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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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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장 1-15절

(1)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취한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 이 아래와 같으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3) 두 지파와 반 지파의 기업은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주었음이요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 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만 줄 뿐으로 (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 (6)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기업신앙

이스라엘 신앙은 기업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물려주신 땅이 바로 기업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기업을 ‘나할라’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정복한 가나안 땅을 나누어 각 지파별로 나누어주었고, 각 지파는 또 각 가문과 가족별로 그 땅을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분배받은 땅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그들 필생의 과업이었는데 이것을 기업신앙 곧 나할라 신앙이라 합니다.

나할라 신앙의 대표적인 모습은 북 이스라엘 왕 아합 왕 때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아합 왕의 궁전 가까이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자기의 궁전을 더 넓히거나 전경상의 문제 때문에 그 포도원을 자기 소유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더 후한 값을 치르겠으니 그 땅을 팔라 하지만 나봇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나할라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21:3) ‘유업’이 곧 나할라 입니다. 나할라기 때문에 왕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은 페니키아 쪽에서 온 이방 여자였기 때문에 이런 나할라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합 왕이 그 포도원 때문에 끙끙대는 모습을 보며 아합 왕을 비웃습니다. 결국 이세벨이 속임수를 써서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세벨과 아합 왕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하21:19)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그 온 집안이 망하게 됩니다. 아합 왕은 바알 우상을 섬기며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결정적으로 아합 가문이 망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나할라 신앙을 귀중하게 보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그 나할라를 최초로 분배받는 과정입니다. 14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이미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의 절반 지파는 요단강 동편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 나머지 아홉 지파와 므낫세 절반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분배 받을 때 ‘제비를 뽑는’ 방법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견해에 의하면 제비뽑기 방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항아리 두 개 중 하나에는 각 지파의 이름을 써서 넣고, 다른 항아리에는 분배받을 땅의 대략을 정해서 넣습니다. 제비뽑기는 각 항아리에서 하나씩 뽑아서 지파와 그 땅을 일치시키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방법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다른 방식이 사용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재수보기나 운에 맡긴 결정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제비뽑기를 요행수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비뽑기 과정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고 생각하였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비뽑기를 통한 방법의 신뢰성은 이미 여리고성의 범죄자 아간을 색출할 때 증명된 바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우고 범죄한 자를 제비뽑기로 가려냅니다. 처음에는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지파중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 중 삽디 가문이 뽑혔고, 삽디 가문중 최종적으로 아간의 가족이 뽑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 분배라는 매우 중요한 선택도 요행이나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땅을 분배받는 과정에서 불만이 생길 법도 합니다. 기름지고 좋은 땅을 차지한 지파도 있고, 척박하고 황무지와 같은 곳을 분배받은 지파도 있을 것입니다. 넓은 땅을 차지한 지파도 있고, 인구수에 비해 좁은 땅을 차지할 지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땅 때문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내용은 성경 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지파들이 받은 땅들을 보면 몇몇 지파는 불만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 지파의 경우는 강력한 적이 있는 블레셋 부근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 낀 좁은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에서 더부살이 하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반면에 유다처럼 큰 지역을 차지한 지파도 있고, 요셉 지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뉘어 두 몫을 차지했습니다. 더욱이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 동쪽과 서쪽 양쪽에 걸쳐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 지파

