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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볼렛(Shibboleth)이냐, 씨볼렛(Sibboleth)이냐? (삿 12:5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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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볼렛(Shibboleth)이냐, 씨볼렛(Sibboleth)이냐? (삿 12:5 ~ 6)

혀가 짧은 스승이 제자에게 '나는 바담풍 하지만 너는 바담풍 하라'는 말은 누구나 한번쯤은 듣고 웃어본 경험이 있어서 요즘은 잘 웃지도 않습니다. 혀가 짧지 않다 하더라도 그 지방의 구음의 특성상 독특한 발음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제가 일본 비행기를 타고 벤쿠버를 가는데 기내에 있는 일본 여자 승무원이 벤쿠버 발음을 방쿠바로 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김치' 라고 발음 못하고 '기무치'로 발음합니다. 그런데 여기 구음의 차이 때문에 죽고 사는 문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볼렛이냐? 씨볼렛이냐?

Ⅰ. 이 물음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입니다.

이스라엘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누구로 인한 것이냐고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브라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의 구원의 주체가 한 영웅적인 장군 '입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전쟁에 동참하지 못한 것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공유하지 못한데 대하여 분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에브라임 지파의 지나친 우월감에서 야기된 교만입니다. 그러나 정작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입다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전쟁의 승리는 그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입다 자신은 비천한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웅적 행위를 자랑하지 아니했습니다.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구원과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가 암몬 족속을 치러갈 때 도움을 청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함께 전쟁에 참여하여 힘써야 할 때는 뒷전에서 방관만 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스러운 결과에 대해서는 시기했습니다. 또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뿌리도 근본도 없는 족속'이라고 근거 없는 말을 하면서 심지어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본문 12장 4절에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들은 길르앗 사람들은 분개했습니다. 이제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르앗 사람들에 의해 쫓기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본문 12장 5절에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고 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그들이 이제는 에브라임 지파가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길르앗을 침략하려다가 오히려 쫓겨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길르앗 사람들은 도망가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볼렛'(tl,Bov)이란 발음을 사용했습니다. 이유는 에브라임 지파는 아무리 노력해도 '시볼렛'이란 발음을 할 수 없고 '씨볼렛'(tl,Bosi)으로만 발음되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시볼렛'의 발음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 앞서서 요단 나루터에서 검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나루터는 배가 들어와서 정박하는 곳을 의미하지만 본문의 나루(아라비)는 배로 건너는 나루가 아니라 수심이 얕아서 배 없이도 건널 수 있는 여울목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길르앗 사람들은 여기에 진을 치고 달아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붙들고 시볼렛을 발음해 보라고 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시볼렛을 발음할 때 쉰( )을 발음하지 못하고 싸멕( )으로 발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대의 경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먹는 쌀을 '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살'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지방에서는 '의'가 어로, 어떤 지방에서는 '으이'로 발음되기도 합니다. 또 '팔'을 '폴'로 발음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옷을 빨다'할 때 '옷을 뽈다'라고 발음 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때 요단 나루터에서 길르앗 사람들에 의해 죽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사만 이천 명이었습니다.

본문 12장 6절에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口音)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당시 첫 번째 인구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의 장정수가 사만 오백 명이었습니다(민 1:33). 그리고 2차 조사에서 그보다 줄어서 삼만 이천오백 명이었습니다(민 26:37). 입다에 이르기까지 약 300여년 동안 에브라임 지파의 인구가 증가했다고 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사만 이천 명이라는 인구가 길르앗 사람들에 의해서 도륙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를 색출하는 방법치고는 너무 간단한 방법이면서 그러나 그 간단한 방법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살고 싶지 아니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시볼렛이 안되고 씨볼렛이 되는 데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볼렛이냐? 씨볼렛이냐?

Ⅱ. 이 물음에 대한 묵시적인 교훈입니다.

주석가 델리취는 "시볼렛의 뜻은 시냇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했고 씨볼렛의 뜻은 어떤 이들은 무거운 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라고 했습니다.

1) 생과 사의 갈림길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본문 12장 6절에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口音)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이 물음은 생과 사를 가늠하는 심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생과 사가 가능케 되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심판은 영생과 영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전도서 11장 9절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5절에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15절에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심판대는 엄격하게 양극화된 심판대입니다. 영생 아니면 영벌입니다.

2) 율법아래 있는 성도는 살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2장 6절에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口音)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죽이는 법입니다. 율법대로 하면 여기에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7장 3절에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9장 30-31절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사람 모세와 예언의 사람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변화산에서 한 이야기의 주제는 예루살렘에서 장차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8절에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만 남겨놓고 갔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율법을 완성시켜야 됩니다. 예수는 예언을 성취시켜야 됩니다. 그 예언 성취와 율법 완성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이 땅에 왔으니 율법도 예언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떠나갔습니다. 이유는 율법의 본체이신 예수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은 율법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을 율법에 의한 행위로 얻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도 성경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의식이나 규례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 대신 자신의 의를 앞세우는 자들입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를 믿지 않고 율법아래 있는 성도는 '시볼렛'이라고 발음할 수 없는 에브라임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Ⅲ. 예수를 믿어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예수는 영생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태초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부터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계약을 은혜계약(구속)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어야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50절에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21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2) 예수는 구원 자체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3) 예수는 부활 그 자체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부활의 약속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노한 길르앗 사람들이 교만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을 색출하여 죽이기 위해 시볼렛이란 구음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시볼렛이란 발음을 할 수 없고 씨볼렛이란 발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볼렛이 시냇가의 의미가 있다면 이것은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에 비유했듯이 시냇가는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씨볼렛이 무거운 짐을 의미한다면 무거운 죄짐을 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묵시적 교훈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아직도 율법아래 있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려고 하면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8-10절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영생 그 자체이시며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시볼렛이냐, 씨볼렛이냐!
시볼렛과 씨볼렛은 비슷한 발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교인들이 다 비슷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아니합니다. 신랑을 맞으러 등불을 들고 나간 열처녀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슬기 있는 처녀가 있고 미련한 처녀가 있습니다(마 25:1-13). 많은 사람들 중에는 시볼렛을 발음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시볼렛이 발음되지 아니하고 씨볼렛으로 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에게는 영벌이 보장되었을 뿐입니다.
이 땅에서 축복받을 자들은 벌써 생각부터가 틀립니다. 그 마음이 예수를 믿어 그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 앞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을 보면 구원받을 사람인지 아닌지 축복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지상교회는 축복받은 사람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지각과 양심과 신앙을 동원합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십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시볼렛을 발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저 사람은 씨볼렛으로만 발음이 되는 사람이라고 속단하지 맙시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못하면 그 결과가 너무나 끔찍합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믿으라고 강권해야 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영생할 자와 영벌에 처할 자는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시볼렛이냐, 씨볼렛이냐를 심판할 이는 우리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예정론은 인간들의 영역이 아닙니다. 윤리적인 행위, 신앙고백이 인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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