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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적 같게 하옵소서 (2) (애 5: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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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A. 단테는 "불행할 때 행복했던 때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비애(lamentations)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죄의 결과로 인한 징벌의 고통이 엄격하고도 분명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기 예레미야애가(lamentations of jeremiah's)는 비탄과 탄식이 연속된 노래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하나님의 성전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적들에 의해 거민들이 살육당하거나 끌려가는 참상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15절에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拍掌)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라고 했습니다.
원수들이 입을 벌려 비소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파괴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예레미야의 애곡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비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애가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한 영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Ⅰ. 이스라엘이 범한 죄에 대한 탄식 입니다.

이스라엘이 범한 죄가 무엇입니까?

1)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 5절에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죄에 대한 파사( )는 위법, 배신, 반역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스스로 파기한 죄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그 은혜에 대한 배신입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다는 사실은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절대의 자리에 두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여러 종류의 절대를 두고 싶었습니다.
저들은 여러 잡신들을 섬기므로 모든 신을 절대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영적 자만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 3절에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의지하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파멸에 처하고 말았음을 의미합니다. 『뿔』은 권세와 힘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이 자랑하는 뿔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천연의 요새와 잘 훈련된 병사, 즉 국방력과 풍부한 경제력이 표면적인 이스라엘의 뿔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뿔은 택함 받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관하여는 무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표면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신 10:16)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에 빠져서 영적으로 교만해 있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배 밑창에 누워있었습니다. 이때 선원들이 요나의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요나가 선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욘 1:9).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로서 엄청난 영적 교만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불신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으면 우리 신앙에 대해 답변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이 선민이라는 외형적인 신분에 도취되어 선원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로서 외적인 모양만 갖추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요 4:24)드리는 것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드리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품을 사모하는 탄원입니다.

본문 5장 20절에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기 싫어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마치 젖먹이 어린 아이가 어미의 품을 사모하듯이 순전한 마음으로 매달리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벧전 2:2). 지금 예레미야의 조국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영적 자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품을 떠났습니다.

저들이 지은 죄 때문에 바벨론이 침략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치하기 위하여 바벨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들게 하신 것입니다.
저들은 감히 하나님을 절대가치에서 상대가치로 전락시켰습니다. 모든 잡신들을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놓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 절대만이 가능합니다. 두 절대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이미 둘 다를 상대화 시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긴 자의 마지막은 파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본문 5장 21절에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Ⅲ. 빼앗긴 것을 다시 찾으려는 소원의 절규입니다.

본문 5장 21절에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빼앗긴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대한 요구입니까?

1) 기업을 다시 찾아달라는 애원입니다.

본문 5장 2절에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약속 받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할 경우에 그 땅에서 쫓겨나리라는 것도 빼놓지 아니하셨습니다(레 26:31-33).
빼앗긴 기업의 회복은 곧 약속의 땅 가나안의 회복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의지로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갑니다. 빼앗긴 기업의 회복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와 우리의 믿음의 회복입니다. 믿음은 우리 마음대로 얻지 못하듯이 회개 또한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에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에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장 21절에도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고 한 것입니다.

2) 집을 다시 찾아달라는 애원입니다.

본문 5장 2절에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집』은 넓은 의미에서 ① 가문과 종족을 의미합니다(마 10:6; 눅 1:33, 69) ② 하나님의 성전을 의미합니다(요 2:16). ③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의미합니다(눅 14:23; 롬 16:5). ④ 천국을 의미합니다(요 14:2; 고후 5:1).
빼앗긴 집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은 바른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관계회복의 과제는 ① 대신관계 입니다. 곧 바른 예배 회복입니다. ② 대인관계 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③ 대물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만인 제사장적 사명의 회복입니다. 첫째는 거룩한 제사장(벧전 2:5), 곧 예배하는 제사장의 삶입니다. 둘째는 복음의 제사장입니다(롬 15:16) 곧 선교하는 제사장의 삶입니다. 셋째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 2:9). 곧 축복의 제사장의 삶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3) 수치를 가리워 달라는 애원입니다.

본문 5장 1절에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5장 21절에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을 떠난 수치입니다(5:3).
(2) 자기 소유를 타인이 주관하는 수치입니다(5:4).
(3) 고통당하는 수치입니다(5:5).
(4) 이방인에게 구걸하는 수치입니다(5:6).
(5) 조상들의 죄악을 단절하지 못하는 수치입니다 (5:7).
(6) 이방인 종들에게 지배당하는 수치입니다(5:8).
(7) 궁핍의 수치입니다(5:10).
(8) 여인들을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남자들의 수치입 니다(5:11).
(9) 신뢰받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수치입니다(5:12).
(10) 청소년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수치입니다(5:13).
(11) 공동체의 질서가 붕괴되는 수치입니다(5:14).
(12) 희락이 사라진 수치입니다(5:15).
(13) 과거와 비교 당하는 수치입니다(5:16).
(14) 하나님의 성전이 더럽힘을 당하는 수치입니다 (5:18).

이 엄청난 수치를 가리울 수 있는 길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벌거벗은 수치를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가리워 주었습니다(창 3:21).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여인의 검은 얼굴은 솔로몬의 휘장으로 말미암아 가리워졌습니다(아 1:5).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인하여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시 25:3; 사 49:23).
계시록 3장 18절에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ation)는 옛것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도 옛것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옛것에서 새것을 찾는다는 이른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보다 역동적인 18세기 박지원에 의해 제창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아니고 19세기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제기된 구본신참(舊本新參)도 아닙니다.

다만 잃어버린 옛것을 다시 찾는 것이 개혁주의의 기본원리입니다.
21세기는 기독교가 정신 차려야 하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수난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전공하고 취미로 삼는 크고 작은 수많은 것들이 종교 대 종교로 교회 앞에 나타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의 순서가 종교 대 종교로서 대통합을 이루느냐 아니면 통합을 거부하고 전쟁을 하겠느냐입니다. 예측하건데 깨어있는 교회는 독보적인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죽음을 불사하는 전쟁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는 종교 대 종교로서 타협과 대통합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명절이나 추석을 맞이해서 천주교 한국 사목연구소 상제례토착화 연구위원회가 마련한 '조상 제사예식'시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안은 주교회의 인준을 거치면 카톨릭 제사의식으로 확정됩니다. 카톨릭은 그 동안 유교식 전통에 따라 가정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허용해왔습니다. 이번 시안은 좀더 적극적이고도 공식적으로 조상제사를 수용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런 기사가 4대 일간지에 공공연하게 등장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한편 불교에서도 때를 같이하여 이런 저런 이유로 제사할 수 없는 가정, 소년 소녀 가장, 무의탁 노인 가정 등을 위해 사찰이나 사찰 산하 복지관에서 합동 차례를 지내기로 했다고 합니다. 사회 일각에서는 민족 미풍양속을 종교계가 적극 권장하고 수용했다고 웃지 못 할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불교와 카톨릭과 천도교가 합동으로 찬양을 하는가 하면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에 현수막을 상호 부착하는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은혜라는 말은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단어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언제부터인가 불교현수막에도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지금이 배수진을 칠 때입니다. 교인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무엇인가 이룬 것처럼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절대적 생활원리로 삼고 하나님 말씀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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