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으로 기뻐하사 (눅 10:17-24)

  • 잡초 잡초
  • 389
  • 0

첨부 1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우리가 잘 압니다.
  실제로 기쁨이란 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누려야 제격입니다.
  물론 자기 혼자만 누리는 은밀한 기쁨이란 것도 없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여럿이 함께 누리는 기쁨의 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자식의 결혼식이 아무리 기쁜 일이라 할지라도, 가족 몇 명만 모여 조촐하게 식을 올리는 것보다는 일가친척들과 친구들과 성도들이 많이 참석해서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훨씬 더 좋습니다.
  프로 야구 홈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순간 텔레비전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의 기쁨이란 것은, 여러 명이 함께 관전하다가 그 우승의 순간 함성을 지르며 'high five'를 하는 사람들의 기쁨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 또한 직접 그 야구장 현장에서 수만 명의 홈팀 팬들과 함께 열광하는 기쁨에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넘치는 기쁨을 함께 나눈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칠십 인의 제자들이 특별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 제자들은 자기네들의 전도여행의 결과를 두고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는데, 예수님 역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이 갑절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함박꽃 웃음이 넘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그처럼 기뻐했던 이유는 조금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홈팀이 챔피언이 되었다고 좋아서 날뛰는 것이라든지, 푸짐한 잔칫상을 앞에 두고 모두가 흥겨워하는 따위의 기쁨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습니다.
  실상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체험해 볼 수 없는,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실로 특별한 기쁨을 그 순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느끼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기쁨, 오직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만이 또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참되고 신비한 기쁨이란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마지막 걸음을 걷고 계셨던 그 여행길의 어느 날, 주님과 제자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그처럼 크게 기뻐할 수 있었는지를 이 시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도는 전도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함으로써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

  본문 17절부터 20절에 기록하기를 "17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칠십인"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모두 다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이름" 앞에서 귀신들도 꼼짝 못하고 "항복"하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만 보였던 귀신들이 자기네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명령만 하면 당장 도망쳐 버리는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그들이 그처럼 신이 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그런 기쁨에 공감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쁜 보고를 들으셨을 때 "사단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나도 보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옛날에 타락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던 사건을 언급하시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옛날 천사들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가 순식간에 땅바닥에 떨어진 일이 있으니만큼 지금 너희들 역시 귀신 좀 쫓아내었다고 교만해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그 칠십인의 제자들이 벌이고 있었던 전도활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단이 하늘에서 급히 내려오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셨다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문맥상으로 보건대 이 말씀의 뜻은, 그 칠십인들의 전도활동에 의하여 사단이 곳곳에서 패배당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도 보고 계셨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칠십인의 전도활동은 언뜻 보기에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시골 동네들을 돌아다니며 몇 마디 말을 전하고 몇 사람 병 고쳐 주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에 있어서 그들의 전도는 사단을 곳곳에서 완전히 격퇴시키는 엄청난 승리였다고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해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번개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사단이 급속도로 추락하게 되는, 실로 압도적이고도 명백한 승리였던 것입니다.

  그 제자들의 기쁨에 그렇게 공감해 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또한 더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도록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곧 이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말은 전도자들이 어떤 독에도 면역이 되도록 해 준다는 뜻이 아니라, 뒤에 나오는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얻게 된다.'는 말과 비유적으로 이어집니다.
  즉 귀신을 쫓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원수의 힘을 압도할 권세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그런 사단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결코 제자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정말로 기뻐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보다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두고 더욱 기뻐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귀신에게 항복을 받는 일을 해 낸다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신나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단을 이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실로 뿌듯한 기쁨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더욱 기뻐해야 할 이유는 그런 외면적인 승리 그 자체에만 있는 아니라 그런 승리가 그들 자신에 대하여 확인해 주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 택자의 명단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기록되다'라는 단어가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그들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뜻합니다.
  그 칠십 인의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파송을 받아 전도사역에 승리하는 체험을 지금 막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택함 받은 자녀된 증거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을 생각할 때 그들의 기쁨은 갑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특별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가게 되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대학교 게시판에 붙은 합격자 명단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자기 이름을 발견하게 된 수험생들의 기쁨이란 그야말로 하늘로 붕 뜨는 듯한 기분일 것입니다.
  불법체류자가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게 되어 그 나라에 당당히 거주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 그 얼마나 살 맛 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자신이 천국시민의 명단에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 그 기쁨이 어떠할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어떤 게시판에도 천국 합격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곳은 없고, 세상 어디에서도 천국 시민증이라는 것은 발부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전도입니다.

