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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처럼 (히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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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아라 하면 머리 속에 나이 많은 사람으로 그리기 쉽습니다. '노'자가 늙을 노(老)란 어감도 있겠지만 노아하면 젊은이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방주를 짓던 그 때의 평균나이로 볼 때는 아주 젊은 측에 속하는 시기입니다. 노아시대의 평균수명은 구백세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때는 오백세 전후입니다. 육백세 될 때에 홍수가 났기 때문에 방주를 지었던 연한이 백년이 조금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노아가 방주를 짓는 일은 인생의 한창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보지 못하는 일은 노아홍수를 말합니다. 약 백년 전입니다. 백년 후에는 이 땅을 심판하는 홍수가 임할 것이다 라는 것인데 이 역사 속에 장기 기상예보가 노아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백년 후에는 홍수가 임할 것이다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막연한 경고입니다. 언제 임할지도 모르는 홍수,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너는 방주를 지으라" 여러분, 아직 보지 못하는 미래의 일입니다. 그 미래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아주 긴 시간입니다. 노아의 미래이고 역사의 미래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일

  한 어머니가 아이 때문에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아이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줄 방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설교적으로 권면을 해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냥 내 버려 두십시오. 조금 시간이 지나서 철이 들면 제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이들이 지금 하는 행동을 간섭해도, 제재해도 안될 때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세월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고 철이 들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희망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이나 전략이 다르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점점 커 가면 고민스런 일들이 많이 부딪혀 옵니다. 시험을 쳤는데 낙방을 할 수도 있고 뜻대로 안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가지만 짧게 보면 심각합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길게 보면, 내 생에 전체를 보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이 기회를 다 계산해 보면 별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노아는 아직도 보지 못하는 막연한 미래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방주를 예비하라." 노아는 성경에 보면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고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은 조선공사작업이 아니고 단순한 건축이 아니고 그냥 돈버는 일이 아닙니다. 성전건축은 교회가 돈벌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성전을 건축합니까? 경외함으로 건축하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백년 후에 홍수심판이 임하리라는 그 약속을 붙잡고 있는 노아의 믿음이 방주를 짓는 행동을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방주를 지었다"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책임성을 말합니다. 이 약속에 대한 순종을 회피하면 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그 경외심을 가지고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방주는 부실공사가 아니었습니다. 노아방주가 대 홍수를 만나서 얼마나 견뎠습니까? 일년동안 견뎠습니다. 노아 때 홍수는 상상을 못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홍수를 견뎌내었던 방주는 부실공사가 아니었다 라는 것입니다.

  노아방주는 부실공사가 아니다

  요즘 천재냐, 인재냐? 하는 시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는 인재투성이입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것을 가만히 읽어보니까 이러고도 사고 안 나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불을 지른 그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라 사고 안날 줄로 방심하고 사는 우리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고가 안 날 수가 없는 상황들이 지금 우리 환경입니다. 불난 전동차 기관사의 신고가 공식적으로 22분만이라고 합니다. 1분 안에 전동차에 불이 다 붙는데 말입니다. 또 맞은 편에서 온 전동차 기사는 마스컨 키를 빼고 내려서 비상등이 꺼지고 문이 닫혔다고 보도했습니다. 자동차도 시동을 안 켜도 들어오는 불이 있습니다. 전동차도 마스컨 키만 꽂혀 있으면 문도 열리고 전류와 아무 관계없이 전동차 안에서 등이 켜질 수 있는데 마스컨 키를 빼고 내렸기 때문에 그게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망, 부상자의 92%가 맞은 편 전동차 안에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키만 꽂혀 있었다면 92%가 살 수 있었는데 죽었다는 것입니다. 유족들이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유족들이 가족을 잃은 아픔도 형언할 수 없지만 기관사들이 순발력을 발휘했더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힙니다.

  나는 여기서 두 기관사를 탓하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책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 지경이 되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내 허점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만 너무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 볼 때는 훈련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화재사건, 인질사건, 무슨 구조물이 파괴되었다는 사건 등 여러 가지 비상사태를 가상해 가지고 일년에 몇 번씩 훈련시켜야 되는데 교과서에는 다 있고 직원들 연수시킬 때는 다 가르쳤는데도 막상 사태가 발생할 때 행동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소에 해보는 습관이 안되면 비상사태 때 행동이 안 일어납니다. 이 기관사들을 훈련 안 시킨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하나님 앞에 평소에 실행을 해야 됩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순종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기관사들을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정기적으로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당국자가 그것을 해야 비상사태 때 대처할 수 있는데 우리는 지금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다 안다고 하는데 막상 행동할 때는 못합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모르는 것 같은데 비상사태 때는 행동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래야 됩니다. 믿음이 없는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보니까 행동하고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홍수사태가 일어나도 노아는 대처했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는 홍수심판을 이겼습니다. "노아는 자기 집을 구원했다"라고 오늘 본문에 말합니다. 홍수심판을 대비했습니다. 방주를 짓는 위대한 노아의 순종,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지었던 방주공사, 그것이 노아의 가족들을 다 구원했습니다.