레위 지파는 아예 기업을 분배받지도 못했습니다. 3절에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어지는 4절 뿐만 아니라, 13장 14절과 33절에서 연거푸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았다”고 반복합니다. 듣는 레위 지파로서는 섭섭할 일입니다. 대신 레위 지파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입니다. 이들은 땅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거할 성읍과 약간의 들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이들은 각 지파가 제물로 바친 물건을 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 성 또한 각 지파 사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자기 땅을 가지고 자기 지분을 가진 지파하고, 땅도 없이 그들 사이에 흩어져 더부살이 해야 하는 지파와는 그 안정감과 만족도에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실 흩어져 살아야 하는 레위 지파의 운명은 일찍이 창세기에 나타난 야곱의 유언에서부터 결정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세겜 족속으로 인하여 야곱의 딸 디나가 모욕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때 레위가 앞장서서 세겜 부족으로 하여금 할례 받도록 속인 후 그들을 잔인하게 살육하였습니다. 이 결과 야곱 가족이 인근 부족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건 때문에 야곱은 레위를 싫어했고 결국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저주합니다. 창세기 49장 5절에서 7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의 저주대로 시므온은 유다의 더부살이 하는 운명에 처했고, 레위 또한 온 지파에 흩어지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레위 지파는 48개 성으로 나뉘어 가나안 땅 전역에 골고루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자신의 운명을 슬기롭게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흩어진 것을 오히려 복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흩어져서 하나님 말씀을 12 지파에게 가르쳐서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레위 지파 출신들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각 지파에 흩어져 그들의 죄를 인해 제사를 드리고 그들의 복을 비는 제사장으로 살아갔습니다. 레위 지파는 이 땅의 기업을 차지하지 못하였지만 하늘 양식으로 먹고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삶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저주스런 운명을 받았지만 이것을 복으로 바꾼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흩어져 하나님 말씀을 전하며, 빛으로 살아야하는 사람들입니다.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 양식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특히 목회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는 특히 목회자들의 잘못이 많습니다. 주의 종들이 하늘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꾸 땅의 양식을 탐하고 땅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니 그렇습니다. 레위 지파는 하늘 양식으로 만족하라는 운명이 주어졌지만 이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감사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롬11:29).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로 받을 때 모든 것이 복으로 변합니다. 각 지파들에게 주신 기업이 사람들 보기에는 좋고 나쁨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어떤 종류의 땅이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점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고 그 뜻은 완전합니다. 우리가 이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자존심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세상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동안 홀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 자기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빚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습니다. 여러 번 실패를 경험하고 또 자기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쉽게 절망합니다. 그런데 그 절망의 모습을 잘 분석해 보면 대부분 다른 사람과의 비교이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자기는 정말 무능력한 인생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타인이 여러분의 인생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십시오. 나는 나일뿐입니다. 내가 꽃피는 시기와 내가 맺어야 할 열매가 다른 것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과만 승부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주시는 기업이 있습니다. 요즘은 옛 이스라엘처럼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는 대신 달란트가 주어졌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주인이 먼 타국으로 떠나면서 그 종들을 불러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합니다. 주인은 그 재능에 맞게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의 달란트를 각자에게 주었습니다. 이 달란트는 세상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차별처럼 보이지만 차별이 아니라 저는 구별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역할이 다른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누가복음 19장에서는 열 명의 종에게 각각 한 므나씩 공평하게 주었다(눅19:13)고 누가는 전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달란트를 주었고 그 달란트는 각각 다릅니다. 달란트는 내 재능이 될 수도 있고, 내 직업이 될 수도 있고, 내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업으로 인정하느냐입니다.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주신 기업으로 깨달은 자가 가장 행복합니다. 현재 일을 마지못해서, 또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배해주신 몫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 일을 바라보고 그 일을 하는 우리 태도가 바뀔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자기 기업에 대해서 적극성을 보였던 사람 중에 갈렙이 있습니다. 갈렙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읽은 14장 6절 이하에 등장합니다. 85세의 한 노인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자기에게 주어진 산지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갈렙은 일찍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함께 그의 믿음을 보였던 사람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족속들은 거인 같고,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믿음 없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민수기 13장 32, 33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 보고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곡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 40년을 방황해야 했으며 이 당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런 백성들을 향하여 그 옷을 찢으며 믿음을 격려했습니다. 민수기 14장 8,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 두 사람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을 보였던 갈렙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민수기 14장 24절입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갈렙은 이 사건 이후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45년이 흐른 이후 갑자기 다시 성경에 등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읽은 14장 10절 하반절부터 12절입니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은 무려 45년 동안 이 약속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 동안에 여호수아는 승승장구하고 가나안 땅 정복을 이룬 대 위인으로 우뚝 서지만 갈렙은 전혀 이름을 빛내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에 비교하여 초라한 인생에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질투심이 생길만도 합니다. 갈렙의 속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결코 그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리며 자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가데스바네아 당시보다 지금이 더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좌절한 사람은 이렇게 자신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모두에게는 자기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지키고 준비해야 합니다. 갈렙은 자신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세월이 갈렙의 비전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나이 들어갈수록 더 선명하게 빛났습니다.

