들이 처한 상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졌지만,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사마리아, 안디옥, 구브로 등 모든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상황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핍박 역시 더욱 더 거세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핍박으로 인하여 사도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순교 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까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헤롯왕(Herod Agrippa I, BC.10~A.D.44)으로서 예수님께서 탄생 할 때에 있었던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그는 로마에서 자라서 그곳에서 공부를 한 소위 ‘親로마파’ 사람으로서, 로마 식민정부의 대리 통치자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세력은 그 동안 계속 교회를 괴롭혀 오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와 민족을 무시하는 사람이나 국가에 대해 목숨을 바쳐가면서 폭탄테러를 감행하는 것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헤롯왕은 에돔 족속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늘 혈육적인 열등감과 종교와 문화, 그리고 모든 지식이나 전통면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親유대주의 정책을 써서 유대인들에게 한없이 잘해주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이렇게 노력을 해도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용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인과 헤롯 아그립바가 결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헤롯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야고보를 칼로 죽이자, 유대인들이 이 일을 환영하고 칭찬하고 나섭니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게 칭찬받으면 더 잘하려고 덤비지 않습니까? 헤롯도 유대인들의 인정에 신이 나서 이번에는 기독교인들의 우두머리격인 베드로를 잡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의 상황은 교회의 대적들이 서로 결탁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사도 야고보를 죽인 후, 또 다시 베드로마저 죽이려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때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베드로 역시 체포된 그 날 무슨 일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상황은 굉장히 불안하고 위험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 야고보가 헤롯에게 붙잡혀 죽었고, 주로 흩어진 무리들을 지도하고 보살피던 베드로가 붙잡혀 내일을 알 수 없는 절망적이고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 역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과, 스데반 집사나, 동료였던 야고보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해야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그의 곁에는 군인 둘이 서로 한 팔을 베드로의 팔과 연결된 쇠사슬에 묶여 있었으며, 파수군들은 감옥 문 밖에서 철저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을 벗어나면 첫 번째 초소가 있고, 또 다음으로 두 번째 초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3중 4중의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는 살아날 희망은 고사하고 감옥을 벗어날 가능성조차도 전혀 없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헤롯과 유대인들이 서로 결탁하여 교회를 박멸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절망적이던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구출됩니다.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 함께 묶여있던 군인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감옥 문을 지키던 군인들이나 첫 번째 두 번째 초소의 군인들, 그리고 마지막 철문을 통과할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가운데 감옥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베드로 자신조차도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가두었던 이 일의 주모자인 헤롯 아그립바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희귀한 병으로 죽게 됩니다(12:23).

이 일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즉 우리의 질문, “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가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에 대한 첫 번째 해답을 내려야 합니다. 그 첫 번째 답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고,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적극적인 삶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삶이었습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기를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가 주의 이름으로 핍박당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금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고, 또 이 일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핍박당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들에 의하여 병이 고쳐진다든지, 귀신들인 자들이 고침을 받는 등의 보고를 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자들에게 그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이신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주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 하고, 어떤 핍박이라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할 때, 여러분들도 그들처럼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이 감해지거나 줄지 아니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전도하는 사람

두 번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앞에서 본 바대로 이리 저리로 흩어진 교회들과 신자들을 심방했으며, 고넬료 등 이방인들을 전도했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는 오늘 본문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중에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있던 교회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른 곳으로 떠나고 있습니다(17). 좀 쉬고 싶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잠시 눈 좀 붙이고, 며칠 간 쉰 후에 복음을 위하여 가겠다’고 해도 어느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잠시라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복음전하는 일을 위하여 헌신했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헌신했던 바울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이 말은 바울은 정말 죽음 일보 직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기적적인 체험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경험하는 기적입니다. 오늘도 전도하는 사람들은 크고 작은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하십니까? 오늘 성도들의 문제는 영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나 자신만 은혜 받으면 되고, 내가 주님 잘 믿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눈으로 주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님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죽어 가는 영혼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전도하는 그곳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복음이 상처받고 고통 속에 거하는 사람에게 진정하고도 유일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전도하는 그곳에서 상처를 싸매시고 새 살이 돋게 하시며 사람을 고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이 외로움과 실패와 좌절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복음뿐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전도하는 그곳에서 여러분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능력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두 번째 답은 이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복음을 전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오늘도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하는 사람

