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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익한 종의 비유 (눅 1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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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의 비유 (눅 17:7-10)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밖에서 열심히 밭을 갈고 양을 치고 돌아왔습니다. 피곤해서 좀 쉬려고 하는데 집에서 편히 놀기만 하던 사람이 밥상을 차려달라고 합니다. 꾹 참고 밥상을 차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에게 수고했다고 하며 같이 밥을 먹자고 하기는커녕 자기 옆에서 물과 수건을 들고 밥 먹는 시중을 들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나머지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부당하다고 항의할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 말씀처럼 그 사람이 종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종입니다. 자기 주장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야 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도 해야 합니다. 종은 무익한 존재일 뿐입니다. ‘무익한’이라는 말은 ‘가치 없는’ ‘쓸모없는’ 이란 뜻입니다. 나는 가치 없는 종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는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교회를 세우고, 내가 무수한 핍박을 받고, 내가 많은 시간을 드리고 헌신을 했다할지라도 이것이 자기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문제의 관건은 스스로를 이처럼 무익한 종으로 인정하느냐입니다. 인간은 끝까지 종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종으로 시작 하지만 마지막은 주인 행세를 하려는 종들이 많습니다.

종교개혁과 무익한 종

오늘은 종교개혁이 발발한지 490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당시 가톨릭을 비판하는 95개조 격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은 성서 말씀을 떠나서 여러 인간적 교리와 전통으로 가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면죄부는 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해서 그 판매가 시작되었습니다. 연보궤에 넣은 돈이 바닥에서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죽은 영혼이 연옥에서 빠져나온다고 하며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하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종교개혁자들은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이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교황과 사제들의 특권 의식에 반발하여 만인 사제주의, 곧 모든 사람이 누구의 중재 없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의 주장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 ‘오직 그리스도’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구호들의 중심을 관통하는 사상이 바로 이 무익한 종의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교회에는 인간이 권리주장할 근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은 인간의 구원과 죄사함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처럼 주인의 관대함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지 내가 이만큼 선행을 했으니 그 보상의 대가로 구원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서’는 성서를 대신해서 인간의 전통이나 교리가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라는 말씀 앞에 절대 순종해야 하는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이 우리 왕이시다는 고백입니다. 교황이나 사제가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이념이나 철학이 우리 구원의 반석이 될 수도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이처럼 인간이 무익한 종임을 선언한 사건입니다. 인간이 마치 주인처럼 행세한 것에 대해서 다시 원위치로 돌린 사건이 종교개혁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무익한 종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6,70년대 어려운 시절을 지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개척 전선에 뛰어 들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옛날에는 성미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쌀을 모아서 교회에 가져와서 성미함에 넣었습니다. 이 성미함은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한 식량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도들이 여성들이었습니다. 경제권이 없는 여성들이 도울 수 있는 길은 자기 집의 쌀 한 바가지를 몰래 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 눈물겹게 충성했던 것이 당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누가 목회자가 되려 했겠습니까? 신학교는 요즘과는 달리 항상 미달이었습니다. 목회는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단란한 가정의 행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녀들은 말이 하나님께 맡겼을 뿐이지 내팽개치고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런 괄목한 성장을 하게 된 것은 주의 종들의 이런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열심히 밭 일하고 양을 치고 집에 돌아와서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제 밥상 내놔라 하며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큰 교회를 이루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달라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를 요구합니다. 이제는 내가 이렇게 성공한 목회를 하였는데 이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회세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당연할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고생했으니까 자기 몫 찾아간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명령을 따라서 순종해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모든 영광과 권리는 오직 주님의 것입니다.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장로나 권사 등 임직자들도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만큼 헌금했으니, 이 만큼 봉사했으니 그 권리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목회자와 장로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급기야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장로들이 마치 기업의 오너가 된 것 같이 자신의 뜻대로 교회를 좌지우지 합니다. 교회에 인간의 소리가 너무 많이 납니다. 우리는 단지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헌신과 봉사를 했다 할지라도 나는 아무 권리 없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정년 퇴직을 하시면서 마지막 은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이 교회에 23년 동안 목회하며 교회를 성장시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도 아무도 반대할 수 없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65세에 조기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가 1981년도니까 그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이 분의 고별사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 목사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무익한 종과 관련된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 9, 10절을 인용해 “명한 대로 행했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씀한 뒤, 교인들에게 “무익한 종은 물러갑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하고는 단상을 내려왔습니다. 이 분은 바로 청량리 중앙교회의 임택진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이야말로 무익한 종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셨다 할 것입니다. 그 이후 임 목사님은 교회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설교해 달라는 요청도 뿌리쳤습니다. 교인 중 후임목사의 일에 대해 의견을 물어도 “그게 내 교회냐”며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 이런 분들이 많으면 우리 목회자들이 존경받고 한국교회가 정말 이 민족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마치 현대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은 젊었을 때 했던 열심과 충성을 나이 들어 다 까먹고 있는 형국과 같다 할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를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다시 이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종교개혁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개척 단계이고 아직 젊기 때문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아마 저에 대한 판단은 나이 들어서도 이 무익한 종의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일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무익한 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기도했으니까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까 이에 대해서 보상해 달라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보상받지 못한 것에 섭섭해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라,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우리는 이 명령을 수행한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실제 우리는 무익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무익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우리 공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농사를 자기 혼 자 다 짓는 것처럼 착각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씨앗이라는 생명체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땅도, 땅의 영양분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햇볕도, 비도, 적당한 온도도 다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인간은 적당한 때에 씨를 뿌리고, 잡초를 제거하고, 농약을 뿌린 조그만 수고를 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세상 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고, 그 자리에 세우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제도 환경들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내가 하지 않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항변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 일을 맡겨준 것에 다만 우리는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처럼 유익한 종을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또 그것이 자기 능력으로 된 것 마냥 교만해집니다.