  믿지 않던 내 남편, 내 친구, 내 이웃의 영혼을 마귀에게서 빼앗아 구출하는 작전에 성공하는 것은 정말 통쾌하지 않습니까?
  내가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나와 함께 천당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어찌 기뻐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조차 확신이 없는 교인이라면 그런 기쁨을 알 리가 없고 따라서 전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할 줄 알고 그 전도의 열매를 얻게 될 때 기뻐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그 성도 자신에게 진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며, 그런 까닭에 그 기쁨은 배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안에서 바로 그런 기쁨들이 매 주일마다 넘쳐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태신자를 갖고 싶어지고 해산신자를 얻게 될 때 뛸 듯이 기뻐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본인부터가 천당을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두 명밖에 없던 반을 인수 받은 주일학교 교사가 놀이터와 학교에 나가서 전도를 해서 다섯 명, 열 명의 반을 만들게 될 때 그 기쁨이라는 것은 정말 겪어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새신자들 중에서도 어린이 새소식반을 위해 방제공이나 교사로 봉사하게 되면서 그 신앙이 급속도로 자라게 되는 사례들을 아주 자주 듣게 되는데, 바로 꼭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실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면서도 전도사에 못지않은 많은 사역에 눈물겨운 희생으로 충성하고 계시는 우리 교회의 심방장님들이지만, 매달 사역발표회를 할 때면 "경향교회 심방장이 된 것 때문에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실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기쁨 한 가지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항복시키는' 승리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성도는 그 기쁨 위에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확신하는 기쁨까지 덮쳐서 쌓이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시는 권세를 받아 부지런히 전도함으로써, 사단은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져 버리고 반면에 자신이 해산시킨 새신자와 자기 자신의 영혼은 함께 천당구원 받게 되었음을 인하여 크게 기뻐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을 진정 기뻐합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에 "21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주시고 또 그 기쁨을 배가시켜 주셨던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스스로 크게 기뻐하시면서 제자들 역시 그 기쁨에 함께 참여하도록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본문에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기뻐하게 되신 동기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께서 그처럼 기뻐하시도록 감동시키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여기 말하는 '기뻐하다'라는 번역은 사실 원문의 뉘앙스에 비하면 오히려 약한 것으로서, 원래는 '기쁨에 넘쳐흐르다' 혹은 '기쁨으로 흥분 상태에 이르다'라고 번역해야 할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처럼 성령 충만한 큰 기쁨에 젖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내리신 한 특별한 계시사역 때문이었습니다.

