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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 부모의 간증 (히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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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한 일들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일이 있다면,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제외한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다.

  사업과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고, 건강과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참 어렵고 힘들다. 그렇지만 자녀가 잘못되는 것과는, 비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자녀 문제는 중요하다.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기 목숨보다 자녀를 더 사랑한다. 그런데 많은 가정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하고 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사랑하지만, 무조건 사랑만하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자동차도 운전을 하려면, 공부하고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야 사고를 줄일 수 있다.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려면, 많은 공부와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런 공부와 훈련을 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많은 부모님이, 자녀교육의 무면허자들이다. 그래서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오히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만들어, 자녀를 문제아로 만든다.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자녀들에게 큰 상처가 된다. 받은 상처를 치료해주지 않으면, 문제아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 소아과 연구원들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들이, 무엇을 제일 두려워하는지 조사했다. 30여 년 전에는, 호랑이나 사자 같은 동물이 가장 무서웠지만, 지금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의 이혼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이처럼 현대의 가장 큰 비극은, 가정의 상실에 있다.

  오늘 본문은, 모세 부모님의 믿음의 간증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모세의 부모님은 믿음으로, 모세를 길렀다. 그 부모님은 아므람(ם󰙜󰗱󰘞)과 요게벳(ד󰔫󰗋יוֹ)이었다(출6:20). 그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기신 자녀를, 믿음으로 훌륭하게 기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자녀들을 키우고 있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의 자녀와 자손들은 돈으로 키울 수 없다.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 돈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자. 우리에게 믿음이 없음을 오히려 고민하자. 자녀를 탓하기 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기 바란다.

1. 그 부모는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23上).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모세의 부모님은, 믿음의 눈을 가졌다. 또한 믿음으로 자식을 위해, 함께 믿음으로 노력했고, 믿음으로 살았다.

  모세의 부모님은, 모세가 태어났을 때, 믿음으로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믿음으로 아름다운 아이로 보았다는 말은, 혈육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연관해서 아기를 보았다. 우리는 자녀들을 나의 소유물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상급이요, 기업임을 깨달았다. 육신의 안목으로, 자녀가 예쁘다, 똑똑하다는 관점보다,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그 아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다.

  내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을 때, 온전히 자녀들을 하나님께 위탁할 수 있다.  어떤 부모님이든지, 자기 자식을 아름답게 보인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 그런데 성경은 모세의 부모가, 자녀를 아름답게 본 것을, 믿음이라고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출애굽기 1장은 모세의 유년기에 대해 말한다.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민족이 급속하게 성장하자, 두렵게 생각하고, 억제할 정책을 편다. 처음엔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출1:11) 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장성하니,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1:12). 그래서 바로 왕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아이를 낳으면,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렸다(1:17).

  애굽 왕 바로의 악한 계획은, 그만 수포로 돌아갔다. 바로는 마지막 계획으로 (22)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고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기에, 모세의 부모님은, 임신하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히브리인들은 임신되었을 때, 제발 아들이 아니고, 딸이기를 소원했을지도 모른다. 아들을 낳으면, 하천에 던져 죽여야 하는, 비정하고도 두려운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났다. 이들은 아들이 났다고 기뻐하지 못하고, 무서움과 슬픔 속에 떨어야 했다.

  이 어린 생명을, 왕의 명령대로 죽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왕의 명령을 어긴 죄로, 우리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그들은 아기를 낳고,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들을 아름답게 볼 수가 없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 이 아이를 왜 우리에게 주셨나요? 남자아이면 죽어야 하는데, 아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왕의 명령대로, 이 생명을 우리 손으로 죽이도록,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주셨나요?”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슬픔과 두려운 마음을 쏟아 부었다.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임을 알았다.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다. 하나님을 도전하는 일임을 알았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순간, 믿음의 눈이 열려, 그 아이를 보게 되었다. 믿음의 눈으로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그 아이가 달리 보였다.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1)고 하신, 바로 그 말씀이다.

  행7:20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아이, 하나님께 필요한 아이라는 말이다. 즉, 이 아이는 왕의 명령으로 죽어야 할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필요한 아이로 보았다.

