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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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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20)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에 들어서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과 ‘마틴 스콜세이’ 감독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입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는 1988년 미국에서 처음 상영될 때부터 ‘악마의 필름’이라는 별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수입이 되었는데, 2002년 비로소 개봉되었습니다. 기독교의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2004년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 맞추어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대박을 터뜨린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님의 마지막 12시간에 그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본 사람들은 기억나시겠지만, 누군가의 표현처럼, “맷집이 좋은 사내를 시종일관 두들겨 패는” 폭력이 핵심입니다. 살점이 튀고 피가 흐르는 그런 장면들이 연출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 때문에 예수님이 저런 고통을 당하셨구나.”하는 감상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동이 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공감하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좀 혹평하자면, 별다른 신앙적 교훈을 주는 바 없는, 상업영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는, 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는지 등의 예수님의 내면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얻어맞는 모습만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대사도 거의 없습니다.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는 했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그런 깨달음은 얻을 수 없었다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예수님의 내면을 파고 들어갑니다. 매순간 귓가에 맴도는 신의 음성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의심하면서 몸부림치는 모습.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갈등에서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모습. 끝내 십자가에 달리기는 했지만 마지막 유혹을 당합니다.

그 유혹이라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별 거 아닙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이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이나, 세상의 권세와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사탄에게 절하라는, 광야에서의 유혹에 비하면 정말 별 거 아닙니다. 그 유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유혹입니다.
“아!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았으면…….”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 유혹이 된 겁니다. 그냥 세상에 대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냥 그렇게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려고 하는 그것이 예수님에게 있어 유혹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렇게 부르짖어도 묵묵부답입니다. 아무런 대답도 없습니다. 당신은 백성을 구원한다고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는데 그 백성들은 손가락질하고 조롱합니다.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이럴 때, 제자들이라도 나타나서 변호하는 한 마디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제자들조차 모두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고 장담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선 숨어버렸습니다. “주님, 주님” 하고 따르던 가룟 유다는 아예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겁니까? 과연 십자가 고통을 당하고 죽는다 해서, 그 백성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인정이나 하겠습니까?

‘니코스카잔차스키’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Eli... Eli...(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고통 받는 자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숨이 닿지를 않아 할 수가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이는 머리를 떨구었고, 기절하였다.”
그리고 제30장에서 제33장까지, 세상의 삶을 삽니다. 그냥 평범하게 삽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아이를 낳고 키우며, 허연 수염을 늘어뜨릴 때까지 삽니다. 많은 사람들, 베드로와 바울까지 예수님을 찾아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야기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그는 정신을 차려 이곳이 어디고, 내가 누구이고, 왜 아픔을 느끼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의 외침은 마무리 지어, 라마 사박다니(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는 입술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어지러워서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싶었다. 그는 밑으로 내동댕이질을 당해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갈대 끝에 매달린 식초를 적신 해면을 그의 입술과 콧구멍에 대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 강렬한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고는 정신을 차려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라마 사박다니!

“그는 머리가 흔들렸다. 얼핏 그는 이곳이 어디이고, 내가 누구이고, 왜 고통을 느끼는지 기억이 되살아났다. 맹렬하고,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렇다. 그렇다. 그는 겁쟁이, 도망자, 배반자가 아니었다. 그렇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는 최후까지 명예롭게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으며, 약속을 지켰다. 그가 Eli Eli 라고 소리치며 기절했던 순간에, 아주 짧은 한순간 동안에 <유혹>이 그를 사로잡아 못된 길로 이끌었다. 기쁨과,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거짓이었으며, 그에게 겁쟁이, 도망자, 배반자라고 소리치던 몰락하고 노쇠한 노인들도 거짓이었다. 모두가, 모두가 악마가 보낸 환상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꿋꿋하게 살아 있었다. 그들은 바다와 뭍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올바르게 이루어졌나니, 하나님께 영광을!
그는 승리감에 차서 소리쳤다 ---- 이루어졌나이다!
그리고 그 말은 이런 뜻이었다 ---- 모든 일의 시작이니라.”

빛으로 오신 예수. 그 빛은 창세기의 빛이 아닙니다. “빛이 있어라” 그래서 있게 된 빛이 아닙니다. 생명 되시는 예수. 그 생명은 창세기의 생명이 아닙니다. 흙으로 만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얻게 된 그런 생명이 아닙니다.

