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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아들 이삭 (창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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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에 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독자입니다. 대를 이을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올 때 받은 것이지만 무려 25년이 지나서 100세에 성취되었습니다. 생리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자기와 아내 사라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잘 알았으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더니 때가 되자 성취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뿐 아니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의심 없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는 보증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방금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약속의 성취는 이삭의 출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이삭의 자손입니다. 그런 만큼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뿐 아니라 인류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 번째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보다 먼저 낳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 그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었으나 그 때까지 자식이 없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과 동침하였고 이로 인해 하갈이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의 출생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사라의 인간적인 생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아브라람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시고,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할 것이며,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엎드려서 웃으며 마음속에 말하기를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 17:)고 하셨습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지만 약속을 따라 난 아들이 아니라 육신을 좇아 난 아들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젖 뗀 것을 축하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일로 아브라함이 깊이 근심하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하갈과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축복은 약속을 따라서 난 이삭이 아니고서는 계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영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거기 보면, 이스마엘을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자식이라 하고, 이삭을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갈을 율법에, 사라를 복음에 비유하고, 이스마엘을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자들에, 이삭을 복음으로 인해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은 결국 율법의 종으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복음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자기의 선한 행실이나 깨달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행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스마엘과 같이 율법의 종노릇 하는 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서 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삭은 복음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계승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두 번째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이삭의 생애를 부러워합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평탄한 삶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삶의 터전인 고향과 친척을 버리고 떠나는 모험을 하지도 않았고, 야곱처럼 타향에서 고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슬하에서 아무 고생도 없이 자랐으며 나중에는 아브라함의 권리와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삭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성도님은 아들을 낳아 이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아마도 이삭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삭이 누렸던 행복한 일생은 그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권리와 재산을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읽으면서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던 아브라함의 철저한 신앙을 칭송합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묵묵히 순종했던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실행할 수 있었던 데는 제물로 바쳐질 이삭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120세가 넘었고 이삭은 20대의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만일 이삭이 반발했더라면 늙은 아브라함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은,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지시에 일언반구의 항변도 없이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났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모리아 산 아래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두 사환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이 보니까 무언가 이상합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다고 하면서 제물로 바칠 양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산 아래 민가를 찾아가서 어린 양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하인들을 시켜서 집으로 가서 양을 가지고 오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배려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돌로써 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놓았습니다. 이제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올려놓을 차례입니다. 아마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해 두신 어린 양이 어디 있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을 것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합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순간적으로 이삭은 아버지가 자기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삭을 결박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칼을 내려놓고 두 손을 다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라도 힘으로는 젊은 아들을 당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생각하기를 “아버지가 자기 아들인 나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다니 광신자가 된 것이 틀림없다. 내가 희생당할 이유가 없어” 그러면서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아버지, 독자인 나를 제물로 바치려 하다니요 제 정신이세요” 라고 항의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이행할 수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삭은 그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순순히 결박을 당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단에 벌려놓은 나무 위에 올려놓고 칼을 쥐고 잡으려고 하는데도 눈을 지그시 감고 아버지의 손에 자기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하지 말고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삭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삭이 자발적으로 아버지에게 협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결박당하면 죽을 것이 뻔한데도 아버지가 하는 대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순순히 따랐습니다.

이는 그 당시 이삭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백세나 되었어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을 낳을 것을 기대했듯이, 이삭 역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믿음이 아니고는 달리 이삭의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삭의 행동은 아버지에 대한 신뢰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믿음으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 하는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7세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그렸는데 천사가 그 오른손으로 칼을 잡은 아브라함의 오른손 손목을 붙잡고 하나님의 지시를 전달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과연, 대가다운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이 물었을 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했던 그대로 된 것입니다.

수양을 잡아서 번제를 드리고 났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축복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지만, 동시에 이삭에게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모두 다 이삭이 계승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기까지 순종했던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삭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같은 이삭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하여 이 같이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듯이, 이삭 역시 자기 자신을 번제단 위에 드렸습니다. 과연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사다운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삭처럼 평탄한 일생을 살기 원한다면 먼저 이삭의 순종하는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줍니다.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려 하지 마시고 진실한 신앙을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말지만 신앙은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해 줍니다.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공부에 시달리는 자녀들을 주일에도 공부하라고 다그치지 마시고 함께 교회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십시오. 이삭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나타내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일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복도 계승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위대한 약속이 이삭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아니라 이삭의 자손이기도 하십니다.

아브라함 때에도 흉년이 든 적이 있었는데, 이삭 때에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때 이삭은 그랄에 있는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약속을 이삭에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이삭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머물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삭은 그만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리브가가 너무 아리땁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곳 백성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 그를 죽일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보았습니다.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말하기를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대답하기를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그러자 아비멜렉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그리고는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의 왕인 아비멜렉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이삭과 리브가를 보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삭의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6장 12절에 보면, 이삭이 농사를 지었는데 그 해에 백배나 얻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섬 거두었다면 이삭은 백 섬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자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삭이 잘되는 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해서 아브라함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습니다. 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이삭은 그랄 평원에 장막을 치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그러자 그랄 목자들이 와서 이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을 양보하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그랄 목자들이 또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에 이삭은 그 우물도 양보하고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더 이상 다투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물이 귀해서 우물을 파도 물을 얻기가 어려운데 이삭은 우물을 파기만 하면 물이 솟아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니 이삭은 만사가 형통했습니다.

그 얼마 후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삭이 그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떠나게 할 때는 언제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자, 아비멜렉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방 왕이 보기에도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계신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두려워하여 직접 와서 화친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하여 원수의 보는 데서 잔칫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주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삭이 받은 복 가운데 가장 위대한 복은 선민 이스라엘과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이삭의 믿음과 그가 받은 축복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을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 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삭의 복에 동참하고 싶으시거든 이삭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삭의 믿음을 본받아 행하는 성도님들의 삶에 이삭이 받았던 아브라함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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