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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 (사 28:23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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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사28 : 23 - 29절             
제  목 :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

사55:8절

[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갈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

유대인의 제2경전인 탈무드에 아카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장 존경받는 랍비 중 한 사람인 그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책을 보기 위한 등잔과 시간을 알리는 수탉,
    먼 길을 위한 나귀와 토라를 가지고 갔습니다. 
여행 중 날이 저물어 한 마을에 들어가 잠을 청하니 모두가 거절했습니다.
언제나 감사만 하는 아키바는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 하나님이 더 유익하게 해주실 것이야`라며
      오히려 감사하며 마을 어귀에서 잠을 잤습니다. 
길에서 노숙하려니 잠이 오질 않아서 토라를 읽으려고 등불을 켰으나         
바람에 등불이 꺼져버렸습니다.
아카바는 `하나님이 더 유익하게 해 주실거야`하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다시 잠을 자려고 잠을 청했더니
    여우의 울음소리에 나귀가 놀라서 멀리 도망갔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불평했을 텐테
  `하나님이 더 유익하게 해 주실 것야`하고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나귀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수탉도 놀라 멀리 날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라고는 토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키바는 `더 유익하게 해 주실거야`라며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날이 밝았고 마을에 들어가 보니
전날 밤 도적 떼가 그 마을을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험 속에서 감사하는 아키바를 지켜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와 같이 원치 않는 일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
이러한 사건이 남쪽 유다 백성들에게 경고가 될 것인데
    유다는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에게 진노가 임한다 해서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의 적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을
            농부의 농사 비유를 들어 말씀합니다.
파종하려고 밭을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리고 추수할 때도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고 대회향은 수레바퀴로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지 아니하느냐? 하며
하나님은 적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어떨 적에는 수레바퀴로 곡식을 짓밟듯이 환난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시지마는
  결국은 쓸어 모으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호1:3- 보면 호세아 선지자가 부정한 아내 고멜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합니다.
호세아의 아들의 이름은 바로 이스라엘의 앞날을 말하는 상징적 이름입니다.
이스르엘은 뜻이 <흩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호1:11절에 보면
[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당시 농사를 짓는 방식 가운데 한 가지가
골짜기가 범람할 때 농부가 씨앗을 가지고 상류에서 씨를 흩어 뿌리면
      흩으져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하류에 퇴적된 땅에서 그 씨가 자라서
      곡식을 거두게 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즉 이스르엘의 하나님은 흩으시는 것 같지만
          결국은 거두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보면

1.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누구에게든지 공평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공평하신 하나님 !
오늘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농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농부의 비유를 들었는가 하면
그것은 누구나 다 쉽게 납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어라
        자세히 내 말을 들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세히 보고 듣기만 해도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위 환경을 통해서 교훈 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간과하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 먼저 귀를 귀울이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4-25절에                                     
[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고 고르게만 하겠느냐? ]
[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히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
우리는 여기서 먼저 심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후9:6절
[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느니라. ]
이것이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의 1법칙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진리 지극히 단순한 진리요 지극히 당연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가나안의 축복입니다.
신6:10-에 보면
[ 네가 건축치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만 하면 저절로 잘되는 것 같이 오해하고 있는 교인들
만약 예수 믿기만 하면 저절로 농사 장사 공부 잘되는 줄 알면
그건 불공평한 하나님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것이지 저절로 잘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란? 신11:10절에
  1)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2)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땅이라 합니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축복하실 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시느냐?
14절에 [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내리신다 ] 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비만 내린다고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땅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농부는 갈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축복은
        거두려고 땀 흘리며 수고하는 농부가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2:6절에
[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 고 합니다.
시126:6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부리는 자로 하여금 기쁨으로 거두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역대 미국의 부호라면 록펠러 다음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카네기>입니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13살 때 우편배달부 조수를 했습니다.
우편배달을 하면서 배달 구역내 사람들의 집주소를 다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배달원 보다 훨씬 빠르고 많이 합니다.
봉급 때가 되어서 사장이 급료을 주는데
    다른 배달원들에게 봉급을 주고는 자기는 열외를 시킵니다.
그래서 어이쿠! 뭐가 잘못되었구나 싶었는데
다른 배달원보다 주당 2달러 25센트씩 더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하면 더 많은 보수가 있다는 것
이것이 카네기의 삶의 신조였다고 합니다.
땀 흘리는 농부가 먼저 거두는 것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 제1 법칙은
      바로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의 두 번째 원리는 
        심고 거두는 방법에 있어서 곡식마다 다른 것 같이.

