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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벧엘에서의 축복 (창 3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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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벧엘에서의 축복         
♣ 본 문: 창세기 35:9~15

하나님의 대명사는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6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사랑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넉넉한 가정에서 부족함을 무르고 자라난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이 딸이 그만 친구를 잘못 사귀어 방황하다가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유흥가를 떠돌다가 나중에는 창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내는데 나이가 들어가자 찾는 사람도 줄어들자 깊은 비탄에 빠졌습니다. 자살을 하고자 약을 앞에 놓고 있는데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이“죽는 것은 급하지 않는데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죽어야지.”하는 생각이 나서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밤중인데 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집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조심조심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삐걱하는 소리가 나자마자“케시냐?”하며 어머니가 달려 나왔습니다. 두 모녀는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한참 뒤 딸이 어머니에게, 문소리에 저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이 “네가 집을 나간 뒤 이날까지 밤마다 불을 끄지 않았고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혹시나 네게 돌아왔다가 잠긴 대문 앞에서 주저하다가 돌아설까하여 나날까지 너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꼭 이와 같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15:11~32에는 집을 나간 탕자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탕자는 부잣집 둘째 아들로 고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인지,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고마운 일인지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탁한 공기로 호흡의 곤란을 느끼기 전에는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갔습니다. 허랑방탕한 삶을 멋과 자유로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지닌 재산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슬하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온 몹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한없이 기뻐하며 반가이 맞이했습니다. 목욕을 시켜 새 옷을 갈아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탕자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며 세상 죄악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과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한 맹세를 잊어버리고 세상 물욕과 안일에 눈이 어두워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세겜이란 지명이 뜻하듯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분적 순종으로 끝내면서 행복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러한 야곱의 행복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딸은 이방에게 욕을 당했고, 이에 격분한 아들들은 복수의 피를 흘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좌절과 한숨과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다시 찾아 오셔서 “야곱아 일어나 벧엘로 가라”하셨습니다.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을 중심하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거기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자기의 생각, 자기의 욕망, 자기의 고집, 다 버리고 깊이 뉘우치며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노라고 굳게 결심하고 왔습니다. 이러한 야곱을 보신 하나님은 지난날 불순종을 탓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 본문입니다. 어떤 축복을 말씀하셨습니까?

一. 아름다운 이름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9~10절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발뒤꿈치를 잡다.” “빼앗다.” “속이다.”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날까지 이름처럼 살아왔습니다. 이제 이렇게 불명예스러웠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개명은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자 야곱을 당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야곱을 대하여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고쳐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야곱의 후손들은 지금도 이스라엘 국명(國名)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국토는 좁아 우리나라 강원도 넓이 정도 됩니다. 인구는 1천5백만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나라, 불멸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두뇌가 명석한 나라, 소수이지만 실질적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는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세 가지 본능적 욕망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명예욕입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후손들에게는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합니다. 이웃에게는 존경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업적을 과장되게 꾸미기도 하고, 학력과 학위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거짓이 밝혀져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금강산 입구에 있는 바위산에는 “김일성 수령 만세”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위위에 그 글씨를 새기는데 사용된 포탄이 7천여발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탄피를 4천여대 트럭에 실어 날랐다고 합니다. 이름 세자를 남기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토록 명예에 집착하는 까닭은 명예에 대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집 벧엘에 머물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을 때 그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동일한 은총을 베푸십니다. 신명기 28:1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축복하시는 사람은 삶의 승리를 얻게 되며,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축복은 덤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1~3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대표적 인물로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부왕(父王)다윗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소원을 올렸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열왕기상 3:5)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솔로몬이 구한 것이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열왕기상 3:9)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솔로몬의 마음과 생각을 더없이 기뻐하시며 축복을 약속하시기를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열왕기상 3:11~13)하셨습니다.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삶의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축복받는 지혜가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야곱이 벨엘에 머문 삶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축복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二.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1절~12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하셨습니다.“후손이 번성하리라.” “후손가운데 왕들이 계속되리라.” “후손들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약속입니까? 야곱에게 하신 이 축복의 약속은 문자적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이 되었고, 야곱의 아들가운데 유다를 통해 이스라엘 왕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을 지금까지 야곱의 후손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농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식농사의 성공비결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시편 112:1~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 자식이 강성하고 잘되리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산을 남기기도하고, 높은 학식을 갖춰 주기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러한 것들도 소중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탈무드에는“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지 말고 빵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라.”고 했습니다. 몇 조각의 빵은 잠시 후면 다시 배가 고프게 됩니다. 그러나 빵을 만드는 기술은 평생 굶주림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본문 11절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섬기며 살아가는 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단비를 내리게 하는 비결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 영국의 한 신문이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그 신문 내용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모두 조사해“위대한 스승들.”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그때 처칠은 신문사에 편지 한통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 한 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신 나의 어머니는 제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어머니 낸시는 아들이 말을 시작할 때부터 매일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링컨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유언은 간단했습니다.“아들아, 매일 성경을 묵상하라. 어려운 일이 닥칠 때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어머니의 유언을 일생동안 잊지 않고 살아갔다고 합니다. 그 험한 역경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씨앗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먼저 벧엘에서의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야곱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부모인 야곱이 세겜에 머물었을 때 자손들에게 화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에 머물자 하나님은 자식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의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 복 받을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의 거울입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심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기세등등하던 시어머니도 나이는 속일수가 없어 기력이 쇠하여졌습니다. 식사 때마다 손이 떨려서 수저를 놓치고, 밥을 흘리고, 국을 쏟고, 그릇도 깨뜨리게 되었습니다. 참다못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구박합니다. 그런데 마침 주방 구석에서 밥을 먹고 있던 고양이 밥그릇은 나무로 되어 있으니까 여기에다가 시어머니 밥을 담아 들여야 겠다 하고는 고양이 밥그릇에다가 시어머니 밥상을 차려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가 시장에 다녀온 사이 초등학교 3학년 된 아들 녀석이 옆집 친구와 함께 통나무에다가 부엌에 있는 칼을 가지고 나무를 자르고 속을 깎아내고 있었습니다.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야! 이놈아 너 지금 무슨 짓하는 거야!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하고 소리쳤습니다.“엄마 왜 그래요. 이것이 다음에 엄마 아빠 드리려고 밥그릇 만드는 것이란 말이예요.”“뭣이 어째”엄마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평화”의 저자인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수들은 그를“배우기를 포기한 젊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조각가 로댕의 학교점수는 항상 꼴찌였다고 합니다. 예술학교 입학을 세 번이나 거부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배후에는 온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야곱의 삶을 본받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하나님을 중심하여 살아간 것처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신앙생활이 때로는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의 평안하고 좋은 것만 따르지 않습니다. 훗날의 영광을 내다보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보다는 시원한 바닷가나 깊은 산속에서 피서를 즐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성전 벧엘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내 영혼과 후손들에 크나큰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기 보다는 집에서 단잠을 자는 것이 편안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피곤함을 무릅쓰고 기도하면 단 잠에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의 응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받들어 섬기시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가 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아름다운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후손들이 잘되게 하십니다.

야곱의 삶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집 벧엘을 중심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아름다운 이름과 후손이 잘되는 큰 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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