  나의 짐이 되도록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기에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생명임을 보게 되었다. 이 아이가 죽어야 할 슬픔의 아이가 아니라,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아이로 보였다. 모세의 부모는 가장 어둡고, 가장 슬픈 때에, 믿음의 눈으로 그의 아들을 보았다.

  만일 모세의 부모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나일 강에 던져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에게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말 안 듣는 자식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기도하시기 바란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녀들을, 어떻게 보시나요? 내가 난 자식으로, 나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어갈, 자식, 내 노년을 책임져야 할, 자식으로 보시지는 않나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아이의 뒷바라지를 잘 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자식을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면, 믿음으로 자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모세 부모의 믿음의 눈을 갖길 원하신다. 믿음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하나님 무엇 때문에, 이 자식을 내게 주셨나요? 무엇 때문에 이 아들과 딸을, 이 시대에 저에게 주셨나요?

  그리고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녀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 자녀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연히 주어진 생명도 아니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소중한 생명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정한 때에,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식을 볼 수 있어야, 아름다움이 보인다. 하나님께 의미 있는 존재로 보인다. 이것이 믿음으로 자식을 보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렇게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 모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숨겼다.”(中).

모세의 부모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모세는 태어났을 때, 나일 강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왕명을 어기면서, 모세를 나일 강에 버리지 않고, 석 달 동안 집안에 숨겨 키웠다.

  그들은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모세를 돌봤다. 모세 부모의 믿음은, 모세를 살렸다. 모세의 부모에게 믿음이 있었기에, 모세가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뒤에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이 되었다. 결국 모세 부모의 믿음은, 모세만 살린 것이 아니다. 나아가 히브리 민족 전체를 살렸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나요? 위기에 처했나요? 문제는 환경이 아니다. 여건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만 있으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아무리 큰 역경이라도, 믿음만 있으면 극복해 낼 수가 있다.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당시 바로의 군사들은, 정기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집을 수색을 했다. 숨겨 놓은 사내아이를 찾아서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때 바로의 병사들은, 애굽인의 갓난아이를 데리고 가서, 히브리인의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뾰족한 것으로, 그 아이를 찔러서 울게 만든다.

  어린아이는 곁에 있는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우는 생리가 있다. 그 점을 이용해서, 숨겨놓은 아이를 찾아냈다. 석 달이 지나자 모세의 부모는, 더 이상 모세를 집안에 숨겨서 기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모세의 울음소리가 우렁차서, 집밖으로도 새어나갈 소지가 많았다. 숨겨 기르는 일이 한계에 이렀다.

  석 달은 아이를 숨겨 양육할 수 있는, 최대기간이다. 석 달이 지나면 아기가 자율행동을 시작한다.

그래서 (출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매”라고 했다. 더 이상 숨겨 기를 수 없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양육했다는 말이다. 모세의 부모의 최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갈대 상자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속에 모세를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놓았다. 더욱이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서서” 지켜보았다. “하나님이 원하신 아이라면, 살리실 거야”하는 무조건적 믿음으로 그냥 강가에 버리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했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 그때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강가에 나왔다. 그 당시 애굽에는 이미 궁 안에, 훌륭한 목욕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의 공주가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껴 시녀를 거느리고, 나왔다.

  갈대상자가 공주의 눈에 뜨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아이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는다. 이런 과정이 우연일까요? C.S. 루이스 교수가 기도응답에 대해, 옥스퍼드에서 설교한 후, 어떤 학생에게 질문을 받았다.

  “정말 기도 응답이 존재할까요? 우연의 일치를, 기도 응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요?” 루이스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도를 그치면, 그 우연도 없어지고 만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우연이라는 말은 없다. 오직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

  믿음의 필연이요, 기도의 필연이요, 최선의 필연이다. 최선을 다하는 믿음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우리의 믿음도 이처럼 되기 바란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난 뒤에, 가장 좋은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최선의 믿음은 최선의 행동을 낳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최선을 다하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다섯을 노력하면, 다섯의 도움을 얻게 된다. 열을 노력하면, 열의 도움이 얻는다.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 심은 만큼,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둔다.

