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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당신의 마음에 예수가 계십니까?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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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음에 예수가 계십니까? (눅 2:41-51)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를 따라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가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하룻길을 내려와서야 예수가 자신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허둥대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우리 예수 못 봤느냐?”고 물으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와서야 박사들과 더불어 성경을 나누고 있는 예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부모는 “아이야 왜 부모를 이렇게 놀라게 하느냐?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왜 알지 못했습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큰 암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너무나 번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경학자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유월절 축제속에 2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가는 곳곳마다 축제의 마당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그 속에서 예수를 잃어버릴만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변이 번잡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쉽고, 바른 일에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삶은 얼마나 번잡한지 모릅니다.
저마다 바빠 죽겠다고 말합니다.
산란하고 불안정하고 산만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동행할 리가 없습니다.
44절에 보면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고,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예수없는 신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큰 교회를 선호하는 현대 교인들 가운데는 군중 속에 끼어서 함께 따라가다 보면 자기도 천국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아내가 열심히 기도하니까 아내의 손을 붙들고 열심히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어머니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니까 어머니 따라가다 보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현대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쾌락을 구경하며 함께 즐기는 종교 도착증 환자”들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거기에 나의 문제가 있고, 너의 문제가 있고, 우리 모두의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 동화책에서나 나올 만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여행하던 중에 마을입구에 서 있는 한 집에 교패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벨을 눌렀습니다.
마침 집을 지키던 새댁이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습니다.
당황하던 새댁이 말하기를 “이 가정은 장로님가정입니다, 어머님은 권사님이시고, 제 남편과 저도 00교회 집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아니, 교회의 직분 말고 이 댁에 예수님이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떠나고 난 다음에 새댁의 귓전에 쟁쟁거리는 소리가 남아있었습니다.
이 집에는 예수님이 계신가? 정말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언어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가 행복해하는 이 심장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 우선순위 속에, 가치판단 기준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하고 진지하게 자기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걸어가는 삶의 자국마다 예수님이 곁에 계십니까?
내가 고통하고 힘들어하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십니까?
내가 기뻐하는 그 기쁨 한 가운데 과연 예수님이 계십니까?
내가 예수와 함께 기도하고 예수와 함께 헌신하며 동행하고 사십니까?
여기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가 “곁에 있겠지?, 뒤에 따라오겠지?, 앞서 갔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예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앞에 세워놓고 예수를 바라보고 따라왔더라면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여행할 때 행군도를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언제나 앞장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머물 때는 백성들의 중심에 법궤를 갖다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등뒤에 예수님이 계시고, 내 좌우편에 예수님이 계시고, 내 앞에 예수님이 계시도록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과 시련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고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 때문에 죽겠다는 각오 없이는 단 하루도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우리를 죽이는 사람도 없고, 예수를 믿는다고 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알곡과 쭉정이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재림해 오실 때에, 예수님 영접할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기름이 바싹 말라 버리고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의 구별이 모호해 지고, 가짜와 진짜의 구별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지난 후에야 예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요.
이 세상의 길은 돌아갈 수가 있고, 집에다 놔둔 물건을 다시 가져올 수 있고, 어제 갔던 길이 궁금하면 다시 가볼 수도 있고, 지난달에 실패했던 그 일은 다시 도전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길은 되돌아갈 수가 없고, 연습도 없고, 시행착오도 없고, 한번 걸어가는 직선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인생의 종착점에 서 있을 때 “내 곁에 예수가 안 계시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 인생은 정말 불행한 인생이요, 망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소원하는 기도 속에, 꿈과 비전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삼손이 기생 드릴라에게 빠져서 그가 깊이 잠든 사이에 힘의 근원이었던 머리카락이 잘려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삼손은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비극 중의 비극이요,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잃었고, 삼손은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들 또한 만약 오늘 예수를 잃고,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것을 붙들고 산다면 이는 분명히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잃은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2)성전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얘기는 여기 모인 우리들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보혈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이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라는 얘기는 여기 모이는 우리 성도들의 마음이 모두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입니다.
또한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얘기는 여기에 서있는 목사와 우리 성도들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교회가 영광스러운 것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2천년의 기독교 역사동안 교회는 연약함이 있었고 때로는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말했고, 칼빈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중심에 성전을 두고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내 삶의 중심에 말씀을 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기고 살아간다고 하면, 믿음의 선배들처럼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은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잃어버린 예수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만나는 친척과 지나가는 사람들 붙들고 “우리 아이 예수를 못 봤느냐”며 아는 자 중에서 찾아보았으나 동행인 가운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찾았습니까?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내가 교회에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부자는 세상에 가야 있고,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 그리고 육체의 쾌락과 재미는 교회 밖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무엇 때문에 교회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 만나러 온 것인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보러 오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오면 설교 속에서, 찬송 속에서, 기도 속에서, 성도와의 교제 속에서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우리가 낙심이 되고, 불평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근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왕국을 무너뜨리지 못해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익산에 내려와서 지난 16년 동안 목회하며 적지 않은 교인들이 의외로 교회에 정착을 못하고 방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늘 못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한 분 두 분을 만나보는 사이에 그게 방황이 아니고, 어디가면 내 영혼을 맡길 수 있을까? 어디가면 생명수가 넘치는 말씀이 있는가? 어디가면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예배가 있는가? 하고 주일마다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는 저들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로서 한편 부끄럽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보여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를 통하여 찾아오는 성도들마다, 상처난 심령마다, 갈증난 심령마다, 방황하는 심령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로 충만하여 돌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에 좋은 말씀을 주시고 좋은 예배를 주시옵소서”
여러분, 한번 큰소리로 따라 합시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

말씀을 맺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신간 중에 “단순하게 살아라”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물밀듯이 밀려오는 정보 홍수시대에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핵심가치에 집중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가치와 비전이 분명한 교회입니다.

목회 4대 비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평신도를 깨워 동역하는 교회. 2.선교명령을 순종하는 교회. 3.천국일꾼을 양성하는 교회. 4.지역사회에 복음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전진 그리고 또 전진”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를 잃고 길을 잃고 행복을 잃고 허둥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우리 교회에 가면 예수를 만난다. 우리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면 보혈의 은총이 있고 예수가 보인다”고 말해 줍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천국을 붙들고 소망 중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예수님의 제자의 삶 즉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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