25절「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은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는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그리고 곡식을 거둘 때도
27절 [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고
    대회향은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참고적으로
소회향 대회향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향 재료를 얻는 식물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성도들에게 심고 거두게 하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구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같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믿음의 족장들을 축복하시는 방법이 다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도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어 보면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 늙으막하게 독자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 자라났습니다.
    만약 이삭에게 싸움하라면 기질적으로 못합니다.
그래서 불레셋에게 우물을 파놓으면 빼앗기고 파놓으면 빼앗기고
양보하고 양보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부자가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질적으로 간사하고 사기성이 짙은 인간입니다.
이런 야곱을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가? 살펴보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관한 일이라면 아버지도 형도 속이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더위 추위 무릎 쓰고 밤 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시련도 겪었지마는
하나님 축복받는 일에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같은 혈통이지만 복을 주시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성도는 평탄한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만
어떤 성도는 환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에 나를 맡길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 속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생활 속에서도
신32:10-에 보면
[ 여호와께서 그를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눈동자 같이 지키실 뿐만이 아니라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듯이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반석의 꿀을 빨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두더지 같이 땅 속을 기어 다니는 짐승 같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왕같은 제사장 나라 만들기 위해서
    특별한 훈련과 보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는 새끼를 키워 날 때쯤 되면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먹이를 3일에 한번쯤 준다고 합니다.
새끼는 배가 고프다고 몸부림을 치지만 어미는 생각이 있습니다.
“ 야! 너 체중 줄어야 날수가 있는 거냐 ”
다 하나님이 주신 본능이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떤다고 합니다.
그러니 소회향, 대회향은 작대기나 막대기 같은 것으로 살살 털어야 하고
소맥이나 대맥은 도리깨로 떨든지 수레바퀴로 갈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은 필경에는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28절[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덜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발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
비록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짓밟히고
유다가 바벨론에 수모를 당하는 것 같지마는
하나님께서 그냥 던져주지 아니하고 결국은 회복케 하신다는 위로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새예루살렘 즉 천국의 모습이 두 번 나옵니다.
구약에 에스겔47: 48:에 나오고 신약에 계21:에 나옵니다.
계시의 공통점 가운데 한 가지가 기록할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중 그발강 가에서 계시를 받았고
사도 요한은 유배된 밧모섬에서 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둘 다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암담한 상황이요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예루살렘 환상을 통해
    궁극적 구원, 궁극적 승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곡식을 밟아 뭉게 뜨리는 것이 아니라
      곡식을 거두듯이 하나님 백성들을 거두신다는 말입니다.
유다의 현실이
앗수르에 패망한 이스라엘과 같이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지마는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결코 쇠퇴함이 없고 퇴보함이 없는 것입니다.
29절에 [ 그의 묘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시다 ] 라고 합니다.

제가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보며 느낀 것이             
로마의 콜로세움, 중국의 만리장성, 캄보디아 앙코르 왓트 등
    세계의 불가사의에 속하는 건축물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시간이 지나가니 퇴색되어 갑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회교사원 같은 건물은
  가이드가 하는 말이 벽면의 모자이크를 만들기 위해 타일을 만들때
  모유로 타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퇴색하지 말라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니깐 역시 퇴색합니다.
그래서 감탄 뒤에는 뭔가 무상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미국의 나이야가라 폭포나 스위스 알프스 만년설 같은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퇴색이 없어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
결국은 변함없이 거두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묘략과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 속에서 결실을 맛 볼 수 있느냐?
사28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3가지입니다.
1)북쪽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져바렸기 때문에
            앗수르에게 패망했다는 것입니다.

2) 이러한 광경을 보고도 안일하게 경만한 자가 되어
  10절 [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
무슨 말인가 하면
이사야의 경고의 말씀이 듣기 싫은 잔소리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15절에 보면                           
[ 너희 말이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으며 음부와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
즉 안일한 생각에 자기들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 있지요?
    한국교회의 침체가 자기와 무관하다고 괜찮다 생각하는 사람들
그러나 성경은 18절에 [ 너희가 그것에게 짓밟힘을 당할 것이라 ] 합니다.
22절에 [ 너희는 경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우심할까 하노라 ]
          덫에 걸린 짐승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 아래 신앙의 경각심을 가지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현자가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덫을 조심하라. 덫 위에 앉지 마라.`
시간이 지나자 그의 집에 있던 앵무새가 이 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현자가 말을 할 때마다 앵무새는 현자보다 더 큰소리로 외칩니다.
`덫을 조심하라. 덫 위에 앉지 마라.`
그러던 어느 날, 새장이 열려 앵무새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걱정이 된 현자와 제자들은 숲 속으로 앵무새를 찾으러 갔습니다.
숲 속 깊숙한 곳에서 앵무새의 외침을 들은 그들은
  서둘러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불쌍하게도 앵무새는 새 덫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앵무새는 덫에 걸린 채 계속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덫을 조심하라. 덫에 앉지 마라.`
오늘 우리도 혹 이 앵무새 같이 입으로만
    정신 차려야지, 깨어 기도해야지 하고 있지 아니하는지,
신앙의 경각심을 가진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러기 위해서 시온의 기초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16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시험하는 돌입니다.
      역행하면 파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순응하면 절대로 망하지 아니하고 꼭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때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순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어느 정도는 착해져야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가장 쉬운 일입니다.
옆집에 가는 길이 두 가지 있는데
    한 가지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옆집까지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그냥 바로 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전 세계를 다니며 온갖 수고를 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부족, 자기 잘못, 자기 악습, 자기 죄의식을 다 버리고
    자기를 완전히 극복할 때까지 처절한 자기 훈련을 합니다.
    이것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은 한 발짝만 내디디면 됩니다.
주님을 향해 돌아서서 그냥 “네”라고 한 마디만 하면 거기가 바로 옆집이다.
하나님은 지금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너무 먼 길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최선의 방법 같지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항상 불완전 하고 또한 퇴색합니다.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켜 도시화 산업화 만들어
    더 잘 사는 환경을 만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연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최상의 환경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바닷가에 가면 공기가 참 맑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지구의 산소의 90%가 바다 속의 프랭크톤이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산의 나무가 만들어 내는 산소는 여기에 비하면 1/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시화 산업화롤 인근 해역을 다 오염시켜 버리니
    프랑크톤이 없어지고 바다 사막화가 되고 산소가 줄어들고
    결국은 문명의 이기로 사람들이 제 명대로 못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내가 알아서 하면 잘 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유익합니다.

1. 수고하는 농부가 먼저 열매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적당한 방법은 꼭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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