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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자의 기쁨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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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의 기쁨 (빌 2:12-18)

며칠 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S그룹 계열사에서 2008년 탁상 달력을 만드는데 테마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달력에 저의 시 중에<당신이 있어 행복 합니다>라는 제목의 시를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하락했습니다. 그 시가 이런 시입니다.

언제나 내 곁에
당신이 있다는 것이
나에겐 더 없는 행복입니다.

부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주는
지척에 당신 있음에 더욱 행복합니다.

때로는 먼저 알고
내 약함을 세워주며
넘어질까 붙드는 당신이 내 행복입니다.

불볕더위처럼 고난이 내리면
그늘막이 되어주고
소나기같이 아픔이 쏟아지면
우산이 되어주며
준비치 못한 눈처럼 위태한 일 만나면
녹여주는 따스함이 있어….

언제나 내 곁에
당신이 있다는 것이
나에겐 더 없는 행복입니다.  <架痕 김철현>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맛있는 집이라는 집은 다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보는 것에서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이 사람은 실용성이 기준이 아니라 보기 좋은 것을 기준으로 삽니다. 그런가하면 더 고차원적으로는 주는 것으로 행복을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에게 그 필요를 주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곧 내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만 이런 사람은 드문 경우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가장 큰 정신적인 동기는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경우라고 합니다. 내가 비록 어렵고 힘들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아가는 맛을 느끼게 합니다. 나를 쓸모없다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 내가 사랑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알 때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 즉 영혼이 행복해야 정말 행복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눅12장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말 많이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부자에게 결정적으로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다 가졌는데 행복이 없었습니다. 아니 이 부자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이란 영혼 문제와 관계되어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영혼 문제가 관계되고 영생이 문제가 되는 것이거든요. 이 기본적인 것이 확보되기 전에는 오늘의 물질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 이 사람은 영생의 문제와 오늘 자기의 재산을 맞바꾸려고 들었습니다. 그게 어리석은 것이죠.

그래서 탈무드에는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답니다."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난다.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다."이게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행복이란 어디에 있느냐? 어리석은 부자를 보면 많이 가지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랬습니다만 즐길 수나 있었느냐 말입니다. 재산이 그를 즐길 수 있게 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좀 가지고 계신 분들 죽기 전에 다 쓰세요. 정말 아깝거든 유서라도 써 놓으세요. 나 죽은 다음에는 이렇게 하라. 이것도 안 해놓고 죽으면 그 쓰지 않은 재물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걸림돌이 됩니다. 다 쓰고 가세요. 그것도 좋은 일에 쓰면 하나님 앞에 더 칭찬받겠지요. 하여간 세상에서는 깨끗하게 통장 비워놓고 가야 됩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말씀합니다."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이게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둔 부자가 있는가 하면 땅에 쌓아두고 그것도 영원히 쌓아둘 수 있는 줄 알고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아주 망가져 버리는 인간이 있습니다. 비참한 인간, 돈의 노예가 된 인간, 거기다가 목숨을 건 인간, 어리석은 인간. 그를 누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내게 불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자, 행복이란 이런 겁니다. 가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나아가 영혼과 관계된 행복의 근원을 알 때에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을 가장 근원적으로 느끼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누군 줄 아십니까? 우리들입니다.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아십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이가 누굽니까? 우리가 받은 가장 귀한 사랑인 구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미래적이며 종말적 현실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습니다. 그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행복을 오늘 내가 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평생토록 그리스도인의 행복을 누리며 살았던 사도 바울의 행복을 생각해 봅니다. 무엇이 그로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어떻게 행복을 누리며 살았는지를 알면 우리의 행복을 되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행복의 극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 감옥에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조리하고 모순된 처사에 의해 억울한 옥고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기쁨, 이 행복은 물론 물질 적인 것이 아닙니다. 건강 때문도 아닙니다. 세속적인 성공도 아닙니다. 바울은 키가 넉자 남짓하고 안질이 있으며 주기적으로 오는 부끄러운 병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가정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기쁨의 일차적인 근거는 예수께서 나를 살리시고 나를 구속하셨다고 하는 구원론에 근거합니다. 그 구속함에 그의 기쁨과 행복의 근본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바울의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데 있었습니다. 사랑에 미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친다는 말의 어감이 좀 거칠긴 하지만 사실 미친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바로만 미치면 미친다는 것이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미친다는 것이 남이 보기에는 딱하지만 본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본인만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엄청난 행복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므로 내가 그 사랑에 포로가 되고, 그 사랑에 미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런가하면 바울의 행복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자기를 택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필요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내가 나를 볼 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필요하다 하시니 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볼 때 사랑할 만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는 사랑 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행복입니다. 생의 목적, 즉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과 무엇 엔가에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릇이라는 것도 그릇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릇이란 본래 그 속에 무엇을 담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는 비록 부족하고 하나의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쓰임 받는다는 사실에 행복해 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특히 교회에서 여러분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내일부터 3일 동안 저녁 마다 부흥회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필요하시다는 요청입니다. 그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참석하는 일입니다. 내 영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 그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행복을 향하여 나가는 길입니다. 그 행복의 길에 모든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일 저녁 직전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참석해야합니다. 사실은 이게 얼마나 행복입니까? 내가 어제 죽지 않고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내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필요에 내가 진실하게 응답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자기를 바치고자 하는 정열이 있어야합니다. 자기를 바치는 일에 아까와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정신도 줄 수 있어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의 이러한 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7절입니다."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관제라는 말은 양을 가져다 놓고 목을 치면 목이 떨어지면서 피가 솟아오를 때 그것을 그릇에 받아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피를 쏟아 부어도 기뻐하노라. 이것이 곧 내 행복이노라."는 바울의 심정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음을 가져보셨습니까? 이런 대상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린 아직도 행복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이대로 죽어도 좋다."라는 이 순간이 결정적인 행복의 순간입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갈 것이고, 하나님 앞에 책망 받을 일이 없고, 잘 했다 칭찬 받을 만한다면 언제든지"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고백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14:7절에서"자신을 위하여 자는 자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교회를 위하여,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며, 희생하는 그 속에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이것은 자랑거리여야 합니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16절을 보십시오."그리스도의 날에 나의 자랑 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니라."가끔씩 보면 정말 자랑스럽고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자랑하고 알아주기를 바라서 안달하다가 결국 수고한 일을 스스로 부끄러운 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불행입니다. 여러분, 자랑할 것이 혹시 있거든 그리스도의 날까지 가지고 가십시오. 그것이 또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자신이 큰 기쁨을 가지고 살 때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는 것 그 속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바울의 행복은 영원한 것이면서 또한 현세적인 것이었습니다.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었습니다. 이 행복으로 슬픔을 이겼습니다. 고난도 이겼습니다. 이 행복한 자의 기쁨을 여러분들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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