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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를 본받으세요 (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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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를 본받으세요 (욘 1:4~10)

요나를 본받으세요 
요나서를 읽을 때는 다른 성경보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요나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요나는 구약시대 예언자의 이름도 되지만 ‘요, 나,’ ‘바로 나’라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누구냐?
요나입니다.
동시에 ‘요, 나,’ ‘바로 나’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누구 때문에 침몰할 뻔 했느냐?
요나 때문입니다.
동시에 ‘요, 나’ 바로 나 때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는 국가라고 할 수도 있고 교회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속한 기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누구에게 하는 것이냐?
요, 나에게, 바로 나에게 하는 것으로 아시고 다른 때보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도망자입니다.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명을 피해서 도망하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너, 나가서 나의 말씀을 선포해!’ 하시면 예외 없이 ‘네!’ 하고서 나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전에 ‘도망자’라는 TV 연속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리차드 킴볼이라는 유명한 외과의사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 다니면서 진범인 외팔이를 잡으려고 애쓴다는 내용입니다. 
요나는 원조 도망자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망신시킨 인물입니다.
폭풍 때문에 배가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이 자기의 신을 부르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살기 위해 야단인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요나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칠십인역」이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칠십 명의 학자가 칠십 일 동안에 번역을 마쳤다고 해서 「칠십인역」이라고 하는데 「칠십인역」은 이 때 요나가 코를 골며 깊이 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요나가 앞장서서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 구합시다!’ 해야 할 텐데  반대가 되었습니다.
기상나팔을 불어야 할 요나가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자고 있습니다.

불평꾼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매우 성내고 싫어하면서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욘 4:1).
그리고 데모도 했습니다.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그 그늘 아래 앉았습니다.
불평꾼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세요?
‘툴툴 보이’ 또는 ‘툴툴 걸’ ‘툴툴 맨’이라고 하면 됩니다.

‘목사님, 그런 것을 알면서 어떻게 오늘 ’요나를 본받으세요’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세요? 우리 보고 도망자,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망신시키는 사람,  불평꾼이 되라는 말이에요?‘
항의하실 것입니다.
사실 요나서 2장이나 3장의 요나는 본받을 점이 있습니다.
1장의 요나는 얼핏 보면 본받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잘 보시면 1장의 요나에게서 본받을 것이 더 많습니다.


첫째, 요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신앙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9절을 보세요. 요나는 선원들에게
나는 히브리 시림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사명은 일시 버렸었지만 믿음은 어느 경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고기 뱃속의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믿음이 오히려 더 깊어졌습니다.

신학교 졸업반 때의 일입니다.
지도교수를 모시고 졸업 후의 계획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동료가 머뭇거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저는 졸업 후에 목사가 되지 않고 사업을 하려고 합니다. 교수님들께서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데  배신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교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배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버리는 것은 배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경우나 믿음은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믿음은 사공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요나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면서 ‘그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이어 ‘이 폭풍우를 만난 것은 나 때문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바다와 바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폭풍을 일으킨 것입니다.’ 한 것입니다.

자, 여러분, 5절을 보세요.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되자 사공들은 각각 자기의 신을 불렀습니다.
여기 “자기의 신”은 우상입니다.
14절을 보세요.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하므로 선원들은 다시 부르짖는데 5절과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신들을 불렀는데 14절에서는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고유명사입니다.
부르짖는 대상이 이방잡신들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선원들은 그 뒤 신앙생활을 잘 했을 것입니다.
원래 선원들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망망대해에서 의지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이니까요.
어부나 선원들은 종교심이 풍부한 사람이라 예수님이 어부들 가운데서 제자들을 여러 명 택했다고 말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14절 끝부분,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얼마나 성숙한 모습입니까?
요나서 1장 16절은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라고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생 그랬을 것입니다.
이방인 선원들의 회심은 요나서에 숨어있는 보배와 같은 귀한 사건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좋은 믿음을 가져 주변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역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요나는 정직하였습니다.  그 정직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9절을 보세요. 선원들이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알아보자’ 하고 제비를 뽑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선원들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내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묻습니다.
여러분이 요나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부끄럽지만 저 같으면 그때 ‘그런 것을 왜 나에게 묻는 거요? 나는 그저  다시스로 돈 벌러 가는 사람이요. 이 재앙은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거짓말을 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입니다. 전에도 그 비슷한 일들이 있었거든요.
이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정직하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내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해 도망가기 때문에 이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말합니다.
놀라운 정직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만 정직한 것이 아니라 불리할 때도 감추거나 거짓말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 정말 정직이고 값있는 정직입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 정직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분입니다. 시편 25편  8절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도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5장 19절 뒷부분에서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직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전도서 7장 2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우리는 그 정직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야곱은 “야곱이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쌍둥이인데 형보다 먼저 나오고 싶어서 형의 발꿈치를 잡은 것입니다.
야곱은 ‘엉뚱하게 남의 이름은 왜 묻습니까? 하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 이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복 주셔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고민거리인 에서가 복수하려는 마음도 녹여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설 때 사람은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귀하게 쓰십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있고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고,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사야는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라고 정직하게 고백합니다(사 6:5).
하나님은 그런 이사야를 부르셔서 예언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했으나 잡은 것이 없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기적에 놀란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서“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합니다(눅 5:8).
이렇게 정직하게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며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서서 복을 받고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올해는1907년 대부흥운동 100년이 되는 해이어서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기념대회가 큰 규모로 열립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습니까?
의료선교사 하디 목사가 정직하게 자기의 교만을 회개한 것이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사경회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추악한 죄악을 숨기지 않고 주님께 정직하게 고백하며 회개할 때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정직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만큼 부흥을 주십니다.
우리교회에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감리교회가 그동안 많은 캠페인을 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정직합시다’ 하는 캠페인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성경은 정직한 자들이 받는 축복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순서를 따라 찾아봅니다.

