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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붉은 줄을 달아 내린 라합의 믿음(히 11: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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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줄을 달아 내린 라합의 믿음(히 11:30-31) 

  미국과 유럽은 우리나라 보다는 어떤 인물을 기리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명예의 전당 (Hall of the Fame)”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스포츠, 영화, 예술 등 각계각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낸 사람들. 그러면서 그 분야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들을 선정하여 이름을 올리고 기념합니다. 엄격한 기준들에 의해서 극소수의 사람들의 이름이 등재됩니다. 각각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구 분야에서 루 게릭, 농구의 마이클 조던 등과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개인 뿐 아니라 온 가문이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가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도 명예의 전당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영웅들의 전당에 대해 말합니다. 그 전당에 이름이 올려진 사람들을 보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 그리고 무명의 영웅들에 대해서 적고 있습니다. 이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등재되는 것은 이 땅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절과 39절에 나오는 증거를 얻었다는 말이 바로 인정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러 온 모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한 평생 사신 후에 모두 다 하늘나라의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다 오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믿음의 전당에 오른 영웅들 중에서 유일한 여자인 라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라합이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오를 수 있게 된 이유는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친절하게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의 행위를 담고 있는 여호수아 2장의 내용을 통해 라합의 믿음의 성격에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내용설명>

  여호수아는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싯딤에서 정탐군 둘을 여리고로 보냅니다. 두 사람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갑니다. 이 사실을 어떤 사람이 알고 왕에게 고합니다.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그 정탐꾼들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라합은 이미 그들을 지붕의 삼대에 숨기고, 그들이 누구였는지도 알지 못했고 성문을 닫기 전에 그들이 성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급히 따라 가면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2:9-21절에 라합이 그들을 숨긴 이유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라합 뿐만 아니라 여리고 성의 많은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걸어서 건넌 것과 아모리 사람들을 전멸시킨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2장 11절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신이시다”고 고백합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을만한 표를 달라고 합니다. 두 정탐꾼은 그들을 달아 내린 창에 붉은 줄을 매어두고 성이 정복당할 때 온 식구들이 라합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합니다. 라합은 그들을 창문으로 탈출시키고 그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답니다.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로 돌아가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고 그곳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이 장면 속에서 우리는 라합의 믿음의 몇 가지 성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라합의 믿음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여리고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많은 상인들이 여리고 성을 드나듭니다. 상인들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소식들을 여리고 성의 백성들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라합도 이러한 소식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여관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을 사고파는 창녀라고 신약 기자들은 말합니다. 그 성안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관련해 가십거리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정탐꾼들을 돕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합은 자기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왕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 앞에 그의 생을 내려놓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걸어서 건너게 하신 하나님. 군사적으로 잘 무장된 아모리 족속들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하나님. 이 하나님은 천하에서 제일 크신 신”이라고 고백합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이 크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며 생명을 내놓고 정탐꾼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라합의 믿음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들었지만 그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잘 무장되어 있고 빈틈이 없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겠지” 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마음에 새겨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리고 성과 관련해서도 반드시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치 보는 것처럼 믿는 것. 우리 눈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지만 그 분이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요, 우리를 위해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분께 우리의 삶을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생활하는 직장 동료, 친구들, 이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모른다 하고 “NO 당신은 없어!!”라고 외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YES!!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주인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라합의 믿음은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역경 가운데서 믿는 믿음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들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약속의 징표를 창문에 매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돌아올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후회도 생길 수 있습니다. 내가 내린 결정이 잘한 것인가? 내가 감정에 휩싸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성적이었는가? 가능성은 있는가? 여러분!!! 믿음이 가능성에 의존합니까? 가능해 보이면 믿고 가능해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입니까?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의존하는 확률입니다. 물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행동이 보통의 경우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상식선을 넘어서 믿음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다.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서도 믿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에 다르면 진정한 믿음은 “어두움 가운데 산이 보이지 않지만 낮에 실재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구름 너머 육신의 눈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의 발자국을 따를 수 없을 때에도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바위를 걷듯이 단호하게 바다를 걷는 것입니다. 거친 비바람에도 햇빛 속을 걷는 것처럼 안전하게 걷는 것입니다. 나를 삼키려는 거친 풍랑에 그것이 마치 나의 침대인 것처럼 평안히 눕는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이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오합지졸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지 않고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전쟁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 오합지졸의 이스라엘을 들어 사용하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기 위해 영의 뿔로 만든 나팔을 들고 나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이 육신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실 때도 있습니다. 나팔을 불어 견고한 성이 무너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거의 100%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가능해 보이는 방법으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셨습니다. 라합은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방법으로 여리고 성을 하락시키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고 두 정탐꾼이 준 약속대로 그의 가족들을 자기 집에 불러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가능성과 약속이 함께 갈 때는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고민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가능성과 약속이 갈라서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어느 것을 따르고 계십니까? 가능성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라합은 자신만 멸망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아버지,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함께 구원해 줄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죄악의 상태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의 길로 옮겨졌습니다. 이 좋은 것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이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요, 이 길에 동참하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에 처할 사랑하는 친지들을 보며 얼마나 안타가운 심정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진정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 가족들, 이웃들, 직장의 동료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도를 전해야 합니다.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이 안타까움으로 다가노지 않는다면 우리가 진정 구원을 알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입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달려가는 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모두 드릴 말씀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바랍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 눈물로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듣고 싶어 하시는 기도는 우리가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기도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믿음, 변함없는 믿음,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창녀였던 라합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인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됩니다. 잘 믿는 신앙의 가정의 남자 살몬과 결혼하고 보아스를 낳습니다. 보아스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습니다. 한 비천한 이방여인인 라합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 왕의 고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엄청난 사실은 그녀의 후손 중에 온 인류를 구원할 메세아이신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한 창녀의 믿음의 결단을 사용하셔서 그로 인해 엄청난 가문을 이루게 하시고 마침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신묘막측 합니다. 우리의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행하십니다. 입을 벌리고 쳐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2장에서 2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보내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성안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창녀 라합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위대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라합은 많은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믿음의 전당에 영광스럽게 이름이 올려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신묘막측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고 있고 또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주인공은 꼭 세상적인 시각에서 잘난 사람일 필요가 없습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바라기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라합처럼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육신의 눈으로 보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고 영적인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보는 유년주일학교 아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맘껏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압니까? 우리 교회를 통해 디. 엘. 무디, 빌리 그래함과 같은 한 시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생겨날지. 아브라함 링컨, 지미 카터와 같은 주의 손에 붙들린 정치가들, 각계각층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자들이 일어날지 어떻게 압니까? 아이들을 위해 부르짖고 기대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물을 일으키신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인물을 찾으실 때 먼저 우리 교회에서 찾아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가정에서부터 먼저 아이들을 믿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믿음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빠, 엄마의 행동 속에서 아이들이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달리 중고등학교 시기에 교회를 쉬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봅니다. “공부 공부”하며 중직자 집안의 자녀들도 주일성수를 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오랜 기간 공부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지혜주시면 공부공부하며 매어달리는 것 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부분에도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확신적으로 말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오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녀들의 장래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부모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은 작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이 라합의 경우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일 앞에서도 눈에 보이는 것 좇아 살지 않고 크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풍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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