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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사 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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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온 인류를 지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의 제물이 조시고자 육신을 입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이 땅에 구원을 위하여 오신 목적을 이루셔야 한다는 사명도 투철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난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고 피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고난을 당하기 원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셨습니다. 그분도 육신을 입으신 참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고 신임했던 세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시기 위해 따로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 주님은 이날은 누군가 함께 기도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몸을 굽혀 이마를 대시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힘을 다하고 집중한 기도였던지 땀을 구슬처럼 흘러내렸습니다. 땀으로 온 몸이 뒤범범이 되셨습니다. 그 땀은 더 이상 흐를 것이 없어서 피맺힘으로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자리는 소나기가 지나간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시옵소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내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간절한 예수님의 기도는 마침내 이런 결론으로 끝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고난이 지나가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겠노라고 기도의 결론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 함께 동거 동락했던 제자 가롯 유다의 배반을 뒤이어 사랑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가장 신임하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도 못하오. 나는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소이다.”
그의 부인하는 소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깊은 상실감과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풀 때 그 자리에서 함께 떡과 고기를 먹으며 예수님을 위대한 분으로 칭송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명절에 누구를 특사로 내어줄까 물을 때 사람들은 흉악한 강도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더욱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친구들이 침상 채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위에서 그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을 때 그 자리에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침상을 들고 나가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자기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에 깔아 놓고 예수님을 환호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한 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로마 병정들의 채찍이 예수님의 등에 달라붙었고 그러 때 마다 채찍 끝에 달린 납덩어리는 예수님의 살점까지도 파내어 가져갔습니다. 채찍의 자리마다 붉은 핏자국이 생기며 선홍같이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을 향해 가래섞인 침을 뱉으며 조롱하고 모역하였습니다. 더러운 가래침이 예수님의 얼굴에 날라들었으나 예수님은 채찍의 고난 때문에 그 더러움 조차 느끼지를 못하셨습니다.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 그 길은 처절한 고통과 모욕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피비린내가 퍼져나갔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기 전에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명패에 유대인의 앙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여기 유대인의 왕이 계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조롱과 야유의 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탕! 탕! 탕! 손과 발목에 박히신 큰 대못은 박힐 때 마다 예수님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듯 했습니다. 살 속으로 깊이 박혀 들어가는 녹슨 세 개의 대 못은 예수님을 십자가 나무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오직 세 개의 대못만으로 달려있는 예수님의 영혼 깊숙이까지 몰려오는 고통은 견딜 수 없는 처절한 아픔이었습니다.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허리에 굵은 창이 쑥 몸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아픔이라기 보다는 마지막 물과 피를 쏟는 시원함처럼 느껴졌습니다. 굵은 창자국에서는 피가 물 흐르듯 허리를 따고 흘러내렸습니다. 모든 피를 다 쏟아내시며 마지막 한마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렘브란트(Rembrandt, 1606-69)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 편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모여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림 모퉁이 구석에다가 그림자에 가려 간신히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사람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렘브란트 이 작품을 통해 자신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난은 그가 받는 형벌이며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로서의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고난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미련함과 무지함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셨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영적인 무지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조차 모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진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신 것이며 우리의 슬픔을 몸소 당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당하실 질고가 아니요 슬픔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해야할 질고와 슬픔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고와 슬픔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9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곧 질고와 슬픔을 당해야 할 바로 나 자신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단어는 ‘나’라는 단어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는 실로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고백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세요.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나의 허물 나의 죄악을 인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징벌을 주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 같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들이 양 같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연악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양은 참 착한 것 같으면서도 못됐고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양은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양이 길을 잃으면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헤 메이는 이유는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은 멀리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양은 항상 제 앞에 있는 다른 양의 엉덩이를 보고 따라갑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앞에 있는 것이 자기 시야에서 멀어지면 길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잘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가면 곧 죽음이 되는 것을 양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와 양의 관계처럼 예수님을 따라는 영적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릇 행하고 각기 제 길로 간 양의 잘 못을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수님에게 담당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6절 이하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로 나의 죄악으로 나의 그릇 행함으로 내가 당해야 할 질고와 슬픔, 내가 받아야 할 찔림과 상함을 예수님께서 다 받으신 것입니다.

모욕과 멸시를 받으시고 침 뱉음과 조롱을 받으신 것도 모두 나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굵은 채찍이 살점을 파내어 가는 고통을 받으시고 선홍 같은 붉은 피를 손과 발목에서 흘리신 것도 모두 나의 죄악과 그릇 행함 때문이었습니다. 
오! 주님 왜 날 위해 그런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으셔야 하셨나요? 
오! 주님 내가 무엇이기에 나의 죄악을 몸소 담당해주셨나요?

5절 후반부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받으신 징계와 채찍은 나에게 평화를 주시고 나음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막혔던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평화를 주시기 위해 징계를 받으신 것입니다. 
-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

또한 죄악으로 인하여 병들었던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치료하시기 위해 몸소 징계와 채찍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주님의 흘리신 보혈로 깨끗이 나음을 입게 하신 것입니다.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요일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죄에 죽을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친히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질고와 슬픔을 대신 당하시고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인하여 찔리시고 상하신 것도 모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몸소 받으신 징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하셨고 그 사랑으로 몸소 받으신 채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손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받으셔야만 했던 이유였습니다.

‘오! 주님 날 위해 지신 십자가, 날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주님 당하신 고난 날 위한 사랑이셨군요. 주님 당하신 그 붉은 피 흘리심의 고통, 날 위한 사랑이셨군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으시고 묵묵히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죽음, 날 위한 사랑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죄 씻음을 받았으며,
주님의 찢기고 상하신 몸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고,
주님의 거룩하신 희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이렇게 고백해야 옳습니다. “주님이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주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릴 고백이 있다면 그것은 ‘나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오 주님! 고통도, 수치도, 멸시도, 조롱도, 십자가도, 죽음도, 모두 다 나 때문에 겪으셨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더욱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나이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찔리고 상하신 주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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