세 번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날까요? 예루살렘 교회는 한때 1만여 명이 훨씬 넘는 교회로 성장했지만,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로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어느 한 집에 모여도 될 만 한 숫자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한 가지, 아니 도리어 더욱 강해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도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베드로와 성도들의 자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좌우에 군인들이 함께 있는데 단순히 함께 있는 정도가 아니고 세 사람이 한 사슬, 오늘로 치면 세 사람이 함께 연결된 수갑을 차고 있습니다. 움직이면 어느 한 사람만 움직일 수 없고 세 사람이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며, 4명 중 2명이 죄수인 베드로와 같이 있었고, 나머지 2명은 감옥 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첫째 초소, 둘째 초소에 보초병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철문이 막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베드로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정도로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또한 감옥을 벗어나 길거리로 나오도록 전후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이런 밤에도 잠자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열렬히,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밤에, 혹 새벽일수도 있습니다만, 성도들이 모인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의 어머니의 집으로 갔을 때, 그때까지도 성도들은 잠자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야고보가 이렇게 순교한 이후 또 다시 베드로마저 그들에 의해 순교 당한다면 그 피해는 엄청나리라 예상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1만여 명의 교인들이 흩어졌던 쓰라린 경험을 이미 한 바 있는 성도들은 사도 야고보와 이제 베드로까지 잃는다면 ‘그 파장이 얼마나 클까?’를 걱정하면서 그 위기감 때문에 잠을 자지도 못한 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성도들은 아주 놀랄만한 소식을 하나 듣습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날이 새려고 동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그 시간에, 누군가 그들이 기도하던 집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기 일 때문에 바빴다가 늦게라도 기도에 동참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는 성도일 수 있고, 또 교회를 급습한 유대인들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을 두드린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막상 그 응답이 나타났을 때 모두가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던 그 시간에, 주님의 천사가 감옥으로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깨워서는 한 수갑을 같이 차고서 자신들도 죄수 곁에서 자고 있던 군인들도 모르게, 그리고 바로 그 감옥의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모르게, 또한 첫째 둘째 초소를 파수하던 보초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베드로를 감옥에서부터 성도들 곁으로 이끌어내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성도들이 기도하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아니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 자신이 그들 앞에 선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질문,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능력은 누구에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세 번째 답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처칠은 그의 정치력이나 회고록으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신앙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독일군을 괴멸하기 위해 최정예 군사 30만을 유럽으로 파병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최정예 군사 30만이 독일군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처칠은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독일군들에게 전멸한다면 영국은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며, 2차 대전의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처칠은 전 영국민에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하며 기도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전 영국국민이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유럽에 고립된 영국군대를 구출하셔서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하게 하셨고, 이 군대가 다시 후에 유럽으로 들어가 전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영국국민은 1940년 5월 26일, 1941년 3월 23일, 1943년 9월 3일, 1944년 9월 3일을 각각 기도일로 선포하여 전 국민으로 기도하게 함으로서 전쟁의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능력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우리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오늘도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 어떠한 컴퓨터나 기계나 조직이나 돈이라도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도 여러분 곁에 계신 분이 만왕의 왕이시오, 만군의 주 여호와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주파수를 이렇게 맞추십시오.

극동방송 전파를 잡기 위해서는 98.1 메가 헤르쯔를 맞추어야 합니다. 기독교 방송의 FM은 106.9이고, KBS FM은 92.7이나 93.9입니다. 고속도로를 가다가 지방 경계선을 넘어서면 방송 주파수도 바뀌어 다이얼을 새로이 맞추어야만 그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그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삶을 사십시오.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사십시오! 주를 위한 고난과 어려움을 기뻐하십시오! 복음 전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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