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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 (민 9: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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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
+ 설교본문 : 민수기 9정 15 - 2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곧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라는 험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확신하기를 원하는 세 가지를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고난의 장소로 이해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광야는 고난의 장소이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광야로 나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셔서 40일 금식을 하시며 하나님을 대면하셨습니다. 세례요한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그 힘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간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삼풍백화점 사고가 났을 때 보니까 몇 일만에 건물 잔해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실려서 나오는데 눈을 가렸더군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이 밝은 세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흑암 가운데 거하는 인간이 완전한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는 대신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막대기를 두들기거나 피리를 불어서 자신이 양 곁에 있다는 사실을 양에게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혼자 화장실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아이를 위하여 화장실 밖에서 헛기침을 하면서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했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보게 되면 과거의 그가 아닌 완전히 변화되어 새롭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에도 교회를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확연하게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있는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출애굽에 성공했으나 그들 안에는 애굽의 속성이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430년간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애굽의 것들이 그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처럼 믿는 자 속에 남아있는 세상의 속성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고 세상의 속성이 내 속에서 다 빠져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에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은 받았고 천국시민권을 얻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입대하는 순간부터 민간인이 아닌 군인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입대한 이등병이 군인다운 군인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군인이지만 여전히 사회생활의 찌꺼기가 묻어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 그는 완전한 신자,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세상의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광야와 같은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갈 믿음을 준비를 시키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은 믿음으로 누리는 땅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열두 명을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으로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을 누렸습니다. 불신앙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이 준비되어지도록 훈련의 장소로 광야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2.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갈 믿음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면 성막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40년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을 준비시키시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살펴보면서 세 가지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구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과 현존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출 40:34,35을 보면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확신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담대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담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마저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나니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임마누엘’ 신앙,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자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담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본분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실 때가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상당히 위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넘치는 요단강을 밟는 것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고 아주 위험해 보이는 경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면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담대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시선만 의식해도 행동에 주의하게 되는데 만사를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어떻게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마누엘’ 신앙이 확실해서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상처 입은 사람이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타국에서 외롭게 종살이를 하는 젊은이에게 시위대장의 아내의 유혹은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 자신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이는 세계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낮에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것처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밤은 고통의 시간 혹은 죄악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거나 죄악 가운데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절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으로만 함께 하시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만약 구름기둥만으로 함께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은 두려움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광야에는 들짐승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주변에는 적들이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지만 밤에도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름기둥으로만 나타나셨다면 밤에는 식별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에도 볼 수 있도록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시 105:39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라고 노래합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을 막아주시고, 밤에는 불을 밝히셔서 추위를 막아주시고 어둠을 밝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낮의 해로부터 보호하셨고, 밤의 추위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광야의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하셨고 주변의 적들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늘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때였습니다. 광야에는 독사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때는 뱀에 물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쓰러졌습니다.

시 121:5, 6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왜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쪽을 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쪽이 앞이면 남쪽이 우측입니다. 우리나라는 남향을 선호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향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데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가 남쪽에 있을 때입니다. 유대광야에 가보면 남향의 땅에는 풀이 없습니다.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워서 풀이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시 121:5에서도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고 했는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겨울에도 춥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초가을 정도의 기온입니다. 그러니 여름에는 얼마나 덥겠습니까? 저는 겨울에만 이스라엘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여름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여름에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굉장히 덥다고 합니다. 너무 더우니까 구토가 나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시원하답니다. 아마 습도가 낮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기후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는 말씀을 보면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그늘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잘 표현한 시가 시 91편입니다. 이 시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6절까지 계속해서 우리의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임을 확신합시다.

  3)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 길을 몰랐지만 구름기둥이 이동하면 텐트를 정리해서 구름기둥을 따라갔고 구름기둥이 머무르면 그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텐트는 요즘 나온 최신형 텐트처럼 던지면 "착" 하고 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일이 땅에 박고, 줄을 당기어 매어야 했을 것입니다. 천이 오늘날의 것처럼 가볍지도 않았습니다.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와글거리며 텐트를 치고 걷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17-23절에서는 같은 말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따라서 순종하고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 말씀을 다시 정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라 행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한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분명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수증기 잠간 피워놓고 “봤냐 못봤냐?”는 식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만 주목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 주목하면 성령께서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비참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민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이동합니다. 모세가 말리지만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결국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들이 내려와서 그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행동하다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자식을 낳지 못하자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가정에 평화가 깨어졌으며 그 한번의 실수가 지금까지 중동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신 1:30-33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을 대신해서 싸워주시고(30절), 그들을 안아주시고(31절), 장막 칠 곳을 찾아 주시고(33절), 행할 길을 지시해 주시는 분(33)입니다. 

18-23절을 보면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인도하심은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도하심이 말씀과 동일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말씀과 어긋난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부남인데 성가대원 가운데 예쁜 성가대원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여자가 제 이상형인데 함께 살아도 됩니까?” 그랬더니 기도 중에 유리창에 “그래”하는 답이 나왔답니다. 여러분! 이 응답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응답은 유리창이 아니라 TV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하고 평생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성가대의 예쁜 여자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세 가지 확신을 가집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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