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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사 1:1~5, 막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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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은 사랑의 매인가 폭력인가’라는 주제는 아직도 매듭짓지 못한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체벌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매가 되지 못하고 폭력화합니다. 자기 화풀이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는 매는 폭력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데 사랑이 없이 매만 드니 폭력이 되고 사회의 문제가 됩니다. ‘사랑의 매’는 부모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스승의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의 매는 아픔으로 포장된 사랑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말했습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야단을 맞지 않고 자란 아이는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다. 사람도 역경에 단련되지 않고서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사랑의 매는 큰 인물을 만듭니다.

  잠언 23:13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죽지 않게 때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때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보면 ‘사랑의 매’가 아니라 ‘사망의 매’가 흔히 있습니다. 아이를 때려서 멍들게 하고, 심지어 죽게 하고, 육체적 상처가 없더라도 마음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든 매가 다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겠다고 합니다.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사야의 입을 빌려 “네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하느냐?”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사랑의 매를 드시는 순간입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웃시야 왕 말기에서부터 히스기야 왕 까지 약 60년간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던 정치적 격변기입니다. 웃시야와 요담시대는 남왕국 유다가 가장 번영하던 세월입니다. 그런데 평화와 번영은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낳고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하스는 수리아와 에브라임 연합군과 더불어 전쟁을 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을 방어해야만 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런 그들의 시련을 백성들의 죄악에 따른 여호와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1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삶이 엄청나게 편리해졌습니다. 참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여 대형교회도 많아졌습니다. 경제도 교회도 번영하지만 우리 사회는 영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영적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덕성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패역하느냐?” ‘어찌하여’라는 말은 지난 주일에 히브리어 ‘마’라고 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매를 더 맞으려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알’입니다. ‘알 마’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너희가 더 맞을 필요가 무엇이냐”, “너희는 바보처럼 더 맞기를 원하느냐”, “징계의 팔이 내려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듣고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겠다는 경고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매를 드십니까? 2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절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을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정말 소가 웃을 일입니다. 소도 알 일을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4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났도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셔야 하는 인간의 죄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 멀리 떠난 것입니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죄의 내용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몰라보고, 버리고, 멀리 떠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연예인 아무개의 신상은 훤하게 알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기호품을 알아 소포를 보냅니다. 그렇다고 그 연예인이 눈길 한번 줍니까? 주지도 않습니다. ‘비’가 미국에 갔다 오는데 저들이 왜 공항에 갑니까? 비행기 도착 시간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버지 출장 갔다 오시는 비행기 시간을 몰라요. 공항에도 안가요. 요즘은 아줌마들도 그렇다내요.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은 몰라요. 여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매를 드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겠다는 경고는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있습니다. 노아에게 홍수를 내리겠다고 하실 때 경고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때도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1).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실 때도 경고하십니다. “그가 내게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렘 3:7). 하나님이 매를 들기 전에 경고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지금도 이 경고의 소리는 계속 들립니다.

  이사야 55:7에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십니다. 매를 들기 전에 용서해줄 테니 돌아오라고 수없이 경고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미국 캔사스 출신의 한 목사님이 뉴잉글랜드에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역에서 한 성도를 만났습니다. “고향에는 별일 없습니까?” “목사님, 토네이도가 와서 저의 집이 무너져버렸습니다”. 목사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전혀 놀랄 일이 아니군요. 그러게 제가 전에 똑바로 살라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 집도 무너졌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 역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군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경고는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반면 남의 잘못에 대한 경고는 엄격합니다. 하나님 매를 다른 사람에 대한 매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매를 나에 대한 경고로 받아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매는 나에게 대한 매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눈에 예쁜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고, 선물을 주려고 왔다가 실망하여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매를 들지 않게 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매가 나에 대한 것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출한 딸이 쪽지 편지를 남겼습니다. “아빠 나갑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예요. 일요일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때리지만은 말아주세요”. 그 아빠가 글을 올렸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가출했습니다. 돌아오면 야단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야단쳐야지요. 그리고 용서해야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1에는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매를 나에 대한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매를 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지 않겠다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가 들립니까? 4절하반절에서 5절입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상처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래, 나를 떠나 살더니 아주 쌤통이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다 당한 고통도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를 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들지 않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죽인다는 말씀이 아니라 살리겠다는 뜻입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와 다투면서 “나 집 나간다!”하고 소리칩니다. 부모는 홧김에 “나가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정말 나가버립니다. 이런 아이는 순종형입니다. 엉뚱한 것만 순종하는 자녀입니다. 오래 전 대구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월남 파병 부대로 가는 군인들이 대구역에 집합하여 기차가 막 떠나는데 어떤 어머니가 “아이고, 야야, 그럴 줄 알았으면 청바지 사줄껄”하고 소리치며 웁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홀어머니가 아들을 키웠는데 변변찮은 살림을 이해하지 못한 아들이 청바지를 사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습니다. 어머니가 청바지 사주기 싫어서 안 사준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철없는 아들은 “엄마 나 청바지 안 사주면 월남 갈꺼다”하니 어머니는 홧김에 “그래, 가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들이 월남 파병부대에 지원하여 월남을 가게 된 것입니다. “나가라”는 말을 나가지 말라는 말로 들을 수 있어서 성숙한 아들입니다. “월남 가라”는 말을 월남 가지 말라는 소리로 들려야 합니다. 그런데 나가라는 말로, 월남 가라는 말로 들리는 게 문제입니다.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는 말을 매를 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까? 이것이 들려야 참 자녀입니다. 이것이 들려야 합니다. 이것은 차마 매를 들지 못하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입니다.

