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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구지학(一丘之狢)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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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지학(一丘之狢; 빌립보서 2:1~11절)

빌립보서 2:1~1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 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一 : 한 일
丘 : 언덕 구
之 : ~의 뜻, 어조사 지
狢 : 담비 학.

한서(漢書) '양운전'의 이야기에 관련된 일화입니다. '양운'은 한(漢)나라 소제(昭帝) 때 승상을 지냈던 '양창(楊敞)'의 둘째 아들이며,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자였습니다.

그는 가문이 좋은데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젊은 나이에 조정에서 요직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큰 명성을 누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한 태도를 드러냄으로써 남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양운'은 특히 선제가 가장 총애하는 태복(太僕) 벼슬의 '대장락(戴長樂)'과 사이가 나빴습니다. 한번은 '대장락'이 누군가로부터 고소를 당하자 '양운'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장락'도 '양운'을 비방하는 글을 '선제'에게 올렸습니다.

'양운'은 당시 <흉노에서 항복한 자들로부터 '선우(單于)'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못난 군주는 대신(大臣)이 나라를 다스릴 방책을 잘 계획하여도 채용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기 몸을 둘 곳을 없게 만든다. 이는 마치 진(秦)나라 때 소인을 기용하고 충신을 주살하여 멸망에 이른 것과 같으니, 대신을 신임하였더라면 진나라가 지금까지 존속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군주는 한 언덕에 모여 사는 오소리와 다를 바 없다(古與今如一丘之狢 )."라고 하였습니다.

'대장락'은 "양운은 망령되게도 망국의 예를 들어 현재를 비방하였으니 신하된 도리가 아닙니다."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를 본 '선제'는 화를 내며 결국 '양운'과 '대장락'을 모두 죽이지 못하고 관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양운'은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답답함을 호소했는데, 이 사실이 한나라 '선제'에게 발각되어, 결국 허리를 절단하는 형벌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이 고사는 《한서(漢書)》의 「양창전(楊敞傳)」에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유래하여 '일구지학'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부류, 한통속의 나쁜 무리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서로 격이 어울리는 것끼리 짝이 된 경우에 하는 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뜻이요, '유유상종(類類相從 : 같은 동아리끼리 서로 오가며 사귐.)'이란 뜻입니다.

나쁜 방향으로 악을 꾀하고, 죄를 범하며, 악한 일을 도모하는데 같은 부류가 되면 안 되지만 좋은 방향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 된 삶을 선택하여 주님의 뒤를 따라가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따라가야 합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이나 나 개인의 삶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데는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와 성격과 비전'에 따라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고,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창조적일 수도 있고 진보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결코 나 개인의 수단과 방법과 욕심과 감정으로는 아무런 진보도 발전도 있을 수도 없으며 창조적일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나의 혈과 육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치명적인 상처와 복음을 방해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헌신과 수고와 봉사를 아낌없이 쏟아놓아도 겸손을 잃어버리고 교만하면 패망의 선봉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하고 길이 형통하지 않고, 형통의 문이 열어지지 않을 때에는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5절 말씀에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시며,

말라기 4:1절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라고 하셨습니다.

교만은 두 마음으로 갈라서게 하는 이간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만은 하나 된 길을 가는 통로를 가로막거나 갈라서게 하는 분열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앞잡이가 되는 통로입니다. 사단은 때때로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1:14절에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하였으며,

마가복음 8:33절에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라고 하였는데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따르게 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거치는 존재', '반대하는 세력'과 '혼돈'과 '혼란'과 '혼미'를 가져오게 하며, 이 땅에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막아 버리게 합니다.

이 때 '진가의 결혼식'이라는 중국 우화를 기억해야 합니다. 내용은 진씨 가문에서 '결혼잔치'를 앞두고 가축 한 마리를 잡아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위를 잡고자 불러놓고 그 뜻을 전했더니

"나는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지 못하는 수탉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거위를 보내고 수탉을 불렀더니

"이래보여도 저는 아침을 전하는 신성한 의무를 어김없이 해내고 있습니다. 먹고만 노는 양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양을 불렀더니 양은 변명합니다.

"그 추운 겨울을 나는 것은 나의 털 덕분인 걸 잊고 계십니까? 개야말로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개를 잡으십시오."라고 개에게 미루었습니다. 개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저를 늑대로부터 지켜 준 것이 누구인데!" 라고 욕을 하더니 '말은 많이 먹는 것만큼 득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말은 말대로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멀리갈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택입니까? 같은 등이라고 해도 소등과는 다릅니다. 소를 잡아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도는 변명합니다.