그러다 때가 되자 갈렙은 담대히 나아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합니다. 갈렙이 요구했던 산지는 평범한 곳이 아닙니다. 12절입니다.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기 ‘혹시’는 갈렙의 마음을 잘못 보여주는 번역입니다. 마치 어떤 우연이나 요행수를 바라며 믿음 없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개역 개정판에서는 이 ‘혹시’라는 단어를 뺐습니다. 갈렙이 요구했던 땅은 아낙 자손의 땅입니다. 이 땅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을 두렵게 하고 눈물 흘리게 했던 그런 거인족들의 땅입니다. 다윗 시대의 골리앗이 바로 이 아낙 족속 출신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갈렙은 다른 편한 땅이 아니라 바로 그 험한 땅을 달라고 당당히 요구합니다. 여러분 편한 곳을 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을 원하십시오. 그래야 우리 인생이 보람 있고 자기 인생에 만족이 있습니다.

15장 14절 이하에는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던 지파나 가문 중에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갈렙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갈렙은 아낙 자손의 세 자손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습니다. 갈렙은 혼자만 믿음이 두터웠던 사람이 아닙니다. 갈렙은 온 가족의 믿음이 강했습니다. 갈렙이 기럇세벨 이란 곳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기 딸 악사를 주겠다고 하니까 옷니엘이 용감히 나아가 그 땅을 점령합니다. 그 딸 악사 또한 적극적입니다. 아버지 갈렙에게 자신의 몫을 요구합니다. 15장 19절입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적극적으로 복을 간구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것이 우리 삶의 태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아프카니스탄 피납 사태 때문에 가슴이 무거웠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당할 고통과 안전 때문에, 그리고 결국 한 분이 죽음을 당하게 되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프간 피랍 사태를 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믿는 자이건 그렇지 않은 자이건 모두가 이번 사태를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런 안타까움과 함께 더 이상 기독교는 신뢰할 수 없는 광적인 집단이라는 반감이 역력했습니다. ‘거기 왜 갔니?’ ‘너나 잘 해라’, 심지어는 ‘세금이 아깝다’ ‘너네 하나님은 어디 갔느냐?’는 식의 빈정대는 글들이 인터넷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충격적일 정도입니다. 마치 같은 땅에 전혀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항상 말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빛이나 사랑을 원하지 않는 듯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그래도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요, 분당샘물교회는 건강한 교회중 하나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인정받는데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한국민족의 위로자가 되거나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 하기에는 그 반감이 너무 큽니다. 이 기회에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모습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 배타성 때문에 교회는 스스로 성을 쌓았고, 그 밖에 있는 세상은 교회를 더 이상 존경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는 말씀이 또 하나의 배타성이나 정복주의자의 자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자기희생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구약 말씀을 읽을 때도 이 십자가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그렇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가나안 주민들의 시각에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날 히브리인들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우리가 수백 년 동안 터전으로 잡고 있던 땅들을 빼앗아 갔다. 그들의 신 여호와는 매우 폭력적이어서 우리 어린아이들의 목숨까지도 잔인하게 앗아갔으며 심지어 말의 힘줄을 끊고 우양도 죽였다.”

여러분 우리는 구약 말씀이 기록되던 고대 시대의 눈으로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는 이런 정복 전쟁과 폭력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유럽을 휩쓸었던 몽고군은 잔인하기로 유명했고,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했던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얼마나 많은 인디언들을 학살했습니까? 오늘날 우리 시대의 윤리로 과거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 과거의 기록이 하나의 모범이 되어 거룩한 전쟁이라는 폭력과 정복 이데올로기를 유포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구약의 폭력성과 배타성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오직 우리에게는 자기 희생과 사랑만 있을 뿐이지 무례하게 다른 사람을 배타하거나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구약은 그 사실 자체보다는 그 의미를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컨대 적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 속 안에 있는 죄악이나 사회의 불의에 대한 척결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이제 우상 세력과의 싸움은 내 안에 물질적인 탐욕과의 싸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대항했던 적들과의 싸움은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사단과 어둠의 세력과의 영적 전투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갈렙의 외침은 정복주의자의 슬로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허락하신 분야가 있고, 영역이 있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고, 나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될 직업과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찾아가야 하며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합니다. 갈렙은 85세의 나이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가 되자 과감하게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이 산지는 결코 편하고 쉬운 곳이 아닙니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곳이기에 갈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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