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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네시보로의 심방 (딤후 1:15-18)

  • 잡초 잡초
  • 2016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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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바울이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을 칭찬하고 고마워하는 내용입니다.
오네시보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네시보르라는 인물은 성경에 여기와 디모데후서 4장 19절 두 군데에만 나옵니다.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워서 저도 여러 번 연습하고 단에 섰습니다.
오네시보로, 오네시보로, 오네시보로….

오네시보로라는 이름의 뜻은 ‘도움이 되는 사람’입니다.
에베소 사람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복음을 받아들여 에베소교회의 중요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봉사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18절 끝을 보세요. “또 그가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한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17절을 “그가 로마에 와서는 나를 찾느라고 굉장히 애쓴 끝에 나를 만났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로마에 와서 ‘바울이라는 사람이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수소문하고 다닌 것 같습니다.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게 된 다음에는 면회를 신청하고, 여러모로 애를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구치소나 교도소 같은 곳에 가서 면회를 하려면 여러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하고 제약이 많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더 엄하고 까다로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네시보로를 칭찬하고 고마워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오네시보로가 한 일을 두 글자로 말해 ‘심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방은 일반적으로 교역자둘이 성도를 방문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심방에 대해 살피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교회는 심방을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교역자도 심방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성도들도 심방을 중요하게 여겨야합니다.
심방은 먼저 목회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목회초년병이 목회에 성공한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회성공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세 가지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설교 준비, 하나는 기도,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여기에 대답하지 못하는 성도는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심방입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준비 열심히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그리고 심방 열심히 하면 목회는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조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심방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속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심방입니다.
감리교 교리와 장정은 제114단에서 권사의 직무를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신자들을 심방하고 낙심한 이들을 권면하며 불신자들에게 전도한다.’ 입니다.

이것을 합해서 ‘심방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감리교회가 금강산 온정리를 찾고, 해외의 빈곤지역을 찾으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데 ‘희망심방’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심방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심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성도들의 생활이 너무 분주해져서 심방은 부담이 된다. 이제는 심방에 쏟던 힘을 다른 데 쏟아야 한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교회는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바로 신년축복대심방을 시작합니다.
이 신년축복대심방은 부활절 전까지 계속됩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신년축복심방을 하고, 부활절을 지키고, 그리고 심령대부흥회를 하면, 새해 첫 부분의 목회가 매듭지어집니다.
지금이 신년축복대심방 기간인데 이 기간에는 심방이 우선순위 1번입니다.
교회에 전화해서 교역자를 찾으면 ‘심방 나가셨어요.’ 하는 대답을 들은 일이 많을 것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심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맞는다면 우리 교회는 지혜롭지 못한 교회가 됩니다.
이런 주장은 목회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바로 그런 종류의 소리를 많이 하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심방에는 직접 방문, 편지, 전화, 여러 형태가 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메일 심방’ ‘문자 메시지를 통한 심방’ 이런 것들을 추가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심방은 중요하지 않다.’ 하는 것은 철저하게 틀린 이야기입니다.
목회자들은 심방을 통해 ‘성도들의 형편이 어떤가?’ ‘기도제목은 무엇인가?’  ‘양 떼들은 무엇을 목말라 하는가?’ ‘무엇을 먹일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방은 정성껏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정성껏 준비’라는 것은 음식 준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설교는 듣는 사람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은혜를 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듣는 사람이 반은 한다.’고 말합니다.
심방도 받는 성도가 반은 합니다.

늘 그러는 것이지만 지금 신년축복대심방을 하면서 심방을 받는 성도들의 정성에 놀라곤 합니다.
집을 잘 청소하고, 정리하고, 심방감사헌금을 마련합니다.
필기구를 갖추고 메모를 하면서 심방을 받습니다.