어쩌면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겪으시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겪으신 예수. 채찍에 맞고, 못에 박히는 육신의 아픔마저 겪으신 예수. 그렇게 해서 어둠을 밝힌 빛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6:53-5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분의 빛 되심, 그분의 생명 되심은 당신의 살과 피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데 있습니다.
그러셨습니다. 예수, 그분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자 당신 스스로 어둠이 되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 스스로 죽음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림을 받았고, 우리의 악함 때문에 그가 상처를 받았고,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계를 받았고, 우리의 병을 낫게 하려고 그가 매를 맞았다고 하셨습니다.(사 53:5)
한 번 여러분의 삶을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어서 표현해 보세요. 어떻습니까? 빛입니까? 어두움입니까? 신나고 즐겁습니까? 답답하고 힘듭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빛과 어두움으로 표현해 보세요. 빛입니까? 어두움입니까?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보금자리가 있고, 들이나 산을 뛰어다니는 짐승들도 머물 보금자리가 있는데, 예수,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습니다. 걸핏하면 사두개파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 제사장, 이런 사람들이 나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끝내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우리 보기에 그분의 삶은 빛보다 어두움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실, 이 육신의 아픔은 아픔도 아닙니다. 당신의 제자가 당신을 팔았습니다. 3년이나 따르던 당신의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동안, 귀신들려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었습니다. 병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도 못한 사람을 걷게 하였습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의 귀를 고쳐서 듣게 하였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의 눈을 고쳐서 보게 하였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천명을 배불리 먹이기도 했습니다. 그것 다 경험하고, 보고 들은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겁니다. 이건 채찍에 맞은 아픔보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아픔보다 몇 배나 더 큰 아픔입니다.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라지.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다.”(마 27:42-43)

그럼요. 예수, 그분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조롱을 듣고도 내려올 수 없는 겁니다. 내려오고 싶어도, 능히 그럴 수 있어도 내려올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니까. 그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니까. 그것이 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니까. 그것이 이 죽은 자들에게 주는 생명이니까. 그래서 십자가 위, 그 죽음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기에 예수, 그분은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겁니다.

세상의 빛은 어둠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태양 빛이 내려쪼여도 손바닥으로 가리면 그늘이 생깁니다. 어둠이 생깁니다. 세상의 생명. 아무리 모질고 모진 것이 생명이라지만 얼마든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비추는 예수님의 빛은 어둠이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빛은 어떤 어둠도 뚫고 밝힐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주어진 예수님의 생명은 어떤 죽음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56-57,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는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때 ‘승리’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승리, 그것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고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믿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을 믿습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아직도 어둠 가운데 숨어 있는 여러분! 지금, 빛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의 빛을 얻으십시오.

요한복음 1장은, 빛 되시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4-5)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 1:9)
그러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요 1:10b)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 1:11) 또 하나는,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 1:12)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요 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할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3:18-21,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빛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본질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빛 가운데 나아간다는 것은, 마치 어둠에 있다가 밝음으로 나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양지달음 하듯 그렇게 빛 가운데 나가는 것 아닙니다.
빛 가운데 나간다는 것은 곧 그가 빛이 되었다는 겁니다. 빛이 아니고서는 빛 가운데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 앞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나가는 사람은 빛이 되었고, 그래서 빛 가운데 나가는 사람은 빛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손 안에다 어둠을 담아보십시오. 그리고 그 손을 펴보십시오. 어둠이 보입니까?
빛 가운데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이제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됩니다. 빛 되시는 예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곧 빛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라고 하신 겁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아가면 이제 여러분은 빛입니다. 생명 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면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물론, 예수 믿었다고 외형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코가 달라집니까? 눈이 달라집니까? 그러나 본질이 달라집니다. 같은 몸이지만,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삶의 의미,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갈라디아서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땅을 위해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빛이 있게 하는 일이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왜 빛부터 있게 하셨습니까? 어두우니까? 물론 그렇기도 할 겁니다. 컴컴함 안에서는 정돈조차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빛이 있다는 것은, 비로소 모든 것들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캄캄한 방. 무엇이 있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등의 스위치를 켜는 순간, 빛이 생겨나고, 그러면 무엇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빛이 있으므로 책은 책의 모습을 드러내고, 꽃은 꽃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는 저 그림은 그 존재가치가 없어집니다.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도 모릅니다. 그림이 저기 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게 되면, 저 그림은 비로소 그림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가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시기 전, 우리는 구원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내가 죄인인지도 몰랐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그래서 살아있는 송장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오셔서 이 어둠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볼 것을 보게 하시고, 들을 것을 듣게 하시고, 깨달을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생명의 빛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세상의 빛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증언해주어야지요. 사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신빙성이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곧 진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둠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내 증언은 참되다.”고 하신 겁니다.

영국의 유명한 화가 ‘핸드’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 가운데 ‘세계의 빛’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이 손에 등불을 들고 서계시는 그림입니다. 등불에서 비치는 빛이 어두운 복도를 밝히면서, 이 세상의 어두움을 놓고 한탄하시는 예수님의 얼굴까지 비추고 있는 그림입니다. 한 때 이 그림이 인기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샀답니다.
그런데 미술 평론가였던 ‘그린 호프’라는 사람이 그 그림을 비판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호되게 말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손에 들고 있는 등불에서 빛이 나올 수 있느냐? 예수님 자신이 빛인데, 빛이 나오려면 예수님 자신에게서 나와야지, 왜 예수님이 손에 든 등불에서 빛이 나오느냐? 저 그림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린 호프’가 제대로 본 겁니다.
예수님은 손에 든 등불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빛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이 여기 있다.”하고 그렇게 생명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생명 자체를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혹은 고난주간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고. 그런데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십자가 만들어서 지고 다니면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로 가는 겁니다. 죽음에서 나와 생명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예수, 그분이 우리의 빛이 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 그 고난의 자리에서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끝내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주님,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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