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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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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의 열네 번째 속성은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입니다. ‘바란다’는 단어는 13절의 믿음, 소망, 사랑할 때의 ‘소망’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는 “사랑은 모든 것을 희망한다.” 즉 “사랑은 그 어느 순간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의 의미입니다. 희망을 포기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지요.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단 1%의 희망이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자 또한 그 희망이 바늘구멍 같은 희망이라도 이루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힘

우리 인생에서 희망은 너무 중요합니다.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보면 지옥 문입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을 통과하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은 달리 지옥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도 희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자입니다. 이 여자에게 신들이 하나의 상자를 주었는데 이 안에는 인간을 괴롭히는 온갖 저주들이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신들은 이 상자를 주면서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호기심이 강했던 판도라는 상자를 열게 되었고 결국 그 안에 들어 있던 모든 저주와 재앙이 다 빠져 나갑니다. 급하게 상자를 닫았는데 판도라는 딱 한 가지만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닌 ‘희망’이었습니다. 인간사에 여러 저주와 어려움과 여러 환난이 있지만 인간은 이 ‘희망’이 있기에 살아갑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빅터 프랭클 이라는 정신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유태인으로서 2차세계대전 중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할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갔다 살아나온 사람입니다. 그가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깨달았던 것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삶의 의미를 찾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포기한 자는 얼마 못가 병으로 죽던지 개스실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는데 크리스마스 이후에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전까지는 무언가 내 인생에 변화가 오겠지 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자 희망이 사라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잃는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정신의 장악력을 잃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몸과 마음이 연약해지고, 결국 독일군들은 쓸모없다 하여 가차없이 바로 개스실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썼던 빅터 프랭클씨는 아침마다 깨진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면도를 하면서 희망을 되살리는 것이지요. 여기서 희망이라고 할 때 무슨 대단한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서 가족을 보아야 한다는 희망, 빅터 프랭클의 경우에는 자기가 쓰다만 원고가 있는데 그것을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는 희망 같은 것입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얼마나 대단한지 그것이 설사 착각일지라도 인간을 살아 있게 합니다. 사형수들이 갖는 희망 중에 ‘특사 망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죽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사형수는 누가 특사를 보내어 자기 형을 면제해 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희망마저 없다면 그는 사형장까지도 걸어갈 힘조차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중 하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도무지 이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가망성이 없을 때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느냐 하면 내 인생을 향한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닫힌 문을 너무 오래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등 뒤에 열린 문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헬렌 켈러). 모든 인생의 결정이나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그 즉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회사에서 퇴직당한 것이 불행처럼 여겨졌지만 이 때문에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면 이것은 성공입니다. 어느 때는 성공처럼 보였던 일도 이 때문에 우리 인생에 결정적인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을 속단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나 하는 희망과 기대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희망을 붙잡은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갔던 사람들입니다. 창세기는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잡고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의 기반도 전혀 없고 친척도 없고 자녀도 없고 나이도 늙었고 인생의 가장 악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 하나로 큰 민족의 조상이 된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버지 이삭을 사이에 두고 야곱과 에서가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투는 이유는 오직 하나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땅도 없고 큰 부족도 아닙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하나, 미래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삭의 씨를 통해서 큰 민족이 되게 하여 이 가나안 땅에서 복의 근원의 삶을 살 것이라는 약속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이 희망의 약속을 차지하고자 야곱과 에서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형 에서가 먼저 태어나자 동생 야곱은 그렇게 약속을 빼앗길 수 없다하여 형 에서의 발 뒷꿈치를 붙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야곱(발 뒷꿈치)’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그 축복을 받기 위해 야곱은 형의 옷을 입고 짐승 가죽털로 위장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그 결과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축복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장자권을 받았다지만 그것은 전혀 물질적 유산과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여 그 위험만 켜졌습니다. 그 때문에 자기 고향을 떠나 먼 밧단아람으로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간절히 받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것은 미래입니다. 장차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받을 것이라는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희망뿐이었습니다.

