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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를 부인하다 (마 16: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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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부인하다 마태복음 16:13-24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정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화를 내셨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말할 정도로 베드로가 잘못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하시니까, 이제 곧 고난을 당하신다고 하시니까, 충성심에서 예수님을 보호해드리고 싶어서 "결코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저희들이 지켜 드릴께요."라고 말한 것뿐인데 그런 베드로를 혼을 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지켜드리겠다고 말하고 싶어도 선뜻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함께 잡혀갈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역시 수제자답게 베드로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지켜드리겠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용기 있게 말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을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내시면서 "사탄"이라며 혼을 내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뿐인가요? 베드로는 이 일이 있기 바로 전에 예수님께 멋진 신앙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으로 인하여 깜짝 놀라시면서 베드로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천국 열쇠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칭찬하시고, 당신이 세우실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겠다고 하셨으면서, 그렇게 멋진 신앙고백을 한 사람에게 갑자기 역정을 내시면서 어떻게 사탄이라고 하실 수가 있는지요. 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물고 계셨던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닐면서 가르치기에 썩 괜찮은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상의 도시이며, 유흥과 환락으로 도시가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회당도 아니고, 어디 조용한 자그마한 언덕도 아니고, 바닷바람이 시원한 해변도 아니었습니다. 쾌락의 웃음소리와, 유흥의 소란스런 음악과 신전에서 우상에게 바치는 향냄새가 진동하는 그러한 타락한 도시에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가이사 아우구스도, 즉 로마 황제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하여 헤롯 빌립을 분봉왕으로 세웠던 지역의 도시입니다. 로마시대에는 도시를 세울 때에 전형적으로 가장 먼저 신전을 세웁니다. 그리고 신전을 중심으로 길을 내고, 그 길에 시장, 관공서, 도서관을 짓는 신전 중심의 도시로 건설합니다. 마찬가지로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세워진 로마의 도시이기에 도시 중심에는 판(Pan)신전이 있었습니다. 판 신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도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볼 때에 거룩하지 못하고, 우상이 지배하는 우상의 도시이며, 유혹과 환락이 가득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도시에는 사람들이 많은 법입니다. 새로운 도시는 활기가 찬 법입니다. 타락과 환락으로 활기찬 도시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질문하셨으며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타락과 환락으로 가득한 곳에서 질문하신 의도는 세상의 유혹과 핍박과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를 따르겠느냐?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 물어보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충성을 다짐하면서 예수님을 지켜드리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환상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주위에 신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그 한 가운데서 "예수님만이 나의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는 사실.. 상상만 해도 너무나 짜릿하지 않습니까? 통쾌하고 속 시원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멋진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의 충성스런 대답, "예수님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걱정마세요." 이 한마디에 화를 내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이런 멋지고 용기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그의 행동에 반해 예수님의 갑작스런 분노와 베드로를 향한 꾸지람에 놀라면서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더 이상 이보다 큰 신앙고백이 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어떤 충성을 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부인..
솔직히 지금 이 시대에 자기를 부인해서 살아가기에는 불가능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해서 이겨야 합니다. 남과 경쟁에서 이기려면 내가 얼마나 자신이 넘쳐나는지, 생명력이 있는지, 남과 특별히 다른 점은 무엇인지,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를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신만만, 기세등등해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UCC(User Created Contents)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사용자 제작 컨텐츠라는 뜻인데요. 보통 요즘 UCC동영상이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 가운데 스스로가 동영상물을 제작해서 자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UCC 때문에 얼짱 스타라고 해서 탤런트 데뷔를 해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자신의 연주를 담은 동영상을 띄워서 인정을 받아 프로 연주자로서 데뷔하는 사람, 가수로 데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동영상의 주제들이 있는데 모두가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어떻게 하면 멋지게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만든 것들입니다.
이러한 세대의 분위기 속에서 누가 바보처럼 자기 부인이 가능하겠습니까?
자기부인 이것은 이 세대속이 아닌 수도원이나 산에서 찾을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라고 한다면 자기부인을 철저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갈릴리 호수에서 이름난 어부였습니다. 그의 형제 안드레도 어부였습니다. 친구 제자들 중에 어부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더 이상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물을 걷어치우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식솔들을 뒤로 하고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고서야 무엇이 자기 부인이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큰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다는 말입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 아이가 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에 저녁 식사를 의지해야 하고, 잘 곳이 없어서 산에서 기도하다가 이슬 맞으며 자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자기 부인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전 앞에서, 유흥과 쾌락의 노랫 소리들과, 우상에게 제사하는 향내가 가득한 거리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자기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했을 때에 "제가 목숨을 지켜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기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식솔들을 뒤로 하고 배를 곯아가며 복음을 전파한 것보다 더 큰 자기 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앞에 두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바로 예수님이 영광과 왕권을 취하시고 이스라엘을 로마에게서 해방시키시도록 도와서 그분을 세상의 정복자요, 승리자의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이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의 자리를 앉으실 때에 자기들이 차지할 감투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를 보고 있는 다른 제자들 역시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시기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왕국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의 생각의 틀에 예수님을 가두어 놓고서 자신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왕좌에 앉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분의 계획이 이뤄지도록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큰 희생을 한들 그것이 하나님의 일과 상관없고, 그것이 아버지의 계획과 상관이 없는데 그것이 아버지를 위한 자기희생이요, 자기 부인이겠습니까?

