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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앉은뱅이가 예배자로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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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뱅이가 예배자로 (행 3:1-10)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었던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여행 목적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목적지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은 아주 특별납니다. 순식간에 2000년을 거슬러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자, 출발합니다. (-) 도착했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늘 임재 하신다고 유대인들이 믿어온 예루살렘 성전이 펼쳐져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 성전 공간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습니다. 가장 바깥에는 이방인들도 접근할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이 보입니다. 유대교를 신봉하는 이방인들은 여기가 성전 접근의 한계입니다. 이방인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있는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거기에는 유대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인의 뜰>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남자 유대인들만 드나들 수 있는 <유대인의 뜰>이 위치합니다. 그 다음에는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의 <성소>가 건축되어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고 제사장들만 드나드는 곳입니다. 그 성소 가운데에는 휘장이 있습니다. 휘장 너머는 가장 거룩한 장소란 뜻을 가진 <지성소>라고 불립니다. 지성소는 제사장 중의 제사장인 대제사장만 그것도 일 년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전 각 공간은 각 사람들에게 부여된 영적 서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미문 바로 앞에 서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문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 사이에 세워진 니카노르 문이 바로 이 미문을 가리킨다고 기록해두었습니다. 높이가 무려 23m에 달하여 매우 장엄합니다. 문짝은 고린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귀한 황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장엄함과 화려함 때문에 니카노르 문은 과연 미문, 즉 beautiful gate라고 불려도 전혀 손색없다고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유대교 전통은 하루 세 차례 기도하는 시각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각으로 제 3시인 오전 9시나 제 6시인 정오, 그리고 제 9시인 오후 3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겠지만,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곤 합니다.

그런데 오후 3시가 채 못 되어 우리는 매우 안쓰러운 장면을 목격하고 맙니다. 그 아름답고 화려한 미문과는 참 대조되는 광경입니다. 하체를 쓰지 못하는 한 중년의 유대인을 사람들이 들쳐 메고 나타나서 우리 앞에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까? 몸 가누기 힘든 이 장애인은 눕다시피 하여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손 내밀어 구걸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기도 시각에 맞춘 듯합니다.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만나기 원했던 분입니다.

본문 2절에 의하면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반신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 앞에서 구걸해왔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은 이 장애인의 나이가 사십 여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유대 남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구걸하는 생활이 굳어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사연일까? 우리는 다시 40여년을 더 거슬러 예루살렘 근처의 한 가난한 집에 도착합니다. 그 집안 광경이 눈에 선하게 들어옵니다. 부모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아기가 막 태어나고 있습니다.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 탄생을 기뻐합니다. 아들입니다.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도 새 생명 출생의 기쁨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의 하반신이 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자 그렇게 밝았던 집안 분위기는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니 부모마음에는 먹장구름이 짙게 덮입니다. 이 아이가 과연 모진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돌봐주어야 할까? 그리고 부모에겐 원인모를 죄책감이 문득 문득 밀려옵니다. 왠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밀어닥친 불행인가 싶습니다.

아이도 자라면서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용변 볼 때도 신세를 져야 합니다. 한 밤중 곤히 주무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깨워야 할 때 정말 미안합니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하루도 다른 사람들에게 짐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근심스러운 시선을 받을 때가 있고, 가끔씩 “어휴!”하는 한숨소리도 듣게 됩니다. 