  의의 후사로 삼으심

  본문에는 이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의의 후사로 삼았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은 말씀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홍수 기사가 길게 나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한 구절 안에 압축을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믿음의 후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무엇을 하려고 홍수에서 구원했는가? 노아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의 후사를 삼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혼자만 구원시키면 후사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을 다 구원시켰습니다. 그 가정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의의 후사, 메시야 나라가 이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구속사의 한 가운데 있는 존재라 하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가정은 그냥 단순히 사는 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가정을 통해서 영광을 받기 원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가정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신 하나님, 오늘 이 땅위에 있는 우리 가정이 여호와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힘이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후사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도스도예프스키의 '카라마초프의 형제들'이라는 대작이 있습니다. 카라마초프 라는 사람은 역사 속에 있는 몇 안 되는 천재중의 한 사람이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이 소설 속에는 중요한 인물이 다섯 사람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네 아들이 등장하는데 아버지 포들은 한마디로 비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에 앞장서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속 빼닮은 게 드미트리라는 큰아들입니다. 이 친구의 인생의 목적은 돈과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의 관심은 아버지의 유산에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설명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이 인간들이 오늘 현실 안에 다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오직 돈과 쾌락을 좇아서 사람도 죽이고 가정도 파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아들 이반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입니다.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무신론자입니다.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그의 삶의 슬로건은 인생은 내 맘대로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셋째아들 아료사는 제대로 된 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수도원에서 교육도 받고 그는 이 세상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법이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허물은 용서받아야 된다 라고 하는 사랑과 용서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러시아를 구할 미래의 희망으로서 아료사가 그 소설속에 등장합니다. 역사의 메시야 상으로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넷째아들 스멜자코프는 사생아입니다. 그리고 고치지 못하는 간질을 앓고 있습니다. 비참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아들 대우를 못받습니다. 아버지에게 치이고 형들에게 치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운명을 저주하고는 기회만 오면 아버지를 죽이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이 넷째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스멜자코프는 외칩니다. '내 인생에게는 저주뿐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를 큰아들이 죽이는 것으로 오해가 되어서 정죄를 받고 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가 죽고 그것도 형이 죽였다는 충격에 둘째아들 이반은 미쳐 버립니다. 그리고 정작 아버지를 죽인 스멜자코프는 자살을 합니다. 하루아침에 그 집이 패가망신이 되었습니다. 셋째아들 아료사는 아버지와 형들의 불행을 지켜보면서도 나도 저 형의 죄값에 참예해야 되겠다 하고 시베리아로 떠나는 큰형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 소설이 왜 이렇게 높이평가를 받느냐 하면 등장하는 이 다섯 명의 인간형이 역사 속에 그대로 존재하면서 지금 함께 뒹굴어가고 비극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 인간형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인간편에서 일생을 살렵니까? 짐승같이 살렵니까? 유산과 여자에게만 중독된 인생으로 살렵니까? 아니면 철저한 개인주의로 살렵니까? 아니면 운명을 저주하고 기회만 있으면 같이 죽자 그런 인생으로 살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스도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위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역사 속에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카라마초프의 이 형제들의 비극은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족을 향한 신앙적인 자세를 잘 갖추어야 됩니다. 오늘 노아의 가정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하나님이 노아 가정을 이렇게 귀하게 홍수에서 건져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술 먹고 실수하는 것, 아들이 실수하는 것만 소개가 되어 있지 정작 노아가정의 놀라운 하나님이 그렇게 높이 평가했던 노아가정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정의 중요함

  성도의 가정들은 가족을 아끼고 중요시해야 됩니다. 나 하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향하여 '너는 희망이 없다' '네가 우리 집에서 나가야 소망이 있다' 그런 악담을 합니다. 내가 버린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식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원하는데 우리는 가족을 그렇게 쉽게 대합니다. 노아의 아들, 샘을 통하여 하나님은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가정에 샘이 있습니다. 함 같은 망나니도 있고 그 가운데는 샘도 있습니다. 이 샘을 보존할 줄 알고 샘을 하나님의 후사로 키우는 것이 성도가정의 사명입니다.