"나없으면 누가 밭을 갑니까? 놀고 살만 찌는 돼지가 적격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돼지는 "땅만 갈면 다인가요.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을 생각 못하십니까?"라고 핑계를 댑니다.

이렇게 따로따로 불러다가 나름대로의 가축들의 주장을 듣고 보니 어느 짐승도 잡을 수 없음을 알게 됐습니다. 화가 난 '진가'는 무두 불러놓고 "그렇다면 너희 모두를 잡아버릴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하인으로 하여금 칼을 갈게 하였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가축들은 긴급 가축회의를 갖고 진지하게 대화를 했답니다. 거위가 일어서 "주인을 늦잠자게해서는 안 되니 수탉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자신이 잡혀 죽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수탉'도 자신의 직책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양의 존재를 높게 평가하는 식'으로 번갈아 '돼지'에 이르기 까지 모든 가축들이 너도 나도 자신들이 희생하겠다고 자원하자 이 '가축회의'를 지켜보던 진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잔치를 벌이지 않겠다."하고 마음이 돌아섰답니다. 그래서 어느 짐승도 희생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우화의 교훈은 교만해서 서로 자기주장만 내세우면 다 망하게 되지만 '겸손하게 남의 말을 뜯고 수용하면 함께 살게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설교제목에 '일구지학'이란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특별히 잘난 사람도 없고, 특별히 못난 사람도 없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허물이나 단점을 보고 비난이나 비평이나 인격이나 마음에 상처를 주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의 장점을 보며,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며, 존중하며, 필요한 존재임을 알아주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 권고하는 '겸손한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한 줄 믿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으면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가 보장 될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으니 이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앞으로의 비전과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오직 겸손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를 귀히 여기는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력하며, 나보다 상대방을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짐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고 고개를 넘어가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무거운 연탄을 들고 힘들게 고개를 오르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레가 가볍고 쉽게 오르막길을 올라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수레를 끄는 할아버지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다 올라가고 난 후 할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가십니다. 연탄을 힘들게 여러 개를 들고 가던 이 분이 리어카에 함께 놓고, 뒤에서 밀어 드렸더니 자신의 짐도 가볍고, 보람도 느끼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나도 힘이 들지만 나이 드신 분이 너무나 힘들게 가니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나의 편에서 살펴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던 연탄이 오히려 가볍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의 여러 족속들과 싸울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싸움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싸움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싸움은 자기들의 능력 이상의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힘은 힘대로 들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두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툼과 허영으로 하는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겸손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세로 하는 경우입니다. '다툼과 허영으로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교만이 되기 쉽습니다. 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다툼과 허영으로 일을 해도 좋은 결과가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인간적으로 좋은 계획을 세워서 여러 사람이 뛰어다니면서 모금을 해서 자금을 마련하고 홍보를 많이 해서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면 '성공적인 사업'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자세로 일을 하지 말고 "겸손과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세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툼과 허영으로 일을 하면 그것이 나에게 진짜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도 '목표 지향적(goal-orieted)인 스타일'과' 관계 지향적 (relation-oriented)인 스타일'로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으로 일을 할 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주님은 그렇게 해서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는 내가 변화된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관계 지향적’으로 즉,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일을 할 때 결과도 좋고,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반드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창한 계획을 세우느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계획과 수고에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하나가 되어 협력할 때 우리 안에는 주님이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먼저 유익과 축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하라고 하셨으니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어 서로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잘 감당 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본문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좋은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의 사함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목적, 영혼 구원을 위한 대속의 사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지신 마음은 언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눈높이를 낮추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외식업계에 외국에서 들어온 식당에서 대표적으로 메뉴를 주문할 때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지 않습니까? 같은 가격에 같은 조건으로 식사를 하더라도 겸손하게 나를 높여주는 식당을 찾게 되지 않습니까? '눈높이 교육도 알고 보면 교육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교육하자는 취지 아닙니까?' 그래야 ‘교육 효과의 극대화가 이루어  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같은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품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남을 위한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서로 돌아볼 때 돌아보는 사람이 오히려 인격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고 사랑이 자라고 헌신이 자랍니다. 물론 돌아봄을 받는 사람도 자랍니다. 일석이조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대부분 자신의 목표를 지나치게 높은 것에 두고 스스로 불만족해 하고 낙심합니다. 그리고는 열등해하고 자존심 상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진토인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이 만큼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이상을 너무 높은 것에 두고 비관, 낙심, 좌절하면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2:6절에 예수님께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면 자주 '의상 패션쇼'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델들이 들락날락 거리면서 이 옷 저 옷을 바꿔 입고 나와서 맵시가 있게 그 옷을 유행시키기 위해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전문적인 용어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본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7절의 '종의 형체'라고 할 때 '형체'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포기하고 사람의 본질이 되셨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본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몰페'라는 말인데 영어로 번역을 하면 '패션'이 가장 가까운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패션은 우리가 생각하는 패션과는 정 반대의 뜻입니다. "원래 패션이라는 말은 '존재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영화나 연극에서 배우가 장교의 복장을 하고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장교가 아닙니다. 단지 '장교의 역할'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장교가 되려면 사관학교를 졸업하든지 아니면 소정의 군사 훈련을 받고 임관을 해야 진짜 장교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패션'이라는 말은 정식 군사 훈련을 받고 장교가 된 사람이 장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패션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원래 '하나님의 패션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역할을 하거나 하나님의 대리자 임무를 수행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의 신분에 맞는 존재 양식을 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우주와 태양과 은하계도 없고 지구도 없고 천사들도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영광 가운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스스로 존재하신 창조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밝힌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의 대속물로 죽어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다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말은 '움켜쥔다. 또는 탈취한다.'는 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계급장을 떼이고 이병으로 제대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을 빼앗길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 영광의 자리를 고수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영광을 잠시 포기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길을 선택하셨으며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들에 무서운 죄악 가운데서 멸망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속죄의 제물, 대속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죄의 짐을 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실 때는 자신은 죄가 없는 무이셨지만 구약의 속죄 제물처럼 모든 죄를 걸머지셨기에 하나님마저 외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버림까지도 받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영광을 잠시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기 원하며, 신분 상승의 기회를 찾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낮아지셨습니다. 본문 7절에는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절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헌신이며, 희생이고, 사랑이며, 섬김을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결국 <희생과 섬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눈높이를 낮추어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눈높이를 낮추면 세상에 나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게 됩니다.