  그 계시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반면에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난, 아주 독특한 계시였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숨겨진" 계시라고 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세상에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바로 그 교만 때문에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에 지나지 않는 줄 아는 사람, 즉 그저 하늘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옳은 줄 알고 그 말씀은 오직 순종하는 것 외에는 아무 달리 듣는 방법이 없는 줄을 아는 자만 이 계시를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이 특별한 계시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였고, 예수님은 바로 그런 방법으로 당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지금 크게 기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 깨달을 수 있는 특별계시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화육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증거하시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화육강생하실 때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그 주님께 충만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볼 수 있고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그 모든 하나님의 속성이 이 예수 그리스도께 조금도 빠진 것 없이 완전히 넘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신께서 바로 성부 하나님과 완벽한 교통을 나누고 계시는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또 "아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인식하고 깨닫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실로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처럼 고귀한 지식, 곧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된 자들이 있는데 바로 "아들의 소원대로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 덧붙여서 그 '성자 예수님의 뜻대로 계시를 받는 자'들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음을 지극히 명백하게 천명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단 한 길, 오직 한 길, 유일한 '그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가 되심을 인하여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그처럼 크게 기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얼마나 큰 기쁨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 "종용히"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라는 뜻입니다.
  즉 앞에 나온 21절과 22절에 기록된 말씀들은 많은 사람들이 듣는 자리에서 공적으로 선언하셨지만 이제 23절 이하의 말씀은 제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사적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그처럼 은근히 제자들에게만 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의 보는 것"이란 바로 지금 제자들이 뵈옵고 있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실로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이 메시아 뵙기를 기다렸지만 보지 못했고, 그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실로 위대한 선지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친히 만나지는 못했으며, 온갖 것 다 가지고 다 누리던 임금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듣는 복만큼은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친히 뵙고 그 음성을 제 귀로 듣는 이 축복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예수님은 신기한 기쁨을 가지신 분이 아니셨겠습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악한 세상 가운데 친히 내려오신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조금이라도 불편해 하시거나 기분 언짢아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성부의 선하신 뜻이라고 기꺼이 순종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이 천하고 더러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 가운데 함께 사시면서 또한 온갖 고통당하신 일, 정말 하나님으로서는 가장 못할 일을 하시면서도, 성자께서는 당신의 그 화육을 통하여 죄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고 그처럼 진심으로 기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그 '말씀과 행하신 일'이라는 이 특별계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할 나위 없이 똑똑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워서 혹은 소위 득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선해서 그 공로의 대가로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열린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그 길'이 되어 주신 까닭에 나와 같은 죄인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연히 아주 멋진 남자를 만나게 되어 사귀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가 바로 왕자님이었다는 것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왕자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원래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특권이며, 그 왕자 때문에 자기도 왕가의 신부요 공주가 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숨이 멎을 정도로 행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셨는데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예수님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 기쁨은 실로 어떠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주님을 반가이 영접함으로써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이 좋아지는" 행복을 누리고 "그 얼굴 뵈올 때에 얼마나 더 좋으랴"라는 소망을 간직하며 "예수 나의 기쁨"이라는 고백에 "아멘 할렐루야"로 항상 즐거이 화답하며 찬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어느 날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그처럼 함께 나누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길은 주님의 마지막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있던 여정이었습니다.
  어쩌면 침울한 분위기와 무거운 발걸음으로만 채워졌을 것 같은 그 길에 오히려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기쁨을 주고받는 신기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쁨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된 성도들만이 나눌 수 있는 진짜 기쁨이요 항상 누릴 기쁨이기도 합니다.

  통계를 보아도, 사람이 혼자 코미디 쇼를 볼 때보다는 여럿이 함께 볼 때 훨씬 더 잘, 그리고 크게 웃는다고 합니다.
  즐거움은 많은 사람이 같이 나눌 때 배가(倍加)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기쁨 역시 성도들과 함께, 그리고 주님과 함께 나눌 때 몇 배로 증폭되는 것이며, 바로 교회가 그런 기쁨을 나누는, 실로 즐겁고 행복한 집인 것입니다.

  그 기쁨이란 '노는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구경하는 재미'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또한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이 함께 '영혼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는 데서 오는, 뛸 듯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나 같은 죄인을 먼저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주님과 사귀게 되는 이 기적적인 '영적교통'의 특권을 인하여, 감격의 눈물과 함께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실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며 불신자들의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교회를 통하여 그런 '우리들만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분부 따라 전도함으로써 사단을 이기고 영혼을 건져내는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될 때 그것을 자기 자신의 구원확신과 함께 즐거워하는 기쁨 - 이것이 참된 성도가 남아 있는 생애를 통하여 날마다 누려야 할 기쁨입니다.
  성자께서 나 같은 죄인 위하여 이 땅에 화육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신 이 특권을 날마다 감사 찬양 드리는 기쁨 -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이 이 지상의 천국인 교회 안에서 모일 때마다 넘쳐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에 무거운 짐이 남아 있고 우리가 지고 따라가야 할 크고 작은 십자가의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구원 확신'과 '주님 동행'의 은총을 통하여 오늘도 충만하게 내려 주시는 이 '성령의 기쁨'을 배(倍)로 함께 나누며 온 세상을 향하여 자랑스럽게 증거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