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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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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왕이 되니 주전 790년이었습니다. 이때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크게 성공한 시대였으나 종교적, 도덕적으로는 무섭게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국가의 흥망이 정치나 군사적인 우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신앙 양심과 말씀의 생활화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지자 아모스로 하여금 '너희는 나를 찾으라'고 본문 5장 4-6절에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으라'는 디르슈니( )는 하나님을 떠난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찾으라는 말은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서 잃어버린 신뢰와 믿음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시편 9편 10절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4편 6절에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라고 했습니다.
스바냐 1장 6절에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살리라'고 한 위흐유( )는 생명과 관계된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Ⅰ. 당시의 이스라엘 형편은 어떠한가? [본체론(0ntology)적인 질문입니다]

1) 거짓 것에 미혹 받은 일입니다.
본문 2장 4절에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짓』의 정체는 이방의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종교화시키는데 미혹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도처에 횡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에 의해 미혹된 어리석은 행위가 죄악입니다.

2) 남이 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본문 2장 7절에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비참한 자리에 빠지는 것을 보기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죄악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곧 살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빈곤을 압제하는 것이나 지혜의 빈곤을 압제하는 것이나 재능의 빈곤을 압제하는 것 등은 모두가 죄악입니다.
잠언 14장 31절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3) 위정자들의 횡포입니다.
본문 2장 6절에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라고 했습니다.
뇌물을 받고 의인을 정죄하고 빚진 자가 신 한 켤레 값을 못 낸다고 하여 채권자가 그를 종으로 넘겨주는 비정한 현실입니다. 오늘날도 빚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채무자에게 신체포기 각서를 요구하는 소름끼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권이 옹호되지 못하는 재판이 오히려 정의의 탈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 전 사건의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재판에 불만을 품은 모 대학의 교수가 석궁으로 재판관을 쏘는 희대의 웃지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썩은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정자들의 불공정한 처사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형편이었습니다.

4) 더러운 음란 행위입니다.
본문 2장 7절에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자끼리 한 여인에게 다니면서 간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파렴치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은 주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5) 여인들의 사치풍조입니다.
본문 4장 1절에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산의 암소는 사치하고 게으른 이스라엘 여자들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런 여자들을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3장 16절에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들은 가난한 자에게서 부당하게 착취하여 술을 마시면서 분수에 넘치는 것으로 연락했습니다. 또 이 여자들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 남편을 시켜서 술을 가져오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6)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4장 6절에서 11절까지 다섯 번이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했다고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 흉년을 주었습니다. 아모스 4장 9절에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2) 염병을 주었습니다. 아모스 4장 10절에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3) 급기야는 하나님이 전쟁을 주었습니다. 아모스 5장 3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4) 결국 파괴를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아모스 5장 7절에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습관적인 종교 행위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너희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아모스 5장 21절에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여전히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종교 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변화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Ⅱ.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찾는가? [방법론(Methodology)적인 질문입니다]

여기에 찾는다는 의미는 없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 아니고 소유했다가 잃어버린 것을 내 것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를 찾으라는 말의 의미는 내게로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1) 지역을 초월해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 5장 5절에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화란으로 내려갈 때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이곳에 언약궤가 있었고 선지학교도 있었습니다.
왜 이곳을 찾지 말라고 했습니까? 여로보암 때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남북으로 갈라진 후에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세웠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벧엘의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범죄케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아모스 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을 벌하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더럽혀진 성지를 사모하지 말고 낡은 전통과 죽은 전통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2)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5장 5절에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이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 그들은 길갈을 여호수아의 전쟁 작전기지로 삼았습니다. 이곳은 그 후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곳이며 이곳은 종교, 정치, 군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70인역에는 '들어가지 말며' 뜻이 '타협이나 의지하지 말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데 세상의 권력이나 풍요 속에서 찾지 말고 사람들과의 타협이나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3) 물질을 초월하라고 했습니다.
본문 5장 5절에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브엘세바』란 '맹세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유대 나라의 우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재산이었습니다. 『나아가지 말라』는 뜻은 '본척 만척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물리적인 것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4) 날마다 찾아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2절에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기록한 말씀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형식적이며 도리어 자기의 뜻이 먼저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말은 ① 호소한다 ② 신뢰한다 ③ 가까이 한다 ④ 섬긴다 ⑤ 따라간다 ⑥ 다시 돌아와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한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 27편 8절에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잠언 28장 5절에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고 했습니다.

(3) 주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시편 9편 10절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4)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풍요와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시편 34편 10절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5) 환난 날에 주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2절에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6)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7)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으면 만난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8)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난다고 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9)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10)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11)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구하면 여호와를 만난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4장 29절에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Ⅲ. 여호와 하나님을 왜 찾아야 하는가? [가치론(Axiology)적인 질문입니다]

1) 상 받기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상 주시는』이란 『갚아 주시는』이란 뜻입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급입니다. 그는 방패시요 긍휼이 여기시는 자요 안전하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이것은 하늘의 복과 땅의 복입니다. 금세의 복과 내세의 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는 이미 상을 받은 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 일을 많이 맡은 사람은 이미 상을 많이 받을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2) 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장 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살고 믿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모스 8장 11절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기서 『기근』은 외적인 기근이 아니라 영적인 기근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일년 음식 쓰레기가 3조원에 이른다는 통계를 감안할 때 먹지 못해 굶어 죽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시편 74편 9절에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9절에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5장 6절에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는 소름끼치도록 오싹함을 느낍니다.
전파하는 이가 있어야 듣는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4-15절에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택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전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디도서 1장 3절에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에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방학이 있고 쉬는 시간이 있는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중단 할 수 있는 권한이 사람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중단하면 화가 임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할 때 백성들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전파하지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8-9절에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를 구하는 일과도 같은 것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싣고 가는 엠브란스가 멈추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복음전파도 중단되어서는 안됩니다. 복음 전파는 마치 피가 없어 죽어가는 환자에게 혈관에 생명의 피를 수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운동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당위적인 지상 명령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중심하고 전개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와 정상적인 관계를 견지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마지막 날에 살아남을 교회는 박물관적 교회도 아니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교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만이 살아남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 그리고 여러분들이 받은 축복의 기업이 끝까지 살아남아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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