군대에서 내무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무검사가 있으면 군인들은 내무반을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하고 잘 정리해야합니다.
외울 것들, 군인의 길, 자기의 임무, 부동자세의 목적, 이런 것들 다시 외워야합니다.
심방을 하면서 ‘내무검사 받는 군인들이 준비를 더 잘 준비 하나? 심방 받는 성도의 가정이 더 잘 준비하나?’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피시고 심방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심방은 심방하는 사람의 몸을 매우 지치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작년엔가 수련목들의 수련과정의 하나로 수련목들을 심방에 동행하게 했습니다.
젊고 건강한 수련목들이 얼마 따라 않아서 몸살을 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같은  피곤을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심방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정성과 심방에 대한 기대를 생각하면서 심방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의 내무검사 준비는 사실 좀 짜증내면서 하는 것입니다.
좀 짜증내면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아주 짜증을 내면서 합니다.
‘내무검사가 없으면 군대생활도 할 만 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심방 준비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십 여 년 전에 제주도에 있는 한 선교방송을 몇 해 섬긴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알게 된 일인데 제주도의 교회들은 심방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 방문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무당을 제주도 방언으로 심방이라고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교회에서 심방을 더 열심히 하고 심방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써서 사전에 ‘심방은 예전에는 무당을 말하는 제주도 사투리라는 이었는데 지금은 교회에서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찾는 것이라는 뜻이 더 강해졌다.’  이렇게 기록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방송도 하고 글도 쓴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심방이라는 말의 비중이 점점 무거워지도록 힘써야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오네시보로의 옥중심방을 감사하는 내용인데 바울도 자유로울 때는 심방에 힘썼습니다.
바울은 일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선교본부인 안디옥에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의 일을 사도행전 15장 36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이것이 심방입니다.
성경에는 심방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방문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데 이 방문이 바로 심방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심방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도 심방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8절에 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52장 1절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 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10장 15절에 다시 인용되었는데 심방하는 발은 아름다운 발입니다.
모두 이 아름다운 발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심방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심방을 통해서 변화되고, 심방을 통해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둘째, 심방의 본질을 알아야합니다.

설교 준비를 할 때 본문과 제목을 정하고, 본문을 여러 번 읽고, 여러 성경을 대조하면서 읽고, 주석을 보고, 예화집을 보고, 기도를 하고 이런 과정을 밟습니다.
요즘은 하나 더 해야 합니다. 무언지 아시겠습니까?
인터넷에서 그 날 설교의 주제를 거지고 검색 하는 것입니다.
젊은 교역자들일 수록 이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심방’이라고 쳤더니 의외로 많은 기사들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 클릭할 수는 없어서 ‘어느 것을 클릭해서 참고하나?’ 돌아보는데 ‘예수님이 행하신 심방의 열 가지 모습“이라는 불로그가 있었습니다.
클릭해 보았더니 시작 부분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특정한 교회건물을 세우고서 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목회를 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찾아오게 하기보다는 직접 양들을 찾아 나섰고 개인적 만남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셨다. 이리저리 직접 찾아다니면서 심방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목양사역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심방의 특정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심방은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서 예수님이 행하신 심방의 모습
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은 인격의 직접적인 만남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만남을 통한 삶의 변화였다,
예수님의 심방은 소외된 음지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성과 촌을 두루 다니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일하고 있는 삶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깊고 친밀한 대화를 통한 말씀과 제자양육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집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모든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만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심방은 치유를 통한 고난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몇 가지 말했습니까? 
아홉 가지를 말했습니다.
열 번째는 어떤 것일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심방은 영혼구원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열 번째, 영혼구원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심방의 본질입니다.

연세 마을 분들이 ‘마실 간다’는 말을 하지요.
마실은 마을의 사투리인데 이웃에 놀러 다니는 것을 ‘마실 간다’고 합니다.
영혼구원에 우선적인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심방은 마실과 구분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른편의 양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병들었을 때 돌보는 것,  누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오네시보로와 같이 가서 보는 것, 심방입니다.
나가서는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 모두가 심방입니다.
심방은 우리를 양의 반열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구분하는 것을 읽으면서 저는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디모데후서 전체에 나오는 사람들을 둘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끝까지 따르고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편의상 이 사람들을 A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옥에 갇히니까 바울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편의상 이 사람들을 B팀이라고 하겠습니다.
15절을 보세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시아는 지금과 같이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해서 아시아올림픽에 참가하는 나라들이 있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아시아의 서쪽, 에게 해 서남부를 말합니다.
그저 오늘날의 터키를 말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 때 로마 제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수도는 에베소였습니다.
그 지역의 교인들이 다 바울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버리고 떠난 모양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너무나 상처가 되고 섭섭해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A팀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15절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A팀입니까, B팀입니까?
B팀입니다.

4장을 보세요. 10절에 데마가 나옵니다. A팀입니까, B팀입니까?
데마는 B팀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10절에 나오는 그레스게, 디도, 두기고, 이런 사람들은 당시에 로마에 바울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명령을 받아 전도하기 위해 각지로 간 사람들이므로 A팀에 넣어야합니다.
11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A팀, 11절에 나오는 마가는 바울이 일차전도여행을 할 때 바울 일행에게서 떠났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B팀이었다가 A 팀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왜 합니까?
성도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A팀으로 기록되기 바라서입니다.
교회의 역사라든가 교회와 관련된 이 땅의 각종 기록에도 A팀으로 기록되기 바랍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 회사, 기관, 자기가 섬기던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떠나지 말고 어려움을 같이 하는 절개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해 A팀이 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시지요?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그 사랑, 그 관심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심방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심방은 기독교의 핵심을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방의 본질과 함께 심방의 유익도 알아야합니다.

