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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구하느냐? (요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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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구하느냐? (요1:35-42)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 어떻게 제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35-37절을 다시 보면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했습니다. “또 이튿날”이라 한 것은 본문 보다 앞선 29절에서 “이튿날”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루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절부터 보면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자기에게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부터 “네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받고는 자기 자신과 예수님의 존재에 관해 분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곧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그 분이 곧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실 것인데 사실은 그가 이미 오셔서 무리 가운데 서계시지만 사람들이 아직 알아보지 못할 뿐이라 했습니다(요1:26-27).

  그렇게 말한 그 다음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요1:29-31) 하고는 또 증언하기를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요1:32-34) 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이튿날 세례 요한은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는 다시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사흘 동안을 연속해서 예수님을 증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있던 두 제자를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도록 보낸 것입니다. 본문의 저자는 그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안드레였다고 4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저자 자신 즉 요한이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선생이 자기 제자를 다른 선생에게 보내는 일이나 제자가 여태까지 따르던 선생을 떠나 다른 선생에게로 가는 것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이나 그의 제자들이 아무런 주저함이나 고민함이 없이 그 일을 행한 것은 그들 모두가 갖고 있었던 공통된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이란 참으로 오셔야 할 그 분, 모두가 찾아야 할 그 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모든 사람에 앞서서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 죄를 지시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신 어린 양이신데 세례 요한은 어제도 자기에게로 나아오셨고 또 오늘도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바로 그가 그 분이심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자기에게 제자들을 붙잡아둘 필요가 없어졌고 모두 예수님에게로 보내야 했으며, 그의 제자들도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참 주님이 누구신지를 안 이상 세례 요한에게 머물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와서 당신을 따르는 두 제자를 보시고는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본문 38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왜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지를 모르셔서 던지신 물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게 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질문을 받고 두 사람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무엇을 구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고 되물은 것은 다소 엉뚱한 반응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거주환경을 먼저 확인한 후에 같이 살만 하면 그 때 왜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것인지 이유를 밝힐 것이며, 만일 도저히 같이 살만한 형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니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를 굳이 미리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뜻의 대답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온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오실 이로 기다려오던 바로 그 분이심을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찾고 따라야 할 바로 그 분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스승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유대 광야에서 거하며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삼던 사람이었습니다(마3:1, 4). 아무리 예수님의 거주환경이 나쁘다 해도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한 질문 속에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의 물질적 여건에 대한 궁금증이나 조금이라도 보다 나은 생활환경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그 질문의 의도는 “선생님, 저희들이 선생님께 나아오며 구하는 바에 대하여 드릴 말씀, 여쭐 말씀, 듣고 싶은 말씀이 많습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선생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닐 것이니 두고두고 말씀을 나누도록 해주십시오. 선생님께서 어디에 머무시는지 말씀만 하십시오.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라는 뜻이 담긴 질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의 대답에 만족해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답이나 질문이 잘못되었다 어떻다 말씀하지 않으시고는 그저 “와서 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예수님 계신 데로 갔으며 그 날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본문 39절). 그 두 사람이 예수님 계신 데를 가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아무런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저 그 두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확실한 반응은 그들이 그 날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그날로부터 예수님과 함께 거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의 삶의 여건이 편안하고 풍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물질적 여건은 세례 요한의 그것보다 나을 바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사람에게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예수님을 만나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두 사람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 하셨으며 그들이 가서 예수님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했다고 오늘 본문은 전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안정적인 거처 없이 돌아다니신 분입니다. 거할 곳이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떠나지 않게 만든 것이었겠습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14:1-4).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길이시고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게 될 영원한 거처가 예비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 환경은 중요하지도 문제가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끝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한 두 사람이 곧바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두 사람 중 하나였던 안드레가 제일 먼저 한 일을 본문의 저자는 41-42절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안드레가 한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린 일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음을 알린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드레가 그의 이전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관해서 한 말들이 다 사실임을 예수님을 만나서 확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을 만난 그날로부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었고, 너무나 확실한 그 놀라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어 형 시몬에게 전했으며, 전하는 것으로만 그칠 수 없어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많은 질문이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우리 또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도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실 터인데 우리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도 주님께 “주님, 어디 계십니까?” 묻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우리 삶의 물질적 여건에 관한 궁금증에서 오는 질문인가, 아니면 그런 염려로부터 자유해진 마음의 증거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확실히 믿고 있으며 그만이 우리가 찾고 따라야 할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확신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살게 될 영원한 거처가 우리에게 예비되었음을 굳게 믿고 기쁨과 평안함 가운데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넷째는 우리가 과연 전적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섯째는 우리는 과연 안드레처럼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우리의 주변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하며 증언할 뿐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주님께 데리고 나오기를 힘쓰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음을 발견합니까?

  우리 모두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자들의 제자로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모든 사람이 찾고 따라야 할 유일하신 분임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머뭇거리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유일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굳게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항상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 거주할까? 어떤 집에서 살까?” 하는 등의 문제와 염려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항상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이고 우리의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의 규범과 동기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처럼 예수님이 온 인류의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우리 주변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증언하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를 힘쓰는 주의 일꾼들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구하느냐?” 하시는 주님의 물으심에 바르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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