정직한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시 7:10).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시 11:7)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주의 장막에 머무르며 주의 성산에 살게 됩니다(시 15:1)
정직한 자들은 다스리는 권세를 받습니다(시 49:14).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것을 아까지 않으십니다(시 84:11).
정직하게 행하는 자들은 흑암 중에 빛을 보게 됩니다(시 112:4)
정직한 자들의 장막은 흥합니다(잠 14:11).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잠 15:8)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높은 곳에 거하며 양식과 물을 공급 받습니다(사 33:15-16).

정직하여 이와 같은 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요나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책임감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12절을 보세요. 요나는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 내가 안다고 하였습니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 내가 책임진다고 한 것입니다.

선원들이 ‘자, 보시오. 당신이 제비에 뽑혔소. 이 재앙은 당신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소. 우리가 당신을 바다에 던지는 수밖에 없게 되었소. 우리를 원망하지 마시오.’ 하고, 요나가 수동적으로 ‘하는 수 없지. 당신들은 여럿이고 나는 혼자니 어쩌겠소.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한 것이 아닙니다.

선원들은 오히려 요나를 살리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14절을 보세요.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입니다. 이 폭풍을 만난 것은 나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에도 선원들은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요나는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한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하지 말고 “이 배의 방향을 니느웨로 돌리시오. 그러면 풍랑이 잠잠해 질 것이요!‘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고 도전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한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인데 자살은 죄이니까 요나가 잘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참고로 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책임질 줄 아는 요나의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회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회개는 감정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회개는 입술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아는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아까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 회개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남의 상점에서 물건 훔친 것을 회개한 사람들은 그 상점을 찾아가서 훔친 것을 배상했습니다.
그 때의 주인이 세상을 떠나고 없으면 그 아들에게라도 물어주었습니다.
부인을 내쫓고 첩을 맞아들였던 사람은 그 부인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다시 모셔들었습니다.

요시다 고조라는 일본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제암리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제암리사건은 3․1 운동 때 제암리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열심히 부르니까 일본군대가 들어가서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이 죽게 한 사건을 말합니다.
요시다 고조 목사님은 이 사건에 대해서 알고 조상들이 저지른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암리 마을에 들어가서 마을버스 운전기사가 되어 평생을 제암리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며 속죄하며 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리가 ‘일본은 교회가 약하다.’ ‘일본 기독교는 너무 지적인데 치우쳐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대신 일본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윤리적인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시다 고조 목사님을 그렇게 쓰지 않고 서울 일본인교회를 세워서 목회를 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인물이고 하나는 신약인물입니다.
하나는 아담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은 다음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셨습니다.
아담이 ‘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무슨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담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라고 대답했습니다.
책임을 아내에게 돌렸고 나가서는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하와는 또 뱀에게 돌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나는 아담과 하와보다 훨씬 낫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인물은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하고서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이 피에 대해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6:24) 책임을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무리에게 돌렸습니다.

빌라도가 ‘나는 책임이 없다’고 했다고 해서 그 책임이 면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면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 책임을 빌라도에게 물었습니다.

각 사람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이 있었습니다(겔 18:1).
잘못은 아버지가 하고 책임은 아들이 진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니다.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다.‘라고 예레미야서 31장 3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악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 때문인 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빛의 사명,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대통령 탓을 많이 합니다.
대통령 탓을 하기에 앞서서 책임을 나에게서 찾는 교회들이 되어야합니다.

1988년 2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라는 단체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여러 가지 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이 선언문에서 가장 값진 부분은 분단은 한국교회의 책임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분단구조 속에서 안주하고 분단극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했을 때 요나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 때는 자기가 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다시 나오게 될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책임을 지려고 한 것입니다.
빛이 주변을 밝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소금이 부패를 막기 위해서는 녹아져야합니다.
그런 것이 없이 입으로만 빛, 입으로만 소금, 그러니까 이 사회는 아직도 어둡고 이 사히에는 부패가 만연해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이 말은 줄이면 ‘내 탓이오!’ 이렇게 됩니다.
아까 캠페인 이야기를 했는데 천주교에서 한 ‘내 탓이오!’ 캠페인도 기억에 남습니다.

요나의 책임질 줄 아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일에 대해서, 주변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비록 사명을 피해 도망을 쳤지만 그래도 이렇게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정직한 모습을 보이고, 책임질 줄 아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어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게 하셨습니다.
물고기에게 명해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요나에게 다시 한 번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잘 이뤄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요나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려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택해서 니느웨로 보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래도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정직한 모습을 보이고, 책임질 줄 아는 모습을 보이자 뜻을 돌이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요나서 3장 10절을 보면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보고,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고 뜻을 돌이키사 니느웨 사람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대해서 먼저 뜻을 돌이키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오. 하늘에 계신 분이오.’ 하시기 바랍니다.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렇게 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한 잘못에 대해 나는 책임을 지겠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이 교회를 다시 들어 크게 쓰실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 정직함, 책임을 새롭게 해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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