어느 날 코끼리 한 마리가 자기 몸무게를 달아보기 위해 체중계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너무 무거워 그만 체중계가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개미 한 마리가 코끼리 등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체중계를 부서진 것을 보고 개미가 코끼리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런 우리 둘이 함께 올라가니까 이런 일이 발생했구나.......” 우스개 이야기지만 우리 인간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으로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담긴 보배가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높일수록 질그릇도 존귀해집니다. 반면에 보배를 무시하고 질그릇을 높이려 하면 결국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이런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베풀고 주는 삶이 더 아름답습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인간관계는 추해지기 시작합니다. 섭섭하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나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들면 원망이 생기고 마음이 매우 불편해집니다. 그 사람을 보아도 심사가 뒤틀려 표정이 바뀝니다.

여러분 오늘 이 무익한 종의 비유를 보면서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 없습니까? 이 사람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부모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밖에서 돈 버느라 힘들어 지쳐서 집에 돌아옵니다. 좀 쉬려고 하는데 어린 자녀들이 와서 함께 놀자고 합니다. 끼니 때가 되니 밥을 차려 달라고 야단입니다. 밥 먹을 땐 또 먹여달라고 보챕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밥을 다 먹고 난 다음에서야 주섬주섬 밥을 먹습니다. 부모야말로 무익한 종의 모범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자라면서부터입니다. 그때부터는 기대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섭섭함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때부터 부모와 자녀의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인간관계를 이처럼 보상과 대가 개념으로 생각하면 복잡해지고 은원에 얽힙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듯이 인간관계도 은혜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아낌없이 베풀고 바라지 않을 때 서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삶입니다. 한 소년과 나무가 서로 사랑을 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그 나무에서 그네를 타고 가지에 매달리며 놀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점점 성장하면서 더 이상 그 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 나가서 살아야 한다면 그 나무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다 줍니다. 또 한참이 지난 후에 와서는 집도 짓고 아내와 자식도 얻어야 한다며 나무 앞에 칭얼댑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나무가 자기 가지를 베어가라고 말합니다.

소년이 중년이 되어서는 배타고 멀리 항해를 나가야 한다면 나무의 둥치를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밑동만 남은 나무는 소년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미안했습니다. “얘야 이젠 내가 줄 것이 없어서 미안하다. 내 밑동에 앉아 쉬어라”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무익한 종과 같은 분은 아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생명과 우주라는 자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대가로 이제 편히 쉬셔도 될 텐데 어린 아이마냥 인간들이 가만히 놓아주질 않습니다. 죄는 자기가 저질러 놓고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자기 실수로 불행을 자초하고도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원망하고 빨리 도와주지 않는다고 야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런 모든 투정을 엄마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마치 무익한 종이 된 것 마냥 다 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우리의 어떤 무리한 항변이나 짜증도 그분이 다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높으신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낮추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우리가 살게 된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무익한 종이 되어 우리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우리가 무익한 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익한 자가 유익하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무익하게 될 때 유익한 존재가 됩니다. 항아리가 쓸모가 있는 것은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가 무익한 존재가 될수록 하나님은 그 안에 많은 주님의 보화들을 담습니다.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무익하다고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고전 『장자』에 보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엄청나게 큰 도토리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높은 산만 했으며 수천 마리의 소가 그 그늘에 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석이라는 유명한 목수가 이 나무를 보면서도 “쓸모없는 나무야!”하며 그냥 지나칩니다. 크기는 하지만 배로도, 관으로도, 기둥으로도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장석이 이처럼 나무에 대해 악평을 하고는 집에서 잠을 자는데 꿈속에 이 도토리나무가 나타나 장석을 나무랍니다. “그대는 내가 과일 나무나 좋은 재목처럼 쓸모 있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는가?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다 베어져 없어지고 말았네.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되었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성경으로 다시 푼다면 무익한 자가 실상은 유익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건축자의 버린 돌을 가져다가 큰 집의 모퉁이 돌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모세가 그 나이 80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입술이 둔합니다,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며 하나님을 화나게 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쓸모없는 모세가 하나님의 손에 들릴 때 그 누구보다도 엄청난 일을 이루었습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6:15)고 고백하는 기드온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형제 중 막내인 여덟째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저는 아이라 말할 줄도 모르다는 예레미야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죄인중 괴수인 사도 바울을 택하셔서 당신의 복음 증거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무익한 것이 실살 유익합니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성녀로 추앙받을 정도로 빈민들을 위한 삶을 살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에 비유하였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 것입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 감탄합니다. 온간 영예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테레사 수녀는 정말 작아서 마치 몽당연필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었습니다. 몽당연필이 자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무익한 종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할 때 아름다운 작품이 그려집니다. 몽당연필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여 그 작품의 영광은 몽당연필이 받지 않습니다. 그 화가가 받습니다. 몽당연필은 그런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연필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질 때 작지만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몽당연필처럼, 무익한 종처럼 쓸모없다고 고백하는 테레사 수녀를 통하여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영혼을 구하는 지극히 쓸모 있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익한 자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은 유능하고 쓸모 있는 사람들은 찾지만 하나님은 쓸모 없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묵묵히 아무 대가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찾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그것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단지 주님의 명령을 기쁘게 감당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도 여전히 나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는 겸손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실상 이런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가장 유익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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