성경에는 23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원어로 해석을 하자면 "너는 나의 장애물이 되었다."라고 표현이 됩니다. 곧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 그의 이름이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반석, 곧 돌덩이 장애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일순위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멋진 신앙 고백을 하였지만 그의 일순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 순위는 자신이 생각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에는 고난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 계획에는 고통이란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셨지만 베드로는 영광의 왕좌에 오르는 예수님과 그 우편의 멋진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을 상상하였습니다. 그것이 일순위였습니다. 그래서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안됩니다. 예수님!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시면 나의 꿈은 어떻게 하라구요! 식구들을 버리고 따랐는데, 우릴 버리고 돌아가시면 우린 이제 어떻게 하라구요. 우리의 꿈은 어떻게 하라구요. 안됩니다.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멋진 신앙고백 뒤에는 자기 자신이 예수님보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 그리고 당신이 받아야 할 고난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고백한 이 한 마디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계셨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뜻은 죽음을 지나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알고 묵묵히 고통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버거움의 눈물을 삼키며,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이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고백이 바로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 고백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보다 더 멋진 신앙고백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포기함으로 오는 고통을 머금고 하나님께 주권을 맡겨드리는 것 바로 그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스포츠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부분 오스카 상을 받은 이 영화의 제목은 "불의 전차"입니다.
에릭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지망생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 청년은 영국의 한 대학교 육상선수 대표이면서 100m 단거리 국가대표 선수입니다. 이 청년은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100m 단거리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많은 외신들도 이 청년을 주시하였고, 많은 팬들이 그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릭은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지망생으로 신앙이 투철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기가 주일에 배정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에릭은 프랑스로 가는 배 위에서 배정표를 받자 마자 올림픽 선수단 단장에게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일에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금메달을 위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에릭은 100m 에서는 세계가 놀랄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국도 에릭에게 기대한 바가 컸습니다. 그런데 에릭이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100m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올림픽 위원회에 건의를 해서 100m를 포기하고 400m로 자신의 종목을 바꾸었습니다. 짧은 거리, 짧은 시간동안 최대의 순발력과 최대의 운동력을 발휘해야 하는 단거리 선수에게 400m를 뛰라는 것은 결국 모든 경기를 포기하란 의미와도 같습니다. 이 사실이 영국 신문에 기사화 되었고, 에릭은 그 사건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앙이냐? 명예냐? 영국과 전 세계에 이 청년의 무모한 결단에 대한 기사가 돌았습니다. 영국에서도 비난이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을 비아냥거렸습니다. 영국의 왕자가 와서 에릭을 달래 보지만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왕자가 달래도 변하지 않는 에릭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난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에릭의 누나는 에릭이 올림픽 대표선수로 프랑스에 간다고 했을 때 못마땅하게 여기며 만류했습니다. 선교사로 나갈 사람이 육상선수로 뛰면서 금메달을 딸 생각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에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나, 난 하나님을 위해서 뛰는 거야, 난 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걸 느껴" 누나는 그 말이 허풍인 줄 알았지만 동생이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주일 경기를 포기한 것을 보고 동생의 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이 돌아왔습니다. 400m 트렉에서 몸을 풀고 있던 에릭에게 누나가 쪽지 한 장을 보냅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겠다" 사무엘 상 2장30절의 말씀입니다. 누나가 동생이 주일 경기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프랑스로 뒤따라 온 것입니다. 그 400미터 결승 경기 관람석에서 쪽지를 보낸 것입니다.

에릭은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지만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쓰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고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하나님께 드리며 자기 자신의 달란트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결국 에릭은 400m에서 금메달을 휙득했습니다. 누나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영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이 난리가 났습니다. 드디어 자신을 부인하고 고통을 선택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존중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명예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 많은 사람에게도 새로운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에릭은 그 올림픽 이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에도 불구하고 육상선수로서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선교사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전쟁이 벌어지니 곧 귀국하라는 영국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서 복음을 전하다가 세계 2차 대전 말기에 일본 수용소에서 하늘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금메달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부인하며 자기가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서 뿐만이 아닌 중국에서도 생명을 낳았습니다.

도저히 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와 반대되는 멋진 기회가 있습니까? 그 기회를 포기하고 자신의 권리를 부인할 때 그 때 생명이 임합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정죄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부인할 때 생명이 임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까? 미워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시킬 때 생명이 임합니다.
자기부인을 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한자. 그에게는 생명이 있으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통가운데 자기를 버린 자에게는 생명이 있으리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 고통의 십자가로 인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자기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짊어지신 그 십자가로 인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생명을 지금 이시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도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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