  최악의 상황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면, 하나님을 바라보라. 주님의 도우심을 믿는다면, 최선을 다하고 난 뒤, 모든 결과를 주님의 손에 맡기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 이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3.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다”(下).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세의 생명은, 바로의 손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바로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모세의 부모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이처럼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무서워하지 않을 일도,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다. 예수님은 배 안에서 주무시는데, 갑자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물결이 배를 덮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무슨 뜻인가? “얘들아, 너희가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이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통해서, 앞으로 하실 일이 얼마나 많으신데, 너희가 물에 빠져 죽도록 그대로 내버려두시겠느냐? 왜 하나님이 지금도 너희를 지키시며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믿음이 없으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어떤 위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이 있었기에,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길렀다. 모세의 부모님에게 있었던 믿음은, 모세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했다. 어느 날 그들의 눈앞에 홍해가 나타났다. 뒤에는 애굽의 군사들이 추격해 왔다. 이들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이때 모세는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출14:13)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의 눈에도, 넘실대는 홍해는 그대로 보였다. 이스라엘 백성들만 자기들을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사들을 보지 않았다. 모세도 역시 그들을 보았다. 똑같이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모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차이점은 오직 한가지, 모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했다. 위기에 처했다. 그럴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신과 함께 하시면서 지켜주시고, 돌아보신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살아가다보면 이런저런 환난을 당할 때도 있다. 바로와 같이 악한 사람, 강퍅한 사람을 만날 수가 있다. 홍해와 같은 큰 역경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사망의 음침한 큰 위기에 처할 때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시고, 믿음을 가지시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구원을, 우리가 반드시 맛보게 된다. 이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결론이다. 우리는 클린턴의 부도덕한 섹스 스캔들을 잘 알고 있다. 클린턴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생계 때문에, 어린 클린턴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플로리다 간호사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동안 클린턴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자란다.

  더구나 빈민가 골목에서, 도색잡지와 못된 모습만 보고 자란다. 그러다가 클린턴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가 재혼하여 돌아왔다. 그런데 새아버지는 늘 어머니를 구타하고 클린턴을 때렸다. 공부를 잘했기에 일류 대학을 갔지만, 정서와 믿음의 그릇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서불안은 성도착과 중독증으로, 점점 더 심각한 문제로 깊어간다. 그리고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기독교 집안 딸인 힐러리를 만나 결혼하여, 힐러리의 따뜻한 정서와 교양과 믿음으로 클린턴은 변호사가 되고, 결국 미국 대통령까지 되는 인생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서로 바쁜 관계로, 힐러리와 자주 떨어져 있게 되고, 결국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스캔들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사건으로 힐러리는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3일 동안 먹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고만 있었다.

  그녀는 배신감 때문에, 보란 듯이 이혼해서, 클린턴을 전 세계에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 그때 힐러리의 친정어머니가 찾아와, 사랑하는 딸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딸아! 나도 네 마음을 안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고 배신감이 복받치겠니?

  그러나 네가 남편을 대통령까지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남편을 버리면, 미국 시민들이 네 남편보다 널 보고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찍어 주었는데, 네가 남편을 버리면, 미국 국민도 클린턴을 버리고 말 것이다. 클린턴뿐만 아니라, 모든 남자는 다 그렇단다. 여건만 갖추면 다 그렇게 된단다.

  억울하고 분해도, 이번 한번만 남편을 용서해 줘라. 아니 용서의 마음이 안 생기면, 국민들 앞에서 남편을 용서한 척, 사랑한 척이라도 보여주거라. 다정한 포즈로 키스하고, 남편에서 사랑을 고백하라. 그러면 미국국민도 너를 보고, 대통령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대통령을 지켜주고, 어쩌면 대통령보다 오히려 널 사랑하고, 존경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네게 대통령보다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 말대로 했다. 그 결과 클린턴은 구사일생으로, 대통령직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고, 지금 힐러리가 차기 대통령의 0순위에 오르게 되었다. 얼마나 멋있는 여자인가?

  내가 미국 시민이라면, 반드시 이런 여자를 대통령에 찍어 준이다. 만약 그때 힐러리가, 클린턴은 원래 젊어서부터 바람둥이였다고 나발 불어버리고, 보란 듯이 이혼 했다면, 모두가 자멸했을 것이다. 딸 첼시도 아빠를 원망하고, 탈선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힐러리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일어섰을 때, 이런 아름다운 결과가 일어났다. 이런 진정한 용기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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