자라면서 이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농담도 하며 밝게 살아보려 합니다. 부모님과 형제의 따뜻한 배려로 마음은 건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반신 불구라는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따금 찾아오는 우울함을 견뎌내기 쉽지 않습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여 용기 내어 밝은 바깥세상 구경 나가봅니다. 가족 품에 안겨서 말입니다. 신선한 바람을 쐬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좀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또래 소년들을 보게 되니, 걷지 못하고 설 수 조차 없는 자신이 참 초라해집니다. 급기야 다른 소년들이 “앉은뱅이, 병신”이라고 놀릴 때는,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됩니다. 다들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일하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하지만 그 몸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육체노동이 주종을 이루는 당시에 하반신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누가 무슨 일을 맡겨나 주겠습니까? 가족 생계에 보탬주기는커녕 양식 축내기만 하는 자신은 사회에서 필요 없는 잉여인간이라고 자학할 때도 있습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선 구걸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동냥받기 위해선 사람들의 동정심이 자극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드나드는 성전 앞이 제격입니다. 사람들이 너그러워지고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경건한 유대 사람들에게야 이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영적 안식처입니다. 그러나 이 장애인에게는 생존 문제를 겨우 해결 받을 수 있는 생계유지 장소입니다. 우리의 이 장애인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들을 모아 그렇게 생존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 더 숨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는 제물에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막힌 사실은 사람도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할찌라도 나병환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그리고 하반신 장애인은 부정하므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유대교 성전법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것도 서러운데, 영적/종교적으로 배척당하는 서러움은 더 지독했습니다. 그렇다고 따지고 항변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속으로만 생각합니다. “태어나면서 이미 불구인데 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남들 다 밟는 <유대인의 뜰>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댄단 말인가?” 고침 받는 것이 불가능한 장애인, 억눌린 정서의 소유자, 타인의 처분만 바라는 빈민, 사회적으로 무익한 잉여인간, 더욱이 성전출입마저 금지된 영적으로 내쳐진 인생! 자신의 실수나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주어진 장애! 그로 인해 사정없이 몰려 온 총체적 고통!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의 시점으로 되돌아옵니다. 수많은 유대 남녀가 기도하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중년의 장애인은 수중에 들어오는 동전이 어제보다는 많기를 바라며 구걸의 손을 내밀어봅니다. 어떤 이는 “한 푼 도와 달라”는 구걸 소리에 빤히 쳐다보며 구경하듯 지나갑니다. 어떤 이는 흘깃 쳐다보고는 귀찮은 듯 인상 찌푸리며 지나갑니다. 어떤 이는 바쁘다는 듯이 아예 시선을 외면하고 종종 걸음으로 지나갑니다. 어떤 이는 동전 한 닢을 휙 던지고 지나갑니다. 이 사람은 모든 이에게 인격적 교제권 너머에 있는 남이요, 구경거리며, 기피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때입니다. 두 유대 남자가 미문 앞으로 걸어옵니다. 습관처럼 상대의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 손 내밀어 동정을 구합니다. 순간 두 사람으로부터는 남다른 그 무엇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이들은 말 건네기는커녕 피해가기 바쁜데, 이 두 사람은 멈추어 서서 주목해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쳐다보라고 말합니다. 혹시 한 푼 주려나싶어 올려다봅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아, 내 마음 깊은 곳까지도 직관하는 듯한 매우 강렬하고 따-스한 눈길입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계가 멈춘 것 같습니다.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확신에 가득 찬 말로 선포합니다. “선생님께서 요구하시는 은과 금은 죄송하지만 지금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좋은 것을 드리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그리고 오른 손을 잡아옵니다. 아니 구걸하기 위해 내민 내 손 모두가 싸늘하게 외면했는데. . .  내 손을 이토록 다정하게 잡아오다니! 유난히도 따스한 그의 체온이 잡은 손을 타고 전달되어 옵니다. 이 사람은 나를 인간으로 대하는구나.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 순간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40여 년 동안 쓰지 못해 가늘어진 발에 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상합니다. 비틀 비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조심스레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내디딜 수 있습니다. 이내 걷게 되고 뛸 수도 있습니다. 이럴 수가! 평생에 처음으로 걷고 뛰어보다니! 기도하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젊은 두 사내를 놓칠 수 없습니다. 뒤따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합니다.

흥분하여 걷기도 하고 펄쩍 펄쩍 뛰기도 하면서 들어갑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외치며 들어갑니다. 이제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당히 미문을 통과하여 <여인의 뜰>을 지나 <유대인의 뜰>까지 나아갑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앉은뱅이가 예배자된 것입니다. 

성전 기도 마치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방인의 뜰>로 나오자 그 장면을 보고 웅성대던 사람들이 몰려가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묻습니다. 베드로는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여 십자가에 죽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였습니다. 그 분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목격한 이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제가 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확신에 찬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 그 날 남자만 오천 명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치유 받은 중년의 유대인도 그 말씀이 그대로 믿어집니다. 유대교 전통이 지금까지 주지 못한 참 자유와 평안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달되어 온 것입니다.

언젠가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정말 약속된 메시아인지 재확인하려는  질문을 한 적 있습니다. 누가복음 7: 22에 예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들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병자와 장애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질병을 고쳐주시고 신체장애를 회복시켜주셨다는 이야기에 그치질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교 성전으로부터 거부당한 부정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흠 없는 자로 용납되었다는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을 때, 성소 안의 휘장까지 찢어놓으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의 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뜰>, <유대인의 뜰>을 지나 <성소>와 <지성소> 안으로도 담대히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가장 깊은 교제 가운데까지 나아가게 하는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 여행을 마치고 오늘 이곳으로 되돌아옵니다.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셨던 주님께서는 지금도 꼭 같이 역사하십니다.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은혜 받은 자요 특권 누리는 분입니다. 그러나 몸은 예배드리기 위해 여기 와계시지만 영적 지성소에 들어가 마음껏 주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영적으로 벌거벗고 가난하며 파리해졌습니까? 주님께서 “일어나 걸으라.” 말씀하시며 날마다의 교제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신체 한 부분이 장애를 겪고 계십니까? 몹쓸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계십니까? “일어나 걸으라.”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필요하고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서 치료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한 고통 이겨낼 수 있는 그 믿음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몸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불안하며 두렵고 눌려 지내는 분이 계십니까? “일어나 걸으라.” 우리 주님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그리고 오랜 정서적 아픔도 만지고 치유하기 시작하십니다.     

물질 궁핍하여져 아침 맞이하는 것 고통스럽고, 사람 만나는 것 피하고 싶고 예배 출석하는 것조차 힘드십니까? “일어나 걸으라.” 주님께서는 한결같이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시험 감당해갈 넉넉한 믿음을 더해주시고, 경제적 고통도 극복해가도록 길 열어주십니다.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취직 되지 못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나를 꺼리는 청년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배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일어나 걸으라.” 우리 주님 있는 모습 이대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괜찮다.” 말씀하시며, 더 적합하고 더 좋고 더 유익한 기회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저앉은 인생이 아니라 힘차게 일어서 걸으며 기뻐 펄쩍 펄쩍 뛰는 인생이 되길 원하십니다. 사랑의 우리 하나님, 쓸 데 없다며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이대로 받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그리하여 감사와 감격 속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되길 원하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달려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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