야곱이든 에서든 그 보이지 않는 희망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종말의 공동체입니다. 종말의 공동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저 하늘나라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희망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사람들은 장차 주어질 하나님나라의 희망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즐거이 감수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3-16)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는 희망 때문에 현재에 있는 모든 특권들, 그것이 육체의 자랑이든 지식이든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현재를 붙잡기 위해서 미래를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희망은 변혁의 힘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좀 더 종말론적으로 살아가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세상은 더 하나님나라와 가까워질 것입니다. 희망의 힘은 무섭습니다. 장래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완전치 못한 제도들에 대해서 만족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바꾸고 고칩니다. 신앙인들은 그래서 영원한 개혁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 정착하고 땅의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이 아닙니다. 이 땅의 영원한 나그네로 살며, 영원한 비판자로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본 모습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우리를 그 자리에 멈추어 서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디즈니랜드 사의 회사 비전 중 하나는 “세상에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한 디즈니랜드는 결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없다”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완전치 못한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의 희망을 미리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제침략 말기에 일제가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 여러모로 신앙적인 핍박을 가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성경의 일부를 읽지 못하게 한 것이 있습니다. 일제는 요한계시록을 성경에서 제거하도록 했습니다. 사도신경중에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을 못하게 했으며, 교단 중에서 재림사상이 강한 성결교 등 몇몇 교단들을 폐쇄하였습니다. 역설적으로 일제는 희망이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이 종말론의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취해 세상의 삶이나 축복을 정당화하는 강단이요 교회가 되다 보니 그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신앙은 항상 내일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지금의 현실을 뒤 흔듭니다.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사랑하는 관계에서 모든 것을 바란다, 모든 것을 희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저는 한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잃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하거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요한 웨슬리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의 경건과 기도』란 책의 ‘모든 것을 바라며’ 라는 글에서 요한 웨슬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악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사랑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가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까? 아마 소문대로 그렇게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비록 사실일지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 정도로 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바랍니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히 악한 행위를 했습니까?  그러나 사랑은 그 의도만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바랍니다.
그 의도 또한 악한 것이 확실하다구요? 하지만 그것은 가슴 속 뿌리 깊은 본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어떤 격렬한 유혹이나 감정폭발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일 것이라고 바랍니다.
심지어 그의 모든 행위와 의도와 본성이 모두 다 악하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판명 났다 할지라도 사랑은 여전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회개케 하고 그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이라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의한 것을 묵과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근본 의도는 비록 1%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고 그 사람 안에서 선한 가치를 발견하려 하고,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 할 것입니다. 사랑이 그 사람의 좋은 것과 긍정적인 면을 찾도록 만듭니다. 만일 싫은 것만 더 크게 보인다면 온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가끔 우리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완악한지 스스로도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그들의 미래가 어둠으로 가득하기를 소망하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아벨을 죽인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면, ‘아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구나. 나도 아벨을 본받아야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완악한 본성은 가인처럼 아벨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어’ 하며 그를 죽이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는 그래서 경쟁사회가 싫습니다. 학교나 사회에서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1등만 인정받고 1등만 살아남습니다. 경쟁사회에서는 1등만 행복하고 나머지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아니 모두가 불행한 사회입니다. 1등은 그 자리를 빼앗길까봐 불안하고, 1등을 좇아가는 사람들은 1등이 잘못 되기만을 바라며, 한창 뒤쳐져 있는 사람들은 아예 인생을 포기하고 맙니다. 경쟁사회는 끊임없이 상대방의 불행과 불운을 바라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그렇게 남을 미워하고 남의 불행을 은근히 바라는 완악한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은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악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는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죽음의 제물로 드린 제단입니다. 우리는 이 앞에서 우리의 악하고 완고한 마음들을 내려 놓습니다.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그 순전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소망의 하나님

사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제, 오늘, 내일 중에 무엇을 더 크게 생각합니까? 대부분 과거를 더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 지위, 인격 다 과거가 만들어 놓은 흔적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중심을 보면 사람은 자기의 미래나 소망을 더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다는 것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길 원하며 나는 이 분야에서 이렇게 잘할 수 있다는 평가입니다. 과거는 잘못된 것도 많았지만 미래는 고쳐 나가길 희망하며 잘할 수 있다는 기대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는 자기가 과거가 어땠는가를 말해주면 곧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사람과 사귀거나 사랑하려는 사람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가 지금 하고 싶어 하고, 되고 싶어 하는 것에 관심사를 맞추면 쉽게 친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우리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달라’, ‘우리는 결코 바뀔 수 없어’, ‘우리는 불가능 해’가 아니라 ‘우리는 달라질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어’ ‘언젠가는 가능할 거야’라는 희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우리 교회는 터가 안 좋아’, ‘지금 개척한다는 것은 무리야. 다 실패해’라는 눈보다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교회를 시작한 것 아니겠어 내가 도와줄 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성공시키실 것이야’ 하는 희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격은 너무 달라’, ‘이 일은 돌이킬 수 없어’ ‘우리는 다시는 사랑할 수 없을 거야’ 하는 눈보다는 ‘서로 조금씩 고쳐가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 맞게 될 거야’ ‘힘들지만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 보자구’ 하는 그런 긍정적인 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입니다. 1% 희망일지라도 그 희망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은 자녀 안에 있는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습니다. 다 소용없다고 포기해도 부모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아무리 악화된 관계일지라도 그 사람을 돌이키고,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기뻐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환난은 희망을 꽃피워내는 터전입니다. 현재가 좋으면 미래를 희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불편하고 힘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희망을 갖게 되고 결국 그 희망대로 이루어집니다. 가끔은 불편한 것이 좋습니다. 불편해야 소망도 생기고, 불편해야 바꿉니다.

우리가 이 희망의 끈을 잡는데 그것은 우리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어지는 로마서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3-5)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품은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다 말라버린 고목나무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설마 고목 나무에 꽃이 피랴 했는데 그가 아들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25년만에 희망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이삭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아브라함은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격려하셨습니다. 어느 날은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고 약속하십니다. 땅의 티끌을 세어보라. 네 자녀가 그렇게 될 것이다고 격려하십니다. 이렇게 약속을 받고 나면 몇 년 간 버팁니다. 그러다 또 의기소침해 지면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번엔 넓은 밤하늘을 보여주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그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13절에서는 이런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힘으로는 약하지만 기도라는 좋은 무기가 있습니다. 주님께 도움을 간구하면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 소망을 이루어주십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도 바랄 수 있는 힘을 주시며, 그 바람대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소망의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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