  잠언 3:12에는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아들, 딸에게 매를 드시고 징계하십니다. 히브리서 12:6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드시는 것은 사랑의 매입니다. 하나님께는 미움의 매, 화풀이의 매는 없습니다.

  다시 품으로 돌아오기 기대하시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에게 회개를 약속하지는 않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를 드시겠다고 하시면서 용서와 사랑을 더 많이 생각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나 경고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타락하고 추하면 그냥 멸망시키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고 미리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그냥 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사랑의 끈 때문입니다. 사랑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하시겠습니까?

  지난 해에 발명특허 받은 발명품 중에 하나가 ‘회초리’입니다. 두 막대가 서로 부딪쳐 소리를 크게 하기 위하여 만든 사랑의 매입니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소리는 크게 낼 수 있는 회초리입니다.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회초리가 아니라 마음의 회초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쳐 돌이키게 하는 회초리입니다.

  잠언 13:24에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에 매를 드십니다. 마음의 근본은 매를 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라고 하시는 마음의 동기를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인터넷에 작고 예쁜 글이 하나 올라 왔습니다. 제목이 ‘사랑의 매를 들었습니다’라는 글입니다. “첫째아이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웠습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지만. 아직은 우리 진아 젤로 이쁘지요. 오늘 사랑의 매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매를 가장한 엄마의 폭발할 것 같은 ‘화’였다는 생각에 후회스럽습니다. 어찌나 말을 안 듣던지, 팔을 세게 잡고 구석에 데리고 가 엉덩이도 아주 아프게 때리고, 그 이상은 말 않겠습니다. 아이에게 손 안대고 잘 키우는 방법이 있다면 무얼까요? 정말 곱게만 키우려고 했는데. 가슴이 아프고 아리다 못해 찢어지는 밤입니다.” 아이에게 손을 안 대고 키우려면 부모의 인내가 필요할 것입니다. 끝까지 설득하고 이해하고 대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인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 벌써 매 맞고 죽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내 경험과 판단대로 하려면 힘이 들고 속이 상하고 그래서 손을 대게 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 바르게 할 것입니다.

결론

  ‘당근과 채찍’(carrot and stick)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외교나 교육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원래는 독일에서 ‘사탕과자와 채찍’(Zuckerbrot und Peitsche)이란 말로 제일 먼저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어로 변하여 당근과 채찍이라고 합니다. 말을 달리게 하려면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채찍으로 때리는 것만 아니라 당근을 줘야 잘 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말이 당근을 아주 좋아합니다. 당근은 ‘유화책’이란 뜻으로, 채찍은 ‘강경책’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중국에서는 ‘코끼리 체인’이라 표현합니다. 힘 센 코끼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체인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위로부터의 지도력과 아래로부터의 자발성 혹은 복종을 조화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말입니다. ‘지배의 안정화’를 위한 목적으로 유화와 강경을 골고루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당근도 채찍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과 은혜와 축복을 위한 채찍을 드십니다. 하나님의 매는 우리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끌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당근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진노인 채찍도 유익합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지 않게 정신 차리고 제대로 삽시다. 하나님께 매를 맞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고 돌이키는 지혜를 가집시다.

하나님의 매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속에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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