심방은 교회를 부흥하게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개신교가 탄생했습니다.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618년에 시작해서 1648년에 끝났습니다.
30년 동안 싸웠기 때문에 30년 전쟁이라고도 하고 종교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쟁 때문에 유럽의 인구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 위에 페스트가 돌아서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전쟁 뒤에 각 지역은 개신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실레지아(Silesia)라는 가톨릭 지역에 조그만 개신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루터교회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통나무에 흙을 바른 움막 비슷한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k 1672-1737) 목사님이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톨릭의 통제를 받으며 목회를 해야 했습니다.
종탑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러시아 로스토프에 다섯 개의 교회를 세워 돌보고 있는데 하나도 십자가를 달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스토프 교회 하나만 벽에 벽돌로 십자가 모양이 조금 튀어나오게 했을 뿐입니다.
러시아정교회의 보이는 압력,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입니다.
벤자민 슈몰크 목사님이 돌보는 지역에는 36개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1703년 사순절 기간에 슈몰크 목사님은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중풍과 백내장에 걸렸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반신불수 지체장애인이 되어 목회를 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특히 심방에 힘썼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그 넓은 지역을 쉬지 않고 돌면서 교인들을 보살폈습니다.
교인들은 그 사랑에 감복해서 슈몰크 목사님이 심방을 오면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심방을 통해 교회가 그 어려운 처지 가운데에서도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에 대해서는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1704년 어느 날, 사모님과 함께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니 교회에 불이 나서 교회당과 목사관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관 잿더미를 파헤치니까 거기에 타죽은 두 아들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잿더미 위에서 두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것이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원래는 열한 절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는 431장은  그 가운데 1절, 5절, 11절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기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으면 슈몰크 목사님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심방은 성도를 위해 서로 기도하게 해 줍니다.

본문을 보세요. 바울은 자기를 심방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주님께 두 번이나 간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쓸 때 오네시보로는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네시보로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하지 않고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더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당사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까지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방은 받는 사람에게 격려가 됩니다.
바울과 같은 대 사조도 오네시보로의 옥중심방을 통해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심방은 성도의 교제를 깊게 합니다.
심방의 본질을 잘 알고 심방에 힘쓰는 가운데 심방의 유익을 많이 누리는 성도들이 되고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방을 거절하지 말아야합니다.

심방은 사람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시고 권고하시고 죄인된 인간을 구하시려고 하는 것, 이것도 심방의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심방을 거절하지 말아야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하셨습니다(창 3:9)
아담이 하나님의 이 심방을 정직하게 받았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이 심방을 정직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에도 가인을 심방하셨습니다.
가인을 찾아오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하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이 심방을 성실하게 받았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이 심방을 성실하게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심방하셨습니다.
이 심방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밤에 이뤄졌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따라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약속은 이뤄지지 않고 아내를 빼앗길 번 하고, 조카와 갈등을 겪고, 그 조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하고 고생스러운 일만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으니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환상 가운데 심방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 가 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밤하늘의 뭇별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심방 이후에 아브라함이 달라진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대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성화를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홀만 헌트(1827-1910)이라는 화가가 그렸는데 그 그림을 자세히 보세요.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실수를 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화가는 아니라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손잡이가 안에만 있어서 그 사람이 열어 주어야만 예수님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심방 오신 예수님을 밖에 세워 두지 마세요.
찬송가 325장 1절의 가사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 두니 못들어 오시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 두니 참 나의 수치라

이것과 같이 그것은 수치입니다. 큰 수치입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324장 4절의 가사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하오니 오소서 오소서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이렇게 말하면서 손잡이를 돌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심방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저는 심방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매년 가을 추석이 되면 로스토프에 선교출장을 갑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곳에 있는 다섯 교회를 돌보고 선교사를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러시아 선교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때 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로스토프 시 북부지역에 있는 장터를 찾는 일입니다.
그곳에서는 장마당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중국동포들이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매대 하나씩을 맡아서 주로 의류를 팝니다. 참 힘들게 지내는 분들이지요.
불법 체류 신분이기 때문에 러시아 경찰들에게 착취당하고, 마피아들에게 시달리면서 지냅니다.
저희가 세운 중국동포교회가 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손을 잡고 기도합니다.
한 나절에 스무 개 내지 서른 개 매대를 심방하면서 손을 잡고 정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그 심방을 기다리고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저는 이것을 ‘치열한 심방’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목회 10년에 잊지 못할 일들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요즘 신년축복 대심방을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심방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면서 마칩니다.
심방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심방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알고, 심방에 힘쓰고, 심방을 받고, 심방을 통해 교회는 부흥하고 성도들은 많은 유익을 얻게 되기를 심방의 모범을 보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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