마가복음 10:45절 말씀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일에 얼마나 희생하고 헌신하고 섬기면서 감당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우리 교회 성도들은 서로 희생과 섬김을 각오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진정한 섬김에 있습니다. 주장하는 자세나 자기 의를 드러내기에 급급해 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종의 형체로 살 수 만 있다면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0:24~25절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권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권면하면서 "모이기를 힘쓰라."고 분부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자주 모이고 그리고 서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볼 때 모두가 신앙과 인격과 은혜와 축복이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겸손하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 되는 목적과 이유는

3.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림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따라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되고, 타인에게는 은혜를 끼치며, 자신에게는 축복이 되고, 후세에는 간증거리를 남기는 사람이 되자." 그러므로

① 하나님의 일을 맡아 감당해 오면서 '자기 의로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큰 '불의'이며,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 앞에 모든 땅의 것들로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요.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분문 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죽고 내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목표로 헌신하시기를 부탁합니다,

② 본문 4절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돌아볼 때 사도 바울이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의 참된 뜻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빌 4:18절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이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질로 본사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서로 봉사하고 서로 모이기를 힘쓸 때 모두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행2: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고 하였습니다.

  순전한 기쁨은 성도의 교제에서 생깁니다. 순전한 기쁨은 성도들을 서로 돌아보는 데서 생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중에 혹시 기쁨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서로 돌아보는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돌아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얼굴에 웃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군가와 사이에 막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교제와 화목을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징하고 이웃과의 교제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교제를 폭을 넓혀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서로 돌아보는 일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 프랜시스'처럼 그렇게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다 돌아보라는 말은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처럼 그렇게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의 신자들을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척들과 이웃을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볼 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삶의 뿌듯함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서로 돌아보아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교제와 돌아봄이 충만한 교회를 만드는데 기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③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언제나 순종해야 하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 온 동안 내 이름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가려지지는 않았습니까? 나의 외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려지지는 않았습니까? 나의 교만 때문에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무안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사는 목적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본질적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하여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기쁨을 얻도록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성도님들에게 간곡하게 권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나보다 상대방을 낫게 여기며, 한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일구지학’ 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의 본질적 사명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목회기도>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어주시되 주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희생과 섬김으로 저희들을 구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저희들도 육체의 소욕과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본받기 원합니다. 저희들이 계획하는 일이 다툼과 허영으로 하는 일이 되지 않게 하시고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게 하시고, 주님의 도움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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