  제가 한 마디 꼭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부들은 싸우고 싶거든 부부끼리만 싸우십시오. 그런데 싸움을 해놓고는 엄마는 딸 한테 다 보고합니다. "네 에비가 어떻다" 남편은 또 아들을 붙잡고 "네 에미는 어떻다"고 합니다. 그 애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싶겠습니까? 절대로 남편 된 분들은 부인을 자식들 앞에서 험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백해무익합니다. 혼자 삭히십시오. 자식들 앞에서는 아내를 험담하는 그만큼 못난 남자가 없고, 자식들 앞에서 남편을 험담하는 그런 여자보다 못난 여자가 없습니다. 같은 가족한테도 그렇거든 왜 남한테 남편이야기 하고 아내이야기를 그렇게 겁도 없이 함부로 합니까? 왜 아들 험담을 남들 앞에서 합니까? 왜 딸 험담을 그렇게 남들 앞에서 합니까? 가정을 지켜야 될 부모들이 왜 자식 이야기를 밖에서 함부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노아의 집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가정에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기대를 걸고 있는 우리 식구를 왜 가족끼리 서로 싸우고 해치느냐는 말입니다.

  노아는 세상을 정죄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여 홍수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결과적으로 세상을 정죄했다, 내가 옳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겼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늘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고 세상이 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진행형이 중요하다

  아이들은 진행형의 인생입니다. 문법에 보면 완료형이 있고 진행형이 있고 미래형이 있습니다. 우리 교리를 보면 하나님의 예정,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성화, 인내, 영화 등등 복잡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간단하게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려면 첫째 거듭나야 합니다. 중생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 닮아가도록 성화를 겪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서는 구원이 완성되는 영화를 누려야 됩니다. 이 세 가지를 말하는데 이 중생이 완료형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것은 완료형입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것을 의심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계속 진행형을 가는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진행되고 있고 계속 자라가야 됩니다. 믿음이 자라가고 있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이것이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에게 영화의 때가 옵니다. 하늘나라 입성을 해서 주님과 더불어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모된 경험을 가진 분들은 알겠지만 사실 제일 좋을 때가 애를 잉태하고 있을 때입니다. 낳아놓고 키워보면 얼마나 힘듭니까? 배 안에 있을 때 눈물 쏟으면 키울 때는 피눈물을 쏟아야 됩니다. 아기를 베는 게 목적입니까? 낳아서 키우는 게 목적입니다. 아기를 베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낳아서 키우는 게 더 어려운 것입니다. 어린 세대들은 진행형이기 때문에 교회가 이들을 다 키워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을 받았으면 자라가야 됩니다. 아이를 낳았으면 키워야 되듯이 예수를 믿었으면 이제는 예수님을 닮아가고 믿음이 자라가야 됩니다.

  유명한 웨스트 콧 박사님이 한 번은 열차를 탔는데 아주 열심있는 청년이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웨스트 콧 박사 앞에 와서도 "선생님, 예수믿고 구원받으세요"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뺏지를 보니까 자기 학교 학생인 것입니다. 서로 모릅니다. 하도 기특하고 기뻐서 옆자리에 앉혔습니다. "이봐 학생, 수고하네. 자네 나더러 예수믿고 구원받으라 했지? 자네가 전도하는 구원은 무슨 구원이야? 완료형이야? 진행형이야? 미래형이야?" 학자답게 따지고 물은 것입니다. 이 학생이 얼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웨스트 콧 박사는 "이봐, 안심하게. 내가 자네가 다니는 학교에 신학부 교수야. 내가 기뻐서 그렇게 물은 것인데 사실 자네가 전하는 구원은 이런 구원이야.
그러니까 확신가지고 전도하게." 그런 격려를 해준 일화가 있습니다.

  맺는 말 

  베드로전서 2장1절에 보면 "어린 아이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자라는 첫 번째 근거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런데 애들은 한 가지 힘이 있습니다. 빠는 힘은 굉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우리 성도들에게 그렇게 젖을 사모하는 아이의 빨아들이는 그 왈력처럼 주님의 말씀을 향하는 사모심이 그렇게 불타야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기도를 사모하십시오. 빨아들이는 힘을 가지고 하십시오. 내뱉는 식이 아닙니다. "어린아이 같이 사모하라" 성경이 얼마나 과학적인 표현입니까? 아기가 먹을 것을 사모하는 그 열정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절대로 달래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젖을 먹고 싶어하는 그 욕구는 먹여주어야 끝납니다. 우리가 말씀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도 말씀을 먹기 전에는 다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영적인 욕구가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영적 욕구가 없으면 세상 것으로 만족하고 끝납니다.

  노아는 옛 사람이지만 오늘 우리 가운데 좋은 믿음의 선배로 등장합니다. 우리 모두가 노아가 누